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여사 별세] 권력을 거부하고 낮은 곳 향했던 '영부인'
아이·여성·장애인 위한 활동에 전념
'내조' 집중하면서도 활발한 외교도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향년97세)가 10일 별세했다. 사진은 2016년 9월 7일 서울 마포구 김대중도서관에서 이희호 여사. (뉴스1 DB)2019.6.10/뉴스1 |
(서울=뉴스1) 정상훈 기자 = 10일 별세한 고(故) 이희호 여사는 자신의 자서전 '동행'에서 청와대 입성 당시를 "빈 곳간에서 출발했다"고 회고했다.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IMF 구제금융으로 국가 부도 사태를 가까스로 막은 지 넉 달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 살림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실직자가 속출했고, 가정 해체로 인해 결식아동은 늘어났다. 거리에는 노숙자들이 생겨났다. 이 여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이와 여성,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향했다.
영부인이 되기 전부터 여성과 장애인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권익신장을 위한 활동을 활발히 해왔던 이 여사는 '퍼스트레이디'가 되자 이들을 위한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8년 8월에는 결식아동을 돕는 사단법인인 '사랑의 친구들'을 발족시키고, 본인이 직접 명예회장을 맡으며 앞장서서 후원 활동을 이끌었다.
손대지 않은 항공기 기내식들이 운항 종료 직후 그대로 버려진다는 사실을 안 이 여사는, 관계 당국과 항공사를 설득해 남은 기내식을 '사랑의 친구들'을 통해 전국의 공부방에 간식으로 전달할 수 있게 만들기도 했다.
이 여사는 또 여성문제 해결을 위해도 두 팔 걷고 나섰다. 이 여사는 '한국여성재단' 설립에 명예위원장으로 힘을 보태며 1999년 출범을 이끌어냈다. 이 여사는 청와대를 떠난 이후에도 두 단체의 고문을 맡으며 적극적으로 활동해왔다.
이 여사는 장애인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영부인으로서는 최초로 한센병 환자들이 거주하던 '소록도'를 방문하며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숙소를 만들었다. 이 여사는 영부인 기간 중에 소록도를 한 번 더 방문하며 이곳과의 인연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 여사는 또한 소년원 재소자들과 이들의 부모를 청와대로 초청해 격려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당시 참모들이 '범죄자를 청와대로 부를 수 없다'고 반대하자, 이 여사가 "지금의 대통령도 한때 사형수였다"고 설득한 일화도 유명하다.
이 여사는 권력을 거부한 독립적인 퍼스트레이디로도 유명했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으로 '국민의 정부 여성 정책 뒤에는 이희호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정작 이 여사는 스스로를 "내조자에 불과하다"며 몸을 낮춰왔다.
이 여사의 이 같은 내조를 바탕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내고, 한국인 최초의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 인민일보사가 발행하는 잡지 '스다이차오'는 논평에서 "이 여사는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를 위한 노력을 평생 김 대통령과 함께한 만큼 노벨평화상의 절반은 부인 몫"이라고 평가했다.
이 여사는 또한 여성 최초로 유엔 아동특별총회와 미국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연설하는 기록을 남겼다. 유엔 아동특별총회 연설 때는 당시 외무부 직원이었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직접 이 여사의 영어 연설을 도왔다.
그뿐만 아니라 이 여사는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엘리너 루스벨트와 팻 닉슨, 로절린 카터와 낸시 레이건, 힐러리 클린턴, 로라 부시 등 미국의 전·현직 영부인들과의 친분을 쌓기도 했다.
이 여사는 그러나 국민의 정부 후반, 아들들이 연이어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며 구속되면서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이 여사는 자서전에서 당시를 "부끄러워 국민들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기억했다.
2000년에는 이 여사를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퍼스트레이디였던 엘리너 루스벨트처럼 만들기 위한 이른바 '엘리너 프로젝트'가 일부 청와대 참모진을 중심으로 추진됐지만, '옷 로비 사건'이 정국을 뒤덮으며 무산했다.
ykjmf@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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