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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가죽이 의미하는 '조화'(harmony)

지승학의 영화 도시

레버넌트는 미국발(發) 인간 신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고난 극복기, 혹은 인간의 의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미국이 만들어낸 소위 미국식 단군신화라 할 수 있다. 단군신화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곰과 인간의 만남이 있기 때문이고 그 만남 속에서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우월한 백인의 기원을 찾으려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단군 신화에서도 인간과 곰의 만남은 한국인의 기원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하지 않는가? 그렇게 비유적으로 본다면, 영화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이하 <레버넌트>)는 새로운 인간의 창발을 나타내는 신화에 속한다. 

 

거창하게 말해서 인류문명은 곰과 인간의 만남을 기원의 위대함으로 귀결 짓기도 하며 그런 이유 탓에 신화학자들은 이를 두고 자연과 인간의 만남이라고 은유적으로 보고는 한다. 이 후, 새 생명이 탄생하면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화합을, 생존경쟁으로 치달으면 자연과 인간의 투쟁 혹은 대결로 자연스럽게 해석한다. 그렇다면 영화 <레버넌트>는 투쟁과 대결에 해당하므로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대부분의 신화는 “대결에서 이겼다.”로 끝나지만 이 영화는 이긴 다음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그러다보니 인간은 대결 중에 입은 치명적인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의지의 존재로 부각된다. 그리고 이를 죽음에서 돌아온 ‘인간의 위대함’으로 받아들이고 소비한다. 

곰 가죽이 의미하는 '조화'(harm

하지만 <레버넌트>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이러한 전형적인 서사를 다르게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그저 한 인간의 고난 극복기,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휴머니즘의 맥락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그가 온갖 고난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우리로 하여금 질문을 던지게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복수심이라는 서사와 인간의 위대한 의지에 대한 교훈적 메시지가 아니라 그러한 모든 과정이 사실상 무엇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는가? 라는 것을 두드러지지 않게, 하지만 시종일관 관객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정교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얘기다.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감독이 시종일관 관객이 알아차리도록 만들어 놓은 것은 바로 ‘곰 가죽’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실질적으로 ‘곰 가죽’에 의존한다. 처음에 이것은 사냥한 곰의 전리품의 성격이 강했지만 점점 목숨을 유지시키는 생명줄이 돼간다. 하지만 휴가 시종일관 덮고 있거나 두텁게 뒤집어쓰고 다니는 곰 가죽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어쩌면 우리는 자연이라는 곰 혹은 곰이라는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인지 모른다. 인간을 위한 자연, 이것은 자연을 향해 인간이 벌인 가장 치명적인 오류의 문제이지만 여전히 이러한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휴가 보여주는 서사는 당연히 복수극에 성공하는 ‘한 인간의 의지’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곰 가죽이 의미하는 '조화'(harm

이러한 빤한 도식을 알레한드로 감독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 과정을 위해 그가 사용하는 것은 바로 롱테이크이다. 이미 감독의 기념비적인 영화가 되버린 <버드맨>에서도 그는 롱테이크를 영화 초반에 배치한다. 특히 그의 최대 장점은 롱테이크를 통해 카메라와 연기자들의 동선을 한데 묶어서 그 현란한 움직임을 통해 관객들을 영화 속 인물에 일찌감치 동화시켜 버리는데 탁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레버넌트>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식의 스펙타클을 섞어 넣음으로써 공감의 임팩트를 훨씬 더 강조한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사실 상 롱테이크 한 장면에 의해 모두 휴가 되고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자가 된다. 여기에 고감도 카메라의 촬영 기술력도 한 몫 한다. 간단히 말해서 과거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기법, 즉 자연광만으로 촬영하는 것이 가능해져서 강력한 조명이 주는 화면의 이질감을 극복했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적 비현실성을 현실성으로 뒤바꾸는데도 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장치 덕에 가능해진 것은 빠르게 치고 빠지는 촬영이다.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얼음장 같은 물속에 직접 몸을 내던질 수 있는 이유도 결국 빠르게 촬영하고 빠질 수 있는 자연광 촬영의 민첩함 덕분이다. 이로써 그는 현실감 넘치는 몸 고생을 직접 해낼 수 있었고, 관객들은 그 고통에 더 쉽게 동화될 수 있었다. 이것은 결국 영화를 통해 감각마저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되는데, 이로써 추운 몸의 고통과 더불어 찜질이라는 뜨거운 수증기의 온기가 부각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그 뜨거운 수증기의 온기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치유자가 추운 겨울, 눈 위에 뜨거운 돌로 발생시킨 수증기를 텐트처럼 만든 ‘곰 가죽’ 속에서 휴 글래스는 회복, 아니 부활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 감각을 관객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의 단군신화처럼 마늘과 쑥으로 곰이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상처 받은 인간이 곰 가죽 속에서 수증기의 온기를 통해 부활했다는 것은 신화적 차원에서 보면 한국이나 미국이나 거의 동일한 맥락을 갖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렇게 이 영화는 휴 글래스의 통쾌한 복수극에 공감하기보다 그가(여기서는 디카프리오) 느끼는 몸의 감각에 더 잘 종속된다. 이러한 극단적인 동질화는 급기야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레버넌트>의 독창성이고 감독이 의도하는 곰(자연)과 인간 관계의 ‘조화’이다. 이렇게 된 이상 곰의 가죽은 인간의 우월성을 더 이상 뒷받침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곰의 가죽은 인간을 회복시킬 수 있는 우월하면서도 초월적인 신비한 능력의 망토가 된다. 

곰 가죽이 의미하는 '조화'(harm

하지만 이 영화는 결코 인간의 우월함을 말하지도, 자연의 위대함을 말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인간을 폄하하지도, 자연을 공포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바로 그것이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가진 의미가 아닐까? 균형추를 어느 하나에 옮겨 놓지 않는 그 균형감각. 어쩌면 그러한 조화는 이 영화 속에서 만큼은 수많은 싸움과 생존경쟁 너머에 자신이 갇혀있다고 끝없이 소리치고 있는지 모른다. 곰이 휴를 공격하고 인디언 부족 간의 싸움이 벌어지며, 인디언과 백인간의 속고 속이는 투쟁이 난무한다하여도 이 영화에서 만큼은 그 모든 것이 조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투와 싸움에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응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여전히 인간의 우월성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힐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이유는 생존경쟁이라는 우리의 오래된 오해와 편견때문이다. 바로 그 오래된 인간의 강박관념적 편견 즉, 내가 살기위해서 ‘나’의 우월함을 늘 강조함으로써 어느 하나를 죽여야 하는 사회 시스템 때문이다. 그것이 문제다. 이 영화에서 회자되는 것이 영화 마지막 휴와 존 피츠제럴드(톰 하디)와의 싸움인 점은 이를 반영하는 징후이다. 그 장면은 생존경쟁의 담론에 취해 스스로 망가져가는 우리의 자화상, 허망한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 결투 장면이 그다지 통쾌해 보이지 않는 클리셰일 뿐이라고 <레버넌트>를 평가절하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적어도 무의식적으로나마 자신의 모습을 그 두 인물의 허망함 속에 비춰보았기 때문일지 모르니까. 어쨌든 우리는 조화를 염원하면서도 그것을 의식적으로 찾아내기 힘겨운 사회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글 지승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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