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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룡포] 나는 매일 북을 친다 - 01. 병상에서

2018년 5월 말, 열이 펄펄 끓고 기운도 없거니와 손발에 생전 처음보는 홍반이 생겨 한의원, 피부과, 내과 등을 전전하다가 혈액검사에서 백혈구 수치가 문제인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병원에 가서야 혈액내과 교수님께 급성림프구성백혈병(ALL, acute lympoblastic leukemia) 확진을 받게 되었다.

 

(나도 이전까진 잘 몰랐는데) 백혈병은 혈액암의 일종으로 다양한 종류의 형태로 분류된다. 쉽게 말하면 혈액 속에 백혈구(내 경우엔 림프구계 백혈구)가 악성인 종양세포로 변이하면서 이상증식하는 과정에서 내 피가 면역기능을 잃어가는 병이라고 할 수 있다. 일을 하지 않는 불량백혈구의 비율이 높아지는 것이므로, 치료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피가 만들어지지 않아서 죽는다고 했다. 더 쉽게 말해서 피를 만드는 골수가 고장 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입원 전에 엉치뼈에서 골수액을 추출하는 골수검사를 해야했다. 그냥 피부, 근육에 는 주사도 아프고 싫은데 뼈 속에다가 바늘을 넣는다는건 그전까지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마취주사를 놓고 엉치뼈에 굵은 주사 바늘을 넣어서 골수를 채취하는데 지금까지 느낀 고통과는 다른 종류의 섬뜩한 느낌이었다. 이 골수검사는 지금까지도 주기적으로 몇 번이나 했는데도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다. 


검사가 끝나고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며 세 시간 정도를 검사부위에 모래주머니를 대고 누워있어야 했다. 허리가 끊어지는줄 알았다. 백혈병 확진 직후부터 계속되는 새로운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러더니 귀가해서 입원대기열이 내 차례에 올 때까지 대기하란다. 백혈병 정도의 중병이면 바로 입원할 수 있는지 알았는데 다른 백혈병 환자가 많아서 유명한 병원일수록 대기자가 많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세상에 그렇게 아픈 사람이 많은지 몰랐다. 환자가 차고 넘쳐서 병실이 부족한 지경이라니.


운이 좋았는지 특실이 자리가 났으니 우선 여기서 다인실 자리가 날 때까지 입원해있으라는 연락이 왔다. 순간 3초 정도 돈 걱정을 했고 그냥 앞으로는 내 금전감각에 마취주사 두 방 놓는다 생각하고 병원에 갔다. (다행히 중증암 확진 시 5년간 진료비의 5% 정도만 부담하는 산정특례 덕택에 진료비 부담이 많이 줄어들었다.)


입원 수속을 마친 뒤로는 의사들이 차례로 방문하면서 병원생활, 치료방향성, 복용약제에 대한 효과와 부작용 등등 많은 것을 설명해주었다. 입원하면 항암약물치료를 시작해서 골수 내 암세포가 5% 이하로 줄어든 상태인 ‘관해’에 도달하는게 1차 목표다. 골수 속에 만연해있는 암세포를 없애야해서 아주 독한 약을 쓰기 때문에 힘들 것이라 했다. 독한 약을 쓰기 때문에 팔에 있는 혈관으로 투여할 경우에는 팔이 괴사할 수 있다는 이유로, 몸 속에 있는 정맥에 ‘중심정맥관’이라는 것을 가슴팍에 꽂아서 몸의 바깥과 안을 연결한다. 마취주사를 쓰고 정맥혈관을 찾느라 몸 속을 헤집는 느낌이 불쾌했다.


수술대에 올라서 정신없이 관을 박고 다시 병실로 옮겨진 나는 그때서야 이 모든게 너무 끔찍한 상황같다는 생각을 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직장에 출근하고 내 방에서 잤는데 갑자기 병실에 갇혀서 내 몸에 박힌 관이 연결된 폴대를 끌고 다녀야하고 매일 수십 알의 알약을 삼켜야했다.


그러나 앞으로 있을 치료의 험난한 과정을 대충 그려보면 벌써부터 내 처지에 한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마음가짐을 가지려 노력했다. 그래서 길었던 머리도 반짝반짝하게 밀어버렸다. 그러니까 진짜 암 환자같았다. 몸이 쇠약해진 탓에 스테로이드 알약을 계속 먹었는데 이게 입맛 하나는 기가 막히게 돌게해서 밥은 엄청 잘 먹었다. 항암제가 들어가기 전까지는.


항암치료는 3주 정도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3가지 정도의 항암제를 일정에 맞춰 주기적으로 주사하고 백혈구 수치가 0에 가까워졌다가 다시 서서히 오르면 백혈구 촉진제를 맞고 일정 수준 이상으로 혈액수치가 회복되고 몸에 이상이 없으면 퇴원…인데 순조롭게 진행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내가 맞은 약 중, ‘다우노신’이라는 약은 붉은색인데 몸에 들어오는 순간 눈, 코, 얼굴에서 불이 난 것처럼 화끈거렸다. 항암제 중에는 색이 있는 약품들이 몇 종류 있는데 소변으로 배출 될 때도 들어올 때와 같은 색으로 배출된다. 


항암제는 상당한 극약이어서 전신에 부작용과 심한 피로감 및 구토를 동반한다. 같은 병동에 있던 고령에 쇠약한 환자들의 경우에는 섬망(환각, 환청 증세)을 잘 일으킨다. 젊은 환자들도 맞고나면 온 몸이 아픈데, 어디가 어떻게 아플지 아무도 모른다.


부작용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부작용을 방지하는 약물을 같이 주사하는데 이 약물들이 또 다른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약으로 약을 제압하는 방식이라 그런지 몸이 거덜나는게 아닐까 싶다. 


인터넷 상의 젊은 층이 많이 사용하는 표현 중에 답답해서 죽을 것 같다는 의미로 ‘암 걸린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진짜 암 걸려보면 병 때문에 아파서 힘든 것보다도 병실을 공유하는 이들 때문에 더 힘들다. 


별의별 사람이 다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고령환자들이 있다. 이 분들은 연로하신데다가 백혈병까지 앓기 때문에 몸이 굉장히 쇠약해져있는 상태이다. 이런 분들의 경우 치료를 위해 항암제를 투여하면 밤에 자다가 ‘섬망’ 증세가 오기 쉽다. 모두가 힘들어서 겨우 잠드는 밤에 갑자기 고함을 치거나 병세가 급격히 안 좋아지면 야간병동 간호사들이 병실에 들이닥친다. 큰 병원에는 ‘코드 블루’ 상황이 자주 생기는데 이는 병원 내에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환자가 생길 때 근처 의료진들을 방송으로 소집하는 것이다. 거의 매일 밤마다 복도에서 의료진들이 달리는 발소리가 나거나 잠이 없는 고령환자들이 소동을 일으키는 일이 일어난다. 물론 모든 고령환자가 그렇지는 않다. 일부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환자들이 있는데, 본인도 몸이 아파서 화가 나는건지 간호사를 위협하고 하대하거나 밤마다 고함을 치는 사람들이 병실마다 꼭 한 명 씩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나를 더 힘들게 한 것은 환자보다는 그들의 보호자였다. 5인실은 환자 외에도 보통 간병인이나 친족들이 같이 상주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10인실에 가까웠다. 병실에 있는 화장실은 감염 우려가 있어 보호자들은 쓰지 못하게 병원에서 규칙으로 정해두었는데 아무도 그걸 안 지킨다. 백혈병 환자들은 면역력이 0에 가까워서 비질환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면역력으로 막아내는 균들도 생명에 위협적이다. 감기만 잘 못 걸려도 폐렴 합병증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보호자들은 통화도 시끄럽다. 어떤 이들은 식사도 병실 안에서 하고 옆 침대를 자꾸 건드려서 잠을 깨우기도 한다. 


죽는 날까지 좋은 사람이고자 했던 나는 병원생활을 통해 점점 몰상식한 행동에 화가 쌓이는 걸 참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화낼 힘이 없어서 누워만 있었는데 같이 지내면서 나를 돌봐주던 나의 불같은 어머니는 허구언날 다른 보호자들이랑 싸우는게 일이었다. 나는 귀마개를 사서 귀를 틀어막고 지내기 시작했다. 소음이 줄어드니 그나마 참을만했던 것이다. 가끔 귀마개를 뚫는 소동이 있긴 했지만…


좋은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엄마와 비슷한 나이대의 M삼촌이 내 옆 자리에 있었는데, 이 분은 보호자 없이 혼자서 투병을 하느라 기척도 없어서 처음에는 있는 줄도 몰랐었다. 가족으로는 아내와 두 딸아들이 있다는데 생계를 이어가야하니 부담주기 싫어서 혼자 투병하고 있다고 했다. M삼촌은 항암치료만으로 한 번 ‘관해’상태에 도달해서 일상으로 복귀했다가 다시 재발해서 조혈모세포 이식을 목표로 치료를 시작했다고 했다. 한 번 치료과정을 견딘 역전의 용사라서 그런지 M삼촌은 나에게 많은 항암투병 노하우를 전수해주었다.


몇 가지 써보자면, 우선 항암을 하게 되면 구토가 너무 심해서 무엇도 먹기 힘든 상태가 된다. 결국에는 십중팔구 밥을 먹는 대신 영양제를 폴대에 달고 혈관으로 주입받으면서 연명하게 되는데 이 때는 물 먹는 것도 너무 힘들다. M삼촌의 조언은 ‘그럴 때는 식혜를 마셔라’는 것이었는데 기가막히게도 식혜만은 거부감없이 목을 넘어가며 나의 위를 곡기로 적셔주었다.


먹는게 약하다보니 목넘김이 너무 아프고 힘든데, 알약이나 설사 때문에 시럽을 먹어야 할 때는 정말 고역이다. 하지만 M삼촌이 추천해준 ‘포카리스웨트’는 알약과 함께 내 위장으로 떨어지는 가뭄의 단비였다. 알약이 목에 걸리는 느낌이 하나도 나지 않는 것이었다(물론 이온음료랑 같이 약먹어도 의학적으로 문제가 없는지는 나는 모른다.)


속이 메스꺼울 때는 아이스크림이 좋더라며 자기 냉장고에서 나뚜르 아이스크림을 꺼내 나눠주던 그가 내게 준 최고의 병원생활 노하우는 ‘무조건 버텨라’였다.


병원생활은 무조건 버텨야된다. 치료 과정 중 갑자기 몸에 이상이 와서 입원기간이 늘어나는 일이 다반사고, 어떤 때는 너무나 외롭게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랑 싸워야한다. M삼촌은 병실 한 가운데 커튼으로 둘러쌓인 그 자리에서 아무도 없이 버티다가 너무나 외롭고 힘들 때면 참지않고 그냥 운다고 했다. 엄마는 내게 힘빠진다고 절대 울지 말라고 다그쳤지만 삼촌은 그냥 울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울고나서는 빌라고 했다. 어디에다가 빌면 되는지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는데, 버텨내서 살게 해달라고 빌라는 것이었다.


그 삼촌도, 나도 딱히 종교는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냥 모두가 힘든 병실에서는 누구든 좁은 커튼 안 병상을 기도실 삼아서 고해성사와 같이 지금까지의 자기 삶을 토하기도 하고 현재의 고통을 토로한다. 오늘 낮 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이웃병상의 사람들이 미웠지만 그들도 아픈 사람들이고 또 그의 가족들이라는 걸 깨닫고 잠시 자책하고 다음 날 다시 그들에 대한 미운 마음이 슬며시 병과 함께 얼굴을 내미는 것이다. 그런 것이 계속되고 그래서 버텨야 되는 것이 병원생활이었다.​


by 소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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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병과 싸우며, 혹은 함께 살아가며 마음의 소리를 글로 옮기는 분들과 근육병을 통해 세상을 더욱 밝게 바라보는 근육병자조모임 '청년디딤돌' 친구들의 이야기를 허브줌에서 풀어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