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사이에 관한 여행
ⓒ 안수향 |
Between Gyeongju
경주, 사이에 관한 여행
삼릉숲, 황룡사지, 봉황대와 중앙로 그리고 용림. 경북 경주에 사는 사진가 안수향 *이 그만의 다정한 언어로 경주의 사이사이를 안내한다.
글 안수향
사진 안수향, 여지웅
*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 때때로 서핑도 한다. 저서로는 〈서툴지만 푸른 빛〉 〈오래된 미래〉 〈아무튼 서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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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이를 훑는 여행입니다. 죽음과 삶 사이, 애정과 미움 사이, 희망과 절망 사이, 진보와 보수 사이, 로컬과 여행자 사이, 당신과 나 사이.... 사이는 경계의 다른 말입니다. 여행을 떠나면 저곳에 두고 온 나를 보게 되듯, 경계에 서면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어요. 왜 나는 경주에서 내 삶이 문득 새삼스럽게 느껴진 적이 많았을까요. 아마도 여기엔 수많은 ‘사이’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1,000년 전 누군가의 죽음을 바로 코앞에 두고 즐겁게 식사하는 이들의 모습을 볼 때, 한껏 즐거운 여행을 기대하고 온 연인의 사소한 다툼 속에서 그들의 사이를 헤아리는 언어가 냉랭하게 오갈 때, 봉황대가 잘 보이는 카페에서 문득 깊은 사색에 빠진 한 눈동자를 볼 때, 여행자가 아닌 로컬이 되어 경주에 사는 지금도 여전히 나는 이방인과 여행자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고 느껴질 때면, 가끔은 이쪽과 저쪽을 바라보는 시간을 좀 더 가져보라고, 경주가 내게 말하는 듯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 나 사이를 포함하고 있을지도요.
기억과 기억 사이, 삼릉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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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을 딱 한 군데만 꼽으라고 하면, 주저 없이 남산이라고 할 거예요. 자그마한 산 하나에 무려 * 왕릉 13기, 산성지(山城址) 4개소, 사지(寺址) 150개소, 불상 129체, 탑 99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 총 694점의 문화유적이 있으니 그야말로 숲속 박물관인 셈입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보물을 만날 수 있어요. 가장 좋은 건 남산을 직접 오르는 것이지만 시간과 체력이 넉넉지 않다면 삼릉숲만 둘러봐도 괜찮은 선택이 될 거예요.
남산 자락, 박씨 성을 가졌다고 전하는 왕릉 3기(基)와 경애왕릉을 잇는 숲을 묶어 삼릉숲이라 일컫습니다. 특히 이곳은 비 오는 날 한층 아름다우니 경주 여행 중 빗방울을 만나거든 부디 삼릉숲을 떠올려 주세요. 사계절 내내 푸른 소나무와 숲의 녹음, 철마다 피어난 각양각색의 꽃 무리가 마치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 그곳에 있을 테니까요. 저는 비 예보가 있는 날엔 퇴근하고 삼릉숲에 갈 것을 기대하며 반드시 감도 400짜리 필름과 필름 카메라를 챙길 정도로 좋아합니다.
*사단법인 경주남산연구소 자료 참조,www.kjnams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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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경주에서 살며 어쩐지 필름 카메라를 더욱 자주 쓰게 됐습니다. 그러다 ‘경주에서 얼마나 많은 필름 사진이 남겨졌을까’를 생각하며 문득 아득해졌습니다. 오래전 경주엔 사진관이 참 많았다고 해요. 신혼여행과 수학여행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던 데다 필름이 유일한 사진 매체였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보통 신혼부부는 하루 정도 택시를 빌려 여행했는데, 택시 기사가 자연스레 사진사의 역할까지 하게 됐지요. 그래서 당시 택시 기사는 촬영을 끝내주게 잘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휴대전화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게 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만 가끔 신기하기도 합니다. 요즘 들어 경주에서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젊은 여행자를 유독 자주 마주하게 되거든요.
‘느리고 불편하고 디지털 사진에 비해 화질도 그리 좋지 않은데 왜 굳이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냐’고 누군가에게 물은 일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부모님이 쓰시던 카메라를 들고 여행하다 보면 그들의 추억까지 한 겹 더해진 듯한 다정한 장면이 자신에게 다가온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 대답에 기분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사진은 카메라의 성능보다 눈과 마음이 우선하는 일이란 걸 그 친구는 아는 듯해서요. 누군가의 추억과 추억 사이에서, 사진의 입자와 입자 사이를 채우는 건 우리의 이야기와 기억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해봅니다.
존재와 상실 사이, 황룡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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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절이었던 곳. 이름 뒤에 ‘사지(寺址)’라 쓰여 있을 때의 말입니다. 천관사지,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등 경주에 수많은 절터가 있지만 황룡사지만큼 호젓한 곳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 황룡사는 신라가 무려 93년이나 공을 들인,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는 절입니다. 당시 외국인도 이 절을 보기 위해 일부러 신라를 찾았다고 해요.
1238년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어 지금은 탑이 있었다는 자리만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당간지주의 위치와 절터의 거리만 대충 가늠해도 얼마나 규모가 컸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이야기만 전하지요.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황룡사지 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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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700년이 흘러도 도무지 메울 수 없는 존재 그리고 부존재. 존재의 크기만큼 상실의 에너지도 비례하는 법입니다. 저는 가끔 무언가를 잃었다고 여겨질 때 자전거를 타고 황룡사지에 가곤 합니다. 왠지 이곳에선 풀꽃 무리에 숨어 마음 놓고 슬퍼할 수 있어요.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얻는 만큼 잃어가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직은 작은 일에도 마음이 중력을 쉬이 따릅니다. 그러다 고작 며칠이면 괜찮아질 나의 상실감을 머쓱해하며 집에 돌아온 적이 많습니다. 나의 존재와 상실에 관한 물음 사이엔, 오늘도 담담히 저무는 노을과 희고 환한 샛별이 있습니다. 다시 집을 향해 자전거 바퀴를 힘차게 굴리는 마음도 함께.
봉황대와 중앙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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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담장은 그것을 가두고 있는 대상이 담장을 두른 주체만을 위한 것이란 기분이 들게 합니다. 대릉원이 내게서 그리 가깝지 않게 느껴지는 걸 보면요. 반면 바로 옆 노동리 · 노서리 고분군은 늘 자연스레 열려있는 듯 느껴지니 신기한 일입니다. 대릉원 후문엔 옛날 경주시청을 대신해 지금은 신라대종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신라대종부터 노동리 고분군 가장자리를 따라 중앙로라는 작은 도로 하나가 경주 시내까지 쭉 이어지지요.
이 길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봉황대입니다.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고분, 비탈을 딛고 거대한 고목이 몇 그루 자라고 있어서 마치 동산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봉황대는 오래전부터 경주 시민의 광장이자 쉼터로 여겨졌답니다. 지금도 주말이면 아이와 함께 나들이 나온 가족, 반려동물과 함께 산책을 즐기는 이들로 가득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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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커피플레이스를 시작으로 이 길을 따라 몇 년 전부터 아담한 가게가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어요. 원래 로컬이 다니던 길이었으니 당연히 여행자보단 현지인으로 북적이기 시작했고요. 지중해식 음식을 하는 식당 도미 커뮤니티부터 젤라토 가게 할타보카, 커피플레이스, 바 프렙, 위스키 바 겸 레스토랑 스틸룸, 그리고 건너편에 자리한 베이커리 데네브와 탭룸 흐흐흐, 월정 제과까지.... 이들은 봉황대와 녹음을 마주하는 조용한 시간을 선택한 덕분에 오히려 다정한 단골의 얼굴을 더 가까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아침 커피플레이스에선 현지인들이 하나둘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서 서로 안부를 나누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경주에서 한달살이 중인 호주인 친구가 어느새 이곳에 섞여 아침 인사를 나누고 있기도 해요. 그가 말하기를 경주에서 이 길에 반해 한달살이를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쉬는 시간이면 의자를 들고 밖으로 나와 봉황대에서 휴식을 취하는 주변 가게의 직원들, 그들이 매일 비슷한 코스로 반려견과 산책하시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 캐치볼을 하는 두 사람 주위로 하나둘씩 다가와 어느덧 무리를 이룬 모습을 보고 있으면 봉황대와 중앙로, 이 길 사이에 로컬의 미래가 있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계절과 계절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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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약일 수도 있지만 경주의 반은 유적, 나머지는 모두 꽃이라고 여겨질 만큼 이 도시에는 계절마다 꽃구경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경주의 벚꽃은 오래전부터 유명해서 다들 한 번쯤 보셨을 테지요. 봄의 벚꽃을 보고 있으면 찬란함이란 단어가 마치 벚꽃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해요. 꽃이 피거든 월성이나 오릉 돌담길을 따라 걸어보기를 추천합니다. 벚꽃 말고도 경주엔 3월의 목련, 4월의 등나무꽃과 탱자꽃, 5월의 이팝나무꽃, 7월의 능소화, 10월의 핑크뮬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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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제가 가장 고대하는 이벤트는 바로 4월에 있습니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 현곡면 오류리 527번지는 신라 왕들의 사냥터, 용림이라 일컬어지는 곳입니다. 이곳엔 아주 오래되고 커다란 등나무 몇 그루가 수풀을 이루고 있습니다. 수령을 짐작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아주 거대해요. 매년 4월이면 이 등나무에는 수많은 꽃이 황홀할 정도로 흐드러져서 보랏빛 장관을 이룹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많은 개화와 낙화를 목도했지만, 이토록 찬연한 장면은 또 없을 것 같습니다. 안개가 끼거나 빗방울이 살짝 떨어지는 날이면 꽃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습니다. 계절이 유독 빨리 지나간다고 느껴질 때 꽃과 나무의 기척을 들여다봅니다. 수없이 많은 이름 모를 개화와 낙화를, 생과 소멸을. 계절이라는 말에 묶여 차마 알 수 없었던 수많은 사이를 발견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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