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 '갈망 3부작'의 시작과 끝 『촐라체』
2005년 이른 봄 작가 박범신은 처음으로 촐라체를 만났습니다. 90년대부터 그가 히말라야를 찾은 건 십여 차례였지만, 촐라체와의 만남은 처음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교수직을 내려놓고 아무런 계획 없이 떠난 히말라야였기에 작가에게는 더욱 감회가 새로운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작가는 얼마 전 카트만두에서 만난 송성재씨에게서 지난 1월에 촐라체를 등반한 산악인 박정헌, 최강식의 조난, 생환 이야기를 듣습니다(송성재씨는 박정헌, 최강식 등반조의 베이스캠프지기였습니다). 작가가 처음 마주한 촐라체와 두 청년 산악인의 놀라운 등반담이 겹쳐 보였을 테니 그 감상은 꽤 강렬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나는 한순간 온몸이 스톱모션으로 굳었다. 피잉, 하는 듯한 낮고 날카로운 금속성, 혹은 가열차게 허공을 가르는 가죽 채찍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채찍을 맞은 내 앞이마가 유리창 갈라지듯 갈라지는 게 환상적 슬로모션으로 보였다. 해발 6440미터, 촐라체가 거대한 히말라야 산군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내게 하나의 섬광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8쪽)
영원하고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갈망, 그러나 결코 그 지점에 다다를 수 없다는 슬픔은 지금껏 자신의 문학을 이끌어온 화두이자 에너지였다고 작가는 술회한 적 있습니다. 아무런 계획 없이 떠난 히말라야에서 작가가 촐라체를 만난 건 우연이기보단 운명에 가까운 사건 아니었을까요?
작가는 그후로도 히말라야를 두 번 더 찾았고, 2007년 8월 9일부터 2008년 1월 7일까지 소설 『촐라체』를 네이버에 연재했습니다. 인터넷 연재마당에 최초로 초대받은 작가의 소설을 읽기 위해 그 기간 동안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연재에 앞서 문학이 지나치게 대중화될 거라는 일각의 우려가 있었지만, 작가는 그 우려를 가볍게 뛰어넘었습니다. 작가에겐 ‘클래식한 글쓰기’라는 솔루션이 있었고, 그 솔루션이 오차 없이 들어맞았으며, 『촐라체』 연재 이후 문학의 마당이 전보다 넓어지게 된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이때만 해도 작가는 200자 원고지에 소설을 썼고, 그 원고를 조교가 타이핑해 인터넷에 실었습니다. 작가가 최초로 키보드를 두드려 완성한 소설은 『은교』(연재 당시 제목은 ‘살인 당나귀’)입니다.)
연재를 마친 후 작가는 2008년에 『촐라체』를 펴내고, 1년 간격으로 『고산자』와『은교』를 펴냅니다. 2010년 작가는 『은교』를 탈고한 소회를 이렇게 밝힙니다.
지난 십여 년간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낱말은 ‘갈망渴望’이었다. 『촐라체』와 『고산자』, 그리고 이 소설 『은교』를, 나는 혼잣말로 ‘갈망 3부작’이라 부른다. 『촐라체』에서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고산자』에서는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인 정한情恨을, 그리고 『은교』에 이르러, 비로소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감히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2015년, 작가는 『촐라체』 개정판을 문학동네에서 펴냄으로써 그간 혼잣말처럼 불러왔던 ‘갈망 3부작’을 현실화했습니다. 세 작품 중 가장 먼저 쓰여진 『촐라체』를 작가가 가장 나중에 다듬어 자신의 ‘갈망 3부작’을 완결한 셈입니다. 작가는 개정판을 준비하며 원고를 정성껏 고치고 다듬으며 소설의 서사를 더욱 예리하게, 촐라체처럼, 벼려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200여 매 이상의 원고를 덜어내기도 했습니다.)
촐라체는 에베레스트에서 남서 방향으로 17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6440미터 높이의 산입니다. 촐라체 주변 지형도를 얼기설기 만들어 디자이너 분께 드렸더니 이토록 정연한 지도를 만들어주었네요! (『촐라체』 개정판 권두에 실려 있습니다.)
|
산악인 박정헌과 최강식이 오르고, 소설 속 박정헌과 하영교가 오른 촐라체 북벽은 매우 가파른 경사로 수직고가 1500여 미터에 이르기 때문에 히말라야의 대표적인 난벽으로 손꼽힙니다.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촐라체 남서벽 등반에 비해 촐라체 북벽 등반이 드물었던 까닭입니다. 게다가 이들이 선택한 등반법은 등로주의-알파인 스타일입니다. 최종적으로 더 높은 정상을 정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많은 셰르파와 우수한 장비를 동원하는 게 등정주의-극지법 스타일 등반입니다. 그러자면 비용이 많이 들지만 그만큼 후원도 많고 매스미디어의 관심이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산악인 박정헌과 최강식은 자비로 촐라체 원정 비용을 댔습니다). 반대로 등로주의는 어떻게 정상에 오르는지를 중히 여기기 때문에 어렵더라도 루트를 직접 개척해 오르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알파인 스타일은 소수의 등반가가 최소의 장비를 가지고 자력으로 가급적 단숨에 산을 치고 오르는 방식이어서 등로주의와 잘 어울리는 등반법입니다.
익숙하고 편리한 문명의 조력을 포기한 채 단출하고 겸허하게 극한의 자연을 마주하고 싶기 때문에 이들은 등로주의와 알파인 스타일을 택한 것입니다. 더 고독하고 더 위험한 방식을 택해 이들이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정상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영원하고 초월적인 것을 갈망했지만 결코 그 지점에 다다를 수 없다는 슬픔으로 지금껏 글을 써왔다는 작가는, 촐라체를 ‘맨몸’으로 오른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그려냈을까요?
지금은 하늘의 별을 보고 갈 길을 정하던 시대가 아니다. 무엇으로 생의 좌표를 읽어내야 할지 모르는 젊은 당신들의 오늘이 쓸쓸한 것은 그 때문이다. 갈 길 몰라 쓸쓸할 때 젊은 그들이 이 기록을 읽으면 참 좋겠다. 극적으로 사실을 과장하거나 감상적으로 실존을 호도할 생각은 전혀 없다.(43쪽)
나는 ‘존재의 나팔 소리’에 대해 쓰고 싶었고 ‘시간’에 대해,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대해, ‘불멸’에 대해 쓰고 싶었다. 히말라야에서 사는 사람들은 5000미터가 넘는 산도 일반적으로 ‘마운틴’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정도의 산은 ‘힐’이라고 부른다. 이런 본원적 낙관주의야말로 살아 있는 것들이 가진 존재의 빛이 아닐 수 없다. ‘촐라체’는 그런 의미에서 불멸에의 꿈이고, 살아 있는 사람이며, 온갖 카르마를 쓸어내는 ‘커다란 빗자루’이다. 예컨대, 내겐 평생 ‘문학’이 거대한 빙벽을 실존적으로 올라야 되는 ‘촐라체’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유한한 인생에서 가슴속에 ‘촐라체’ 하나 품고 살면 성취 여부와 상관없이 그게 곧 지복이 아니겠는가.
_작가의 말에서
편집자 김형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