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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마라톤보다 인생이 훨씬 어렵네요"

- 풍운의 마라토너 김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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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눈에 보기에도 달리는 사람의 몸이 아니었다. 달리기엔 몸이 무거워 보였다. 격렬했을 과거의 흔적을 그의 몸에서 찾기 어려웠다. 허리는 굵었고 얼굴은 부숭부숭했다. 얼굴색은 건강하게 그을린 구릿빛과는 거리가 멀었다. 쉰 셋이라는 나이에 비하면 젊어 보이긴 했는데 활기에 넘치는 표정은 아니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천호역 3번 출구 앞에서 "윤춘호 위원님이시죠?"라며 손을 내미는 중년 사내의 첫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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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기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황영조, 이봉주와 함께 1990년대 초반 한국 마라톤 중흥을 이끌던 3인방 중의 한 명이라면 기억이 날까.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34킬로미터 지점까지 황영조, 일본의 모리시타와 함께 선두 그룹에서 달리던 선수라고 하면 기억이 더 선명해질 수도 있다. 이쯤 말하면 마라톤 매니아들은 그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릴 테지만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이 한국 마라톤 신기록을 세 차례나 갈아치웠고 그의 최고 기록은 한국 역대 마라톤 5위라는 것까지 말하면 그렇게 대단한 선수가 있었나 할지도 모르겠다.


1990년 동아 마라톤 1위를 시작으로 그는 한국 마라톤의 샛별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후 그의 기록은 찬란했다. 1991년 춘천 마라톤 1위, 1992년 뉴욕 마라톤 3위, 1993년 동아 마라톤 1위, 1994년 동아 마라톤 2위였다. 그는 마라톤 신기록 제조기로 불렸다. 1991년 이후 4년 동안 세 번의 한국 신기록을 경신했다. 자기 자랑을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한국 신기록을 세 번이나 경신한 사람은 자기 말고는 없다고 말할 때만큼은 자부심이 넘쳤다. 2시간 10분 이내로 뛰면 세계적인 수준으로 인정받던 시절 그는 2시간 8~9분대를 뛰는 '세계 톱클래스의 선수'였다. 김재룡, 황영조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고 이봉주는 아직 그보다 몇 걸음 뒤에서 달리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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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조는 달리는 모습과 행동 그 자체로 인상적인 선수였다. 독사라고 불리던 한국 마라톤의 대부 정봉수 감독에게도 가끔 대들었고 자기만의 훈련 방법을 고집했다. 선수 생활은 짧았는데 올림픽 금메달의 아우라에 힘 입어 국민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이봉주는 지독한 연습 벌레였고 노력한 만큼 성적이 나왔다는 점에서 행운아였다. 많은 사람들이 봉달이라고 부르며 순박한 모습의 그를 국민 스타로 대접했다. 나이 마흔이 되도록 달려서 선수 생명도 길었다.


현역 시절 김완기는 그 두 사람에 비하면 밋밋했다. 기록은 우뚝했는데 그 사람됨은 도드라지지 않았다. 주법이 화려하지도, 개성이 강하지도, 행동이 모가 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달리는 선수였다. 황영조, 모리시타와 선두그룹에서 달리던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영상을 다시 봐도 그가 눈에 확 들어오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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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사람은 아름답다. 김완기의 모습이 그랬다. 그에게는 달리는 일이 주는 순전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는 달릴 때는 오직 달리는 일만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른 선수들도 그렇지만 특히 김완기는 달리는 행동 그 자체에 집중하는 사람이었다. 장거리 달리기는 사람을 한계 상황까지 밀어붙이는 운동이다. 요행이 끼어들 틈이 없는, 정직한 운동이다. 그런 마라톤의 우직한 이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선수가 김완기였다. 그는 달리는 도중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앞으로 치고 나갈 때도 그랬고 뒤로 처질 때도 그랬다. 달리는 일의 고통이나 기쁨을 얼굴이 아닌 몸으로 표현하는 선수였다.


그와 같은 팀에서 5년을 보내며 한솥밥을 먹었던 이봉주는 선수 시절 김완기를 이렇게 기억했다.


"온순하고 별로 말이 없는 선배였어요. 실력으로만 보면 황영조보다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운이 좀 없었어요. 황영조가 개성이 강했던 것에 비하면 김완기 선수는 부드러운 대나무 같다고나 할까요."


존재감이 약했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그의 좌절에 대해서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34킬로미터 지점까지 선두였지만 결승선은 28번 째로 통과했다는 사실도, 그가 4년의 와신상담 끝에 출전한 애틀란타 올림픽에서는 겨우 트랙 두 바퀴를 달리고 포기했다는 것도 잘 모른다. 김완기로서는 사람들이 그의 이런 흑역사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 신기록을 세 번이나 갈아치운 것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반가울지도 모른다. 그가 1997년 스물 아홉 살의 나이에 은퇴했다는 것도, 은퇴 후에 몇 차례 재기를 위해 몸부림 친 사실도 사람들은 거의 모른다. 그가 지금 일용직 건설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는 것도, 서울시 환경 미화원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2. 지난 3월 이봉주와 황영조가 코로나 성금으로 각각 1억원을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문득 김완기 생각이 났다. 황영조는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고 이봉주는 대한육상연맹 홍보이사로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주 얼굴을 본다. 두 사람은 지금도 현역 시절 못지 않게 활동 중이어서 사람들에게 잊혀질 틈이 없다. 그들에 비하면 김완기는 이미 잊혀진 존재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몬주익 경기장을 몇 킬로 앞두고 뒤로 처지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직하게 달리던 그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학교나 실업팀, 아니면 지방자치단체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까 짐작했다. 은퇴 이후 2000년과 2004년 재기를 시도 중이라는 기사가 나온 이후 그의 근황을 알 수 있는 기사는 거의 없었다. 몇 사람에게 그의 안부를 수소문했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2014년 어느 마라톤 대회에서 황영조와 만나는 사진이 언론에 비친 그의 가장 최근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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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연락처를 얻어 그에게 취재 요청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적다 유심히 보니 그의 전화 번호 끝자리가 42195였다. 마라톤에 대한 애정을 전화 번호로 표현하고 있었다. 토요일 오전에 보낸 문자에 대해 저녁 7시가 되도록 답이 없었다. 전화를 해볼까 할 때 그에게서 답문자가 왔다. 아직도 자신을 운동선수로 기억해줘 감사하지만 자기 인생은 성공과는 거리가 멀고 남에게 귀감이 되는 삶도 아니라며 인터뷰를 사양하는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행간에서는 취재 요청에 응할지 여부를 고민하는 흔적이 느껴졌다. 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모습이 옛날의 운동하던 모습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목소리는 씩씩했다. 나이 들고 체중이 늘어났다며 그것이 마치 자기 잘못이라도 되는 양 말했다. 기사 쓰는 것은 나중 일이고 우선 한 번 만나자고 했다. 몇 번 고사하던 그가 '제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라며 인터뷰 요청을 수락했다. 천호역에서 만나자고 했다. 시간은 저녁 시간이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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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는 안주에는 거의 손 대지 않은 채 소주를 꽤 빠른 속도로 마셨다. 주량을 물었더니 소주 두 병이라고 했다. 지금은 어디 소속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마라톤 기획사에 있다고 했다. 올해 들어 코로나 때문에 마라톤 대회가 대부분 취소되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은퇴 이후 삶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은퇴한 다음 해인 1998년에도 재기를 노렸지만 고질적인 부상으로 포기했다. 2000년 불어난 체중을 줄이고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단축 마라톤에서 우승하면서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부상과 소속팀과의 갈등으로 주저앉았다. 그의 나이 36살이던 2004년에는 경북 영주에 있는 동양대학교에 적을 두고 다시 운동화 끈을 묶기도 했지만 그의 재기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났다.


"팬들이 제가 하는 가게까지 찾아와서 외국에서는 30대 후반까지 뛰는 선수들이 수두룩한데 많은데 왜 그리 빨리 은퇴했느냐며 재기를 요청했고 저도 국제대회에서 성적을 제대로 못 낸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 현역 복귀를 추진했는데 운동은 다 때가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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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달리려는 노력만이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생업 전선에서도 연전연패였다. 음식점, 스포츠 용품, 마라톤 칩 제조회사, 마라톤 기획사를 직접 경영하거나 관여했지만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가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 오히려 뒷걸음 치는 동안 선수 생활 시절 모아 놓은 적지 않은 재산이 야금야금 사라졌다.


사업 실패는 가정 불화로 이어졌다. 2006년 무렵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을 만큼 힘든 상황에 몰렸다. 이혼 절차가 마무리되고 나니 그의 수중에는 3백만 원이 남았다. 고시원과 값싼 여관을 전전했다. 달리는 일 말고는 배운 일도, 아는 일도 없었다. 은퇴 초기에는 몇 군데에서 지도자 제안이 있었지만 사업에 몰두하던 때라 그가 거절했고 그가 지도자 자리를 알아볼 때는 그를 반기는 팀이 없었다. 가끔 동호회 모임이나 마라톤 경기 대회에서 받는 수고비가 거의 유일한 소득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했는데 실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이후에도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자동차에 부과되는 세금을 낼 형편이 못 돼 번호판을 압류당했다. 번호판이 없는 자동차를 알아서 처리해주겠다는 지인의 말을 믿고 30만 원을 받고 차를 넘겼다. 지인은 부품을 빼낸 뒤 그 차를 불법으로 폐차시켰다. 차는 없는데 명의상 차주인 김완기에게 세금은 꼬박꼬박 나왔다. 가산금까지 붙어 내야할 돈이 7백만 원까지 늘었다. 그는 구청과 경찰서를 쫓아다니며 억울하다고 호소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유일한 재산인 고향 선산까지 압류당할 처지에 빠졌다. 누군가 인력소개소에 가보라고 권했고 인력소개소는 이 마라톤 챔피언에게 건설 현장을 소개해줬다. 건설 노동자로 처음 받은 돈이 8만 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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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라토너로 그의 인생은 누가 뭐라해도 성공적이었다. 세 번이나 한국 기록을 세웠고 국가를 대표해 두 번이나 올림픽에 참가했다. 이런 공을 인정받아 체육훈장을 받기도 했다. 다만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서 국내용 선수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들으면 지금도 가슴이 쓰리다. 두 번의 올림픽 출전은 그에게 기회였지만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그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코스와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황영조, 일본의 모리시타 선수와 선두 그룹을 형성하면서 달릴 때 2위 그룹과는 200m 차이였다. 이런 페이스로 가면 적어도 메달은 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29km 지점 오르막에서 황영조가 치고 나가는 것을 따라 잡으려다 데미지를 입었고 34km 곡선 주로를 돌아 나가는 지점에서 몸이 꺾이는 느낌과 함께 선두 그룹에서 탈락하고 급격하게 페이스를 잃었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결과는 허탈함 그 자체였다. 올림픽 선발전에서 이봉주가 그를 앞섰지만 연습 과정에서는 그의 기록이 더 잘 나왔다. 정봉수 감독도 이봉주보다 김완기의 금메달 가능성을 크게 봤다. 무엇보다 4년 전 바르셀로나의 설움을 반드시 갚겠다는 각오가 단단했다. 연습량도 충분했고 몸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다. 호주 전지 훈련도 순조로웠다. 그런데 경기 20일 전부터 아킬레스 건에 통증을 느꼈다. 그 때부터 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경기 당일 트랙 두 바퀴를 달리고 기권했다. 그가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4년 동안 칼을 갈아왔는데 운동장 두 바퀴 돌고 포기하는 제 마음이 어땠겠어요? 노력을 그렇게 죽으라고 했는데 겨우 8백미터 달리고 나왔어요. 며칠간 잠이 오지 않더라구요. 신이 있다면, 신이 너무 무심한 거죠."


이 대목에서 눈물을 보였다. 그의 눈물이 안타까웠지만 그의 말에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완벽한 몸 상태를 만들지 못한 것은 결국 그의 책임 아닌가, 올림픽 대표선수는 국가를 대표하는 것인데 겨우 운동장 두 바퀴 달리고 포기하다니…당사자 마음은 오죽했을까 싶으면서도 그게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이었나 하는 의문을 떨칠 수는 없었다.


그는 종종 순박하다 못해 나약해 보였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그 힘든 훈련을 견디며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선두 그룹으로 달릴 때 이대로 가면 입상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는데 이 사람 목표가 금메달이 아니라 입상이었다는 말이 귀에 콱 박혔다. 이 사람은 근성이나 끈기 이런 것보다는 타고난 천재성으로 운동을 한 사람일 수 있겠다 싶었다.


"독종이다, 악바리다 이런 말은 별로 안 들어 보셨죠?"

"네. 그래서 제가 성공을 못한 거죠. 강하고 독해야 되는데 욕심이 없으니까요. 욕심이 있었으면 더 도약을 하고 발전을 했겠지요."


공식 대회를 완주한 게 열 몇 번이라고 했다. 그럼 도중에 포기한 레이스는 몇 번이냐고 물었더니 네 번인가 중도 포기했단다. 한때 그를 많이 아끼고 사랑했던 그의 지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죽어도 달리다가 죽어야지 어떻게 기권을 해?"

그가 답했다. "꼭 그렇게 죽어야 하니...너는 내가 그렇게 죽으면 좋겠어?"


1990년 북경 아시안 게임도 그에게는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 경기다. 그 해 봄 동아마라톤에서 1위를 차지했다. 공식 대회 첫 우승 이후 마라톤에 자신감이 생겼고 그의 컨디션은 최고였다. 그런데 경기 사흘 전날 훈련장에서 숙소로 돌아오다 베이징 시내에서 길을 잃었다. 낯선 시내를 몇 시간을 헤매다 겨우 숙소로 돌아왔다. 정봉수 감독을 비롯한 선수단은 그가 북한에 납치라도 된 줄 알고 난리가 났다. 그 때 컨디션이 무너져서 떼놓은 당상처럼 생각했던 우승을 못하고 5위에 그쳤다. 이봉주는 김완기가 그 때 우승을 했더라면 그의 마라톤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고 했다.


김완기는 책임을 남에게 미루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미루고 싶을 때 그는 운(運) 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의 마라톤 사부 정봉수 감독에 대해서도 이러저러한 말을 했지만 그의 실패를 감독 탓으로 돌리지는 않았다. 언론은 그를 비운의 마라토너라고 불렀고 그 역시 스스로 불운하다고 말했다. 그가 네 시간이 넘는 대화 중에 가장 많이 한 말이 "제가 죄 지은 것도 아닌데…" 라는 말이었다. 그 뒤에 '신이, 운명이 왜 이렇게 저한테만 가혹한지 모르겠어요'라는 말이 생략되었을 거다. 김완기는 불운이라는 말에 기대 그의 현재 모습을 설명하고 싶은 듯했다. 노력할 만큼 노력했고 애쓸 만큼 애썼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남들처럼 인생이 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자기에게 물을 책임을 운으로 돌리는 것은 아닌가 싶은 대목도 있었다.


5. 이 사람은 달리기가 자신의 천성, 본능이라고 표현했다. 초등학교 때는 운동회에서 1등을 해서 공책 타고 연필 타고 화판 타는 게 좋았고 중학교 때는 운동부에서 빵과 우유를 받아 먹는 재미로 달렸다. 기록이 탁월하지는 않았다. 중학교 때는 랭킹 5위 정도였다. "도내에서 랭킹 5위?" "아니요. 군내에서요." 전국도 아니고 도 단위도 아니고 군내에서 5위라니 타고난 천재는 아닌 듯하다고 말했더니 체계적인 지도를 받은 것도 아니고 잘 먹은 것도 아니어서 그랬을 거라고 했다.


가난한 농가의 4남 5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달리기에 재능이 있었고 그 재능을 일찍 알아챈 것은 그의 복이다. 무엇보다 달리는 것 자체가 좋았다. 자연스럽게 장거리 육상 선수가 되는 게 목표가 되었다.


그는 3개 고등학교를 전전한 끝에 5년 만에 졸업을 했다. 정읍농고 2학년 마칠 무렵 그는 남원 상고에 1학년으로 재입학 했다. 달리기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남원상고는 육상의 명문이었다. 동급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1년 후배들이 선배가 되었다. 내성적인 그는 더더욱 말이 없어졌다. 오로지 연습에 몰두했다. 여기에서 비로소 체계적인 달리기 교육을 받고 먹는 것도 나아지면서 성적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남원상고 육상팀은 지리산 훈련으로 유명했다. 1주일에 한 번 지리산 반야봉과 노고단을 뛰어서 오르내렸다. 짧으면 30킬로, 길면 40킬로를 달리는 훈련을 통해 그의 잠재해 있던 장거리 선수 재능이 꽃 피기 시작했다. 1987년 그가 두 번째 주자로 뛴 전국 고교 역전 마라톤 대회에서 남원상고는 2시간 9분대의 신기록을 수립했다. 역전 마라톤이지만 고등학교 육상팀이 마의 벽으로 불리던 2시간 10분대를 깬 것은 당시 대단한 화제를 모았다. 그는 대회 최우수 선수로 뽑혔다. 이런 그를 코오롱 마라톤 팀의 정봉수 감독이 눈 여겨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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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야기를 시작한 지 거의 세 시간쯤 되었을 때 그가 뜬금없이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에 원서를 접수했다고 했다. 소주 두 병을 마신 그는 적당히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거기서 (마라톤) 감독을 뽑나요?"

"아뇨. 일반 공무원요. 안되겠지만 (원서를) 내봤어요"

"그럼 체육 관련 공무원을 뽑는 모양이군요."

"아뇨. 청소 공무원요. 8급 정규직 공무원을 뽑더라구요." 그는 '정규직' '공무원'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서울시 시설 관리공단에서 8급 정규직 미화원을 뽑는데 거기에 원서를 냈다는 말이었다. 1차 서류 전형은 통과했고 10월 15일 필기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 제한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50세에서 60세까지 대상이란다. 40명 뽑는데 270명이 지원했다. 국가유공자처럼 가산점을 받는 지원자들이 많아서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김완기는 한국 신기록도 세 차례나 세우고 훈장도 받은 자기 같은 사람도 가산점을 줘야 되는 거 아니냐고 했다.


김완기는 최근 지방에 있는 중학교의 육상부 코치로 일할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미화원 시험 경쟁이 치열해서 합격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하면서도 만약 합격이 된다면 두 자리를 놓고 어디로 가야 할지 고심하는 듯했다. 자신의 특기를 살리려면 당연히 중학교 육상 코치직을 택해야 될 것 같은데 거기는 보수가 최저임금 수준이고 지방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다. 보수가 가장 큰 문제인 듯했다.


"혹시 지금 신용불량자인가요."


자동차에 부과된 세금과 환경개선부담금을 내지 못해 고향 선산까지 압류가 들어올 것이라고 하니 물어본 말이었다. 김완기는 신용 불량자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 말 끝에 그가 이렇게 말했다.


"위원님, 제가 요즘 무슨 일 하는지 아십니까. 노동일 하고 있습니다. 노가다…신용 불량 안되려고요. 죽으라고 갚아서 이제 3백만 원 남았습니다."


그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은 대화 중에 느낄 수 있었지만 건설 노동자로 일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굳이 저녁에 만나자고 한 것은 그날 일을 마치고 만나기 위한 것이었고 약속 장소로 정한 천호역 3번 출구에 그가 다니는 인력소개소가 있었다. 술기운이 아니었어도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자신의 사정을 말했을 거 같긴 하지만 그가 이 대목을 길게, 반복적으로 말한 것은 술기운 때문일 것이다. 현장에서 힘쓰는 일을 도맡아서 하고 성실함을 인정받아서 비 오는 날에도 자기를 불러 주어서 행복하다며 카톡에 간략히 정리된 근무 기록을 보여줬다. 날짜와 요일 그리고 작업 현장이 적혀 있었다.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도 그는 충무로 CJ 관련 공사 현장에서 일했다. 하루 일하면 13만원을 받는다. 그는 건설 노동자로 사는 일을 말하면서 '과거 같은 거는 다 잊었습니다'라며 실실거리며 자주 웃었고 '인생 뭐 있습니까?'라는 말을 후렴처럼 할 때마다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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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노동자로 일하며 카톡에 정리한 최근 근무 기록

*그를 만난 다음 날 그가 이렇게 카톡을 보내왔다. "계속해서 건설에서 일한 것이 아니라 이번 코로나로 인해 (마라톤 관련) 일감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전업이 된 것입니다." 건설 노동자로 일한다고 말한 것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7. 소속팀 코오롱에서 그는 연봉 3천만 원을 받았고 신기록을 세울 때마다 특진을 거듭했다. 그의 연봉은 또래 월급쟁이들보다 두 배 이상 많은 돈이었다. 한국 신기록이나 대회 신기록을 세울 때마다 상금이 적지 않았고 마라톤 후원자인 이동찬 당시 코오롱 회장은 거액의 격려금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대회 초청비로 특급대회는 3천만원, 어지간한 국내대회도 2천만원을 받았다.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상금, 초청비, 격려금 등으로 몇 천만원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그는 마라톤으로 몇 억을 벌었다고 했다. 강남 아파트 몇 채는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음식점을 여는 것으로 그의 사회 생활은 시작됐다. 마라톤을 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면 못할 일이 없다고 자신했다. 모아 놓은 자금도 그런대로 넉넉했다. 처음엔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도와주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사회는 만만치 않았다. 마라톤이 가장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사회 생활은 더 힘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월해갔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죄를 짓거나 부당한 이득을 원한 적이 없는데 그는 자꾸 뒤로 처졌다. 인생 마라톤에서 그는 서툴렀고 주춤거렸고 자주 페이스를 잃었다. 후미 중의 후미를 달리고 있고 낙오 직전이라고 그는 자기 상황을 표현했다.


"인생이 마라톤보다 훨씬 힘든 거 같아요. 마라톤도 힘들긴 하지만 목표 세우고 5~6개월 준비하면 성공할 수 있었고 설사 실패하더라도 다음 대회 설정해서 움직이면 되는데 인생은 그게 아니잖아요. 운동은 제가 하던 일이라 힘들어도 정상에 대한 비전이 있었는데 인간 사회에서는 성공했네라는 말을 듣기가 하늘의 별따기더라구요."


마라톤에서 성공한 이봉주, 황영조가 인생 마라톤에서도 쾌속 질주하는 게 부럽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부럽지 않다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떻게 자신의 꽃 피던 시절을 잊을 수 있겠으며 한 때는 자신의 뒤에서 달리던 동료들의 성취가 부럽지 않을까. 그는 체육계 인사들과 거의 연락을 끊고 지내고 있다.


"사실 사람 만나기 싫죠. 어디 감독이라도 하고 있으면 좋을 텐데 제가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잘 나가면 만날 텐데 그러지 못하니 연락이 와도 제가 안 받죠. 제가 소심한 거죠. 오늘 취재에 응한 것은 제가 죄 지은 것도 아닌데 굳이 숨을 필요 있나 싶어서 나온 겁니다."


그가 가장 가까운 동료라고 지목한 이봉주마저 그의 근황을 잘 모르고 있었다. 이봉주는 김완기와 연락한 지 몇 년이 되었다며 기자에게 도리어 그의 형편을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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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황영조에 대해 여러 가지 감정을 갖고 있었다. 몇 년 동안 한솥밥을 먹은 동료, 같은 감독에게 배운 후배,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기에 다양한 느낌을 갖는 것은 당연할 것이고 꼭 좋은 일만 두 사람 사이에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땄을 때 소감을 물었다.


"위원님이 저라면 어떠셨을 거 같습니까?"

"글쎄...꼭 좋지만은 않았을 거 같습니다만…두 사람 경쟁이 워낙 치열했잖아요."


"그건 아닙니다. 그건 아니에요. 저도 사람이라 다른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때 진심으로 영조를 축하해줬습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기 위해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는지 제가 다 알잖아요? 영조랑 저 둘이서 그 힘든 과정을 똑같이 겪었잖아요. 만약에 영조가 복권이나 로또가 돼서 10억원이 생겼다면 그런 마음이 안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요? 죽을 고비를 넘겨야 좋은 기록이 나오는 것을 누구보다 제가 잘 알잖아요. 제가 성적이 안 좋아서 아쉬웠지만 영조 금메달 딴 것은 진심으로 축하했습니다."


네 시간이 넘는 대화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이었다. 밉고 싫고를 떠나 사선을 같이 넘은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고 귀국한 이후 대치동 합숙소에는 한동안 취재진이 끊이지 않아 김완기를 비롯한 다른 선수들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 때는 화가 났단다.


8. 그는 의외로 달변이었다. 굳이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먼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고 답변을 재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의 말은 가식이나 과장은 없었지만 미리 머릿속으로 준비된 듯했다. 때로는 상대방을 가르치는 듯했고 훈계하듯 말할 때도 있었다. 그는 대화 사이의 짧은 침묵도 견디지 못하였다. 모처럼 기자를 만나니 다소 초조했던 모양이다. 대화가 무르익고 취기가 오르면서 그는 그 때서야 머리에서 미리 정리된 말이 아닌 가슴에서 나오는 말을 풀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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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태어나도 마라톤을 할 것이라고 했다. 달리는 일이 좋고 무엇보다 달리기가 아니면 성공할 수 있는 영역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 한때 극단적인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죽을 거 같은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던 현역 시절을 생각하며 자신을 다잡았다고 했다. 다시 달리고 싶은 생각이 있느냐고 물으니 당연히 그렇단다. 다만 지금은 체중이 늘고 근력이 약해져서 빨리 달리지는 못하고 1킬로미터를 5분 정도 페이스에 달릴 수 있다고 말했다. 1킬로미터를 6분에 달리는 것이 목표인 필자에게는 그것도 대단한 속도라고 말했더니 그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무리하지만 않으면 누구나 마라톤 풀코스를 달릴 수 있다며 달리는 요령을 설명할 때, 자신의 경쟁자들이었던 황영조, 이봉주, 김재룡의 장점을 하나하나 설명할 때 그는 역시 마라톤 챔피언이었다. 자신의 기록은 물론이고 다른 선수들의 기록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고 현재 한국 마라톤이 왜 부진한지, 그 대책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마라톤을 제일 잘 하던 사람이었고 지금은 누구보다 마라톤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한때 고향 정읍에 내려가 선산에 장뇌삼 농사를 지으며 살까도 생각했는데 밤이면 적막해지는 것이 싫어 포기했다. 그는 여전히 스물 네 시간 휘황하게 밝은 서울이 좋다며 시골에 가기에는 아직 자기가 젊다고 말했다. 그가 8급 미화원으로 일할지, 중학교 육상 코치를 할지 그도 저도 아니면 당분간 건설 현장에서 계속 일할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어디에 있든 달릴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여유를 찾았으면 좋겠다. 그의 바람처럼 다시 한 번 시각 장애인과 동반 달리기를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윤춘호(논설위원) 기자(spring8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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