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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

힘들 때 읽어요, 비웃지 않을 테니까.

김금희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의 시대가 올까. 

적어도 지금 내가 가장 읽고 싶은 것은 그의 다음 소설이다.”

_신형철(문학평론가)


2015년 젊은작가상 수상작 「조중균의 세계」,

2016년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 「너무 한낮의 연애」 수록

여러분 안녕, 안녕하세요. 주말 잘 보내셨나요. 저는 휴일 내내 이불로 몸을 말고 누워 지냈습니다. 눈이 떠지면 그저 천장을 바라보고, 눈이 감기면 혼곤히 잠에 빠져들고…… 그렇게 자다 깨다 자다 깨다, 사람이 이렇게나 길게 잘 수 있단 말이야? 퍼뜩 놀랐다가 그럴 수 있으니까 이러고 있는 거겠지…… 하면서 심상하게 잠들어버리는, 정말 잉여로운 생활을 했어요.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와중에, 회사 꿈도 꾸었습니다. 그새 희미해져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저는 뭔가 다급하고, 안타깝고, 간절한 심정이 되어 회사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안에 타고 있는 누군가를 지켜보고 있었어요. 하지만 모든 꿈이 그렇듯, 전 그 상황을 변화시킬 만한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지요. 이렇게 뭘 어쩌지 못하는 상태로 절절히 누군가를 바라보는 표정 같은 것이, 이 책 『너무 한낮의 연애』 속 소설들에도 편편이 실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필용은 사무실을 나와 주차장에 쪼그려앉아 담배를 피웠다. 한 삼 년 조용히 지내다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명함! 그래, 명함 생각부터 났다. 새 학기가 되면 아들 학교의 학부모회에 가서 명함을 돌리며 알은척도 좀 하고 아들 기도 살려주는 게 필용의 연례행사였는데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시설관리 담당이라는 애매한 표현의 명함을 돌릴 수는 없었다. 우선 여분의 명함부터 찍어놓아야 할까. 하지만 인사이동이 다 알려진 판국에 갑자기 회사에 명함을 찍어달라고 하면 문제가 될 텐데, 명함집에 갖다주면 똑같이 만들어주려나? 그런데 그렇게 하면 문서위조 아닌가. 가짜 명함 아닌가. 가짜는 뭐가 가짜야. 필용은 세 개비째 담배를 피워 물었다.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아무하고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회사 근처에서 혼자 먹거나 굶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여기 근무하는 직원들은 무려 오백팔십칠 명이니까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면 이동해야 했다. 가야 했다, 어디론가. _「너무 한낮의 연애」, 9~10쪽

「너무 한낮의 연애」의 주인공 ‘필용’은 회사로부터 갑자기 인사이동을 통보받고 혼란에 빠지죠. 눈부신 성과와, 그것이 가져다줄 명예를 위해 한평생 달려온 필용. 그는 지금껏 이뤄놓은 모든 걸 빼앗기고, 볼품없는 명함을 돌려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렇게 인생이 뒤통수를 치는 경험…… 살면서 한 번은 할 수밖에 없는 듯해요.

 

여러분은 그럴 때 어디로 숨으시나요? 아무리 담대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홀로 숨을 장소 하나쯤 마련해두고 있다는 걸 전 알지요. 지난한 시험이 끝나 후련하면서도 너무 피곤할 때라거나, 소중한 사람이 내 인생에서 뛰쳐나갔을 때…… 저는 이불 속으로 파고듭니다. (엄마가 마련해준…… 순면인지는 모르지만 마치 구름처럼 몽글몽글한 저의 흰색 이불……)

 

『너무 한낮의 연애』를 함께 만든 디자이너로부터 이 표지를 건네받았을 때, 저는 반사적으로 제 방과, 거기 있을 흰 이불을 떠올렸어요. 서늘하고, 포근하고, 왠지 눈물 냄새가 날 것 같은 시안이었습니다. 책이 나오고 실물을 보니까요. 마음속으로는 무수한 눈물을 흘렸을 이 책 속 인물들을 덮어주는 이불 역할을, 책 바깥에서 이 표지가 해주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겠어요. 이 책을 만드는 과정 중에서, 제게는 개인적으로 의미 있었던 지점이랍니다.


문학평론가 정홍수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때 이슈가 되었던 중력파 검출 소식에서 특히 놀라웠던 건, 그 중력파가 십삼억 년 전에 발생해서 지금의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이라고. 김금희의 소설 또한 일상 밑에 잠겨 있던 오래전의 기억들이 용케도 현재의 우리에게 도달할 때, “우리의 몸을 기울이고, 삶의 좌표를 슬그머니 옮겨놓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고요. 필용이 십육 년 전 종로의 맥도날드에서 연애 비슷한 것을 했던 ‘양희’와 재회하여 두 번 눈물 흘리는 이야기인 「너무 한낮의 연애」는 그야말로 이런 설명에 부합하는 소설이지요.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다른 수록작들 또한 결이 비슷하답니다.

 

「세실리아」의 화자 ‘정은’은 귀찮게 엉겨붙기를 잘해 별명이 ‘엉겅퀸’이었던데다, 친구의 남자친구를 빼앗아 따돌림을 당했던 대학 친구 ‘세실리아’를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데요. 그날 세실리아가 그 시절부터 마흔이 다 되도록 혼자 앓으며 숨겨왔던 비밀을 나눠주자 걷잡을 수 없이 수치심에 빠져들게 되고요.

하지만 걸어야지. 미친 소리를 하면서라도 걸어야지, 집으로 가야지. 레지던스에서 우리집까지는 얼마나 멀까. 집에서 이런 걸 잊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쪼그리고 앉아 턱턱턱, 구덩이를 파는 세실리아를, 밤의 골목을 옮겨다니며 이미 버려진 것들을 별처럼 줍는 세실리아를, 누군가에게 엉겨붙고 싶지만 가장 저점의 온도에서도 그러지 못하고 홀로 동결해갔을 세실리아를. 나는 별안간 모든 게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가리며 걷다가, 소리치며 걷다가, 노래를 하며 걸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휴대전화를 꺼내 세실리아의 번호를 지웠다. _「세실리아」, 97쪽

부모를 죽인 원수의 집으로 쳐들어갈 계획을 세운 ‘나’와 형제들이 벌이는 한밤의 크리스마스 소동극, 「보통의 시절」은 일생의 동력이 되어주었던 복수심을 일순간 빼앗긴 이들의 호들갑스러운 마무리를 읽는 게 참 재미있었죠.

마음이 놓였다. 어차피 부모의 불행을 들려준 것도 원수의 이름을 알려준 것도 그의 얼굴을 보여준 것도 큰오빠 아닌가. 큰오빠가 신경쓰지 말라고 하면 말면 된다.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고 공부하는 사람은 순진무구한 아기 같은 사람이니까,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알 수 없고 답도 못 찾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를 일산까지 막무가내로 데려와요? 오빠도 참 별종이야.”

별종이야, 하면서 언니가 큰오빠 팔을 살짝 꼬집었고 우리는 같이 웃었다. _「보통의 시절」, 228~229쪽

자신을 키워준 고아원에 부채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린 마음에 사랑이라고 믿었(어야만 했)던 고아원 수녀님의 훈육이 나이가 들자 그저 폭력이 아니었는지 불쑥불쑥 떠올리게 되는 ‘나’의 이야기 「우리가 어느 별에서」는 또 어떤가요. 계속 고아원에서의 기억에 얽매여 있던 그녀가 드디어 일말의 해방감을 느끼며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는 이 장면은 읽는 이마저 후련한 기분이 들게 하는걸요.

그녀는 옥상 난간으로 다가가 저 아래에서 아주 능숙하게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빛, 어둠을 뚫고 어디론가 향하기 위해 안간힘 쓰고 있는 서울의 별들을 내려다보았다. (…) 한강을 지나는 다리 조명이 소등시간에 맞춰 꺼졌고 그녀는 정말 내일이면 사라질지도 모르는 어떤 세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그녀의 시야를 가리던 옥수수밭으로부터 멀지 않은 세계, 아주 낯익고 피해 갈 수 없는 어떤 치명적인 상처를 지닌 세계였다. 꺼져가는 세계였고 죽어가는 세계였다. 그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운동을 하다가 물구나무를 서 보이고는 그녀에게 “어때요? 굉장하죠?” 하고 물었다. 그녀는 팔이 떨리기는 하지만 제법 오래 버티고 선 그를 바라보다가 바람처럼 잠깐 웃었다. 그리고 욱신욱신 발을 아프게 했던 구두를 벗어 맨발 옆에 내려놓았다. _「우리가 어느 별에서」, 201~202쪽

과거의 기억이 문득 날을 세워 마음을 찌르는 경험. 그 기억을 이제 와서 수정할 수도, 없었던 일로 만들 수도 없으니 그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마음을 다독일 뿐. 그치만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그 기억이 왠지 소중하게 느껴져, 그것을 다시 의식 밑에 고이 잠기도록 두고 싶은 기분. 우리들 모두가 이런 일들을 겪기에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가 독자들로부터 이토록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이겠지요.

 

과거로부터 도달한 미세한 파장이 너무 많은 감정을 퍼뜨리고 말았다면, 그래서 힘들다면, 이 책을 같이 읽어요. 언제든 읽어요! 그렇게 이 소설들을 이불처럼 덮어보아요. 비웃지 않을 테니까요.

“미안하다. 심한 말 해서.”

필용이 사과했다.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

양희가 돌아서서 동네 어귀의 나무를 가리켰다. 거대한 느티나무였다. 수피가 벗겨지고 벗겨져 저렇게 한없이 벗겨져도 더 벗겨질 수피가 있다는 게 새삼스러운 느티나무였다.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질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고요.” _「너무 한낮의 연애」, 37쪽

편집자 정은진

차례

너무 한낮의 연애 _007

조중균의 세계 _043

세실리아 _073

반월 _103

고기 _129

개를 기다리는 일 _153

우리가 어느 별에서 _179

보통의 시절 _205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_231

 

해설 | 강지희(문학평론가)

잔존의 파토스 _261

 

작가의 말 _285


김금희

1979년 부산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성장했다. 인하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너의 도큐먼트」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조중균의 세계」로 2015년 젊은작가상, 「너무 한낮의 연애」로 2016년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했으며, 첫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로 제33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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