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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사람아, 나무 없이는 너도 없다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카를 슈피츠베크, <가난한 시인>, 1839, 캔버스에 유화

얼마 전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길 나누었습니다. 20년 전의 나와 1분간 통화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슨 이야길 전해주겠는가? 별 시답잖은 질문이라 생각했는데, 이내 뜨거운 호응이 뒤따랐습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 못 들어오도록 막을 거라는 둥(중학생에게?), 해외 유학 꿀팁을 전해주겠다는 둥, 수영을 하라는 둥(한 살이라도 어릴 때 시작해야 한다며(동감)) 거개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유의 통화를 하고 싶어했습니다. 무언갈 후회한다는 말을 이렇게 포장하니 전혀 후회처럼 들리지 않고 외려 진지하고도 유쾌한 메시지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를 심드렁하게 듣고 있던 한 친구 왈, 1분간 전한 그 꼰대 같은 이야기를 어린애가 잘도 알아듣겠다, 그보다는 ‘20년 전 나’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 더 낫지, 하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이 회의론자의 소수의견도 꽤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는 나름의 세월을 살았다는 지금의 우월한 지위만 생각했지, ‘20년 전 나’가 들려줄 귀한 이야기 생각은 못했으니까요. 우리는 20년이라는 매우 긴 세월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그 ‘20년 전의 나’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을 공산이 큽니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의 나를 잘 모르고 있기도 하고요.) 여러분은 그 1분을 어떻게 사용하시렵니까.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오늘 소개할 책은 도정일 선생님의 출간 22주년 개정판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입니다. 1994년 당시 ‘늦깎이’ 신예 비평가였던 저자의 첫 책은 출간 후 입소문을 타면서 평론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10쇄 10,000부의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이 책은 ‘전문가 100인이 선정한 1990년대의 책 100선’(교보문고)으로 선정되었고, 절판된 채 책이 헌책방에서만 유통되던 2007년에는 한국일보가 선정한 ‘우리시대의 명저 50선’으로 손꼽히기도 했습니다. 절판 상태의 책이 ‘우리시대의 명저’로 소개된 데서 우리는 한 번 놀라고, 이 책이 다시 시중 서점에 진열되기까지 그때로부터도 9년이 걸렸다는 데서 거듭 놀랄 뿐입니다.

그의 문장은 정확하고 아름다우며 시적인 울림이 풍부한데다 때로는 해학적이기조차 하다.

_한겨레 1994년 12월 28일자

문학비평 같기도 하고, 시민운동을 위한 굳건한 지지대 같기도 하고, 개성 넘치는 사유에 빚지고 있는 수상록 같기도 한 이 책은 이 강퍅한 시대에 인문학은 어떻게 존재해야 할지를 예시한다. _한국일보 2007년 2월 8일자

도정일 선생님이 20년 전의 자신과 통화할 일이 생기면,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가 머잖아 절판될 텐데 꾸물럭거리지 말고 서둘러 개정판을 내라, 라고 얘기할지 안 할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덕분에’ 우리는 지금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자로서도 20여 년 만의 개정판 작업이 반가웠는지, 한번은 교정을 보면 이런 얘길 하셨습니다. “내가 정말 이런 빛나는 표현을 썼단 말이야?” 이런 유쾌한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저자께서 얼굴을 붉히실지 모를 일이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틀림없이 이 책은 탁월합니다. 20여 년 전의 시대와 문학을 대상으로 쓴 저자의 글은 (마치 21세기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씌어진 듯) 전혀 과거 시점으로 읽히지 않습니다. 문학, 문화, 시대에 대한 당시 저자의 문제의식이 ‘불행히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차례 도깨비 실개천 건너듯 이런저런 얘기를 써오는 동안 나를 지배한 관심의 하나는 ‘시와 삶’의 문제로 물꼬를 트는 일, 더 정확히 말하면 시에 대한 비평적 반응과 읽기가 대중 독자의 삶에 연결되게 하는 일이었다. 시에 관한 우리의 평문들은 대체로 시의 사회적 유통에 별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조밀하고 전문적인 비평적 읽기가 수행되는 차원은 그 차원대로 중요하지만 시의 사회적 의미와 효용이라는 부분에 눈 돌리는 읽기의 차원도 중요하다. 젊은 날 시를 즐겨 읽던 사람들도 삼십대 중반을 거치고 사십대에 들어가면 거의 대부분 시의 나라를 떠난다. 삶에서의 시의 중요성은 잊혀지고 시를 찾아 읽는다는 것 자체가 마치 미성숙의 지수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여기엔 비평의 책임이 없지 않다. _「낙동강 물난리, 국제화, 지상의 아름다움」(76쪽)

대중소설은 값이 싸고 본격소설은 비싼 것이 아니다. 좋은 소설은 수용자의 정신 에너지, 집중, 수준을 요구하기 때문에 좋은 소설이다. 이 수준을 뭉개는 일은 모든 높은 산을 뭉개어 동네 뒷산으로 만드는 일과 같다. 그게 바로 문화의 타락이고 몰락이라는 것이다. _「다섯 가지 오해」(265쪽)

게다가 “수면 위로 솟구쳐올랐을 때의 물고기 눈알 같은 진리의 한 순간” “한순간의 짧은 감동도 주기 어려운 지나간 시대의 잠꼬대” “개구리에게나 던져줄 허사” 같은 저자 특유의 유쾌한 표현은 독자에게 지루할 틈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가만, 이 책의 제목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책의 마지막 글꼭지 제목이기도 합니다)는 대체 어떤 의미로 붙여진 걸까요? 그 의미의 힌트를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오는 밤 숲에 머물러」에 집어넣은 저자는 먼저 이 시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 소개를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눈 오는 밤 숲에 머물러」의 화자는 한 해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밤에 말을 몰아 눈 내리는 숲을 지나다 문득 발길을 멈춥니다. 인적은 전혀 없고, 눈 내리는 소리와 부드러운 바람소리만 들려오는 눈발 속의 숲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마치 삶의 가장 신성한 순간처럼 다가온 그 정취에 화자가 어리둥절 사로잡혀 있는데, 화자와 동행한 조랑말이 이내 쩔렁 방울을 흔듭니다. 그 소리에 화자는 사로잡힌 정신을 수습하고 세상과의 약속을 상기하며 “잠들기 전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 갈 길이 멀다” 하고는 다시 말 머리를 돌려 숲을 떠납니다. 이제 그 힌트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프로스트 시의 화자는 “그렇게 떠나지만 그가 떠남으로써 남기는 미련의 공간, 그 눈 내리는 숲은 독자를 유혹하여 그곳으로 달려가게” 합니다. 그러나,

누가 오늘날 프로스트처럼 눈 오는 밤 숲의 유혹을 노래할 수 있는가? 모더니스트의 시대까지도 작가, 시인들은 버지니아 울프처럼 “별의 언어를 옮겨 쓰는 세계의 은자”에게서 자신들을 발견하고, 나무를 돛 삼아 항해하는 한 척의 배라는 서정으로 이 행성을 그려볼 수 있었다. 나무들은 아름답고 나무가 있는 세계의 강물은 푸르러 그 강에 들어갔다 나오는 백조의 날개가 푸른 잉크빛으로 물들지 모른다는 행복한 서정을 그들은 펼칠 수 있었다. 모더니스트의 시대까지 갈 것 없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시인들은 “풀잎 하나가 우주를 들어올린다”(정현종)는 빛나는 상상력을 풀잎의 감성에 실어 세상으로 띄워보내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무들이 질식하고 숲이 죽어가는 지금 이 시대의 시인에게 그런 상상력은 가능하지 않다. 우주를 들어올리기는커녕 제 무게 하나도 추스르지 못하는 병든 풀잎을 시인은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풀잎 자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 시인은 풀밭으로 가지 못한다. 농약 끈적한 풀밭에 앉아 풀잎의 숨소리를 들어야 하는 왜곡과 변태를, 그 비참을, 그가 무슨 수로 견딜 수 있으랴. _「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371쪽)

독자를 숲으로 안내하고 유혹해야 할 시인이, 지금 시대에는 그 자신부터 숲으로 갈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는 게 저자의 진단인 셈입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다시 시인이 숲으로 떠날 수 있기를, 그래서 우리 모두를 그 숲으로 초대하는 날이 오기를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요? 고도를 기다리듯?

 

도정일 선생님은 과작寡作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저를 제외하고) 서점에서 만날 수 있는 그의 저서는 ‘도정일 문학선’ 1, 2권인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와 3권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초판 서문을 읽다보면, 22년 전의 저자가 지금의 저자에게 전하는 이야기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1983년 봄학기부터 대학 강단에 선 뒤로 10년 남짓 나는 나의 ‘태골’(게으른 뼈다귀)을 닦달질하면서 ‘문학교육’, 특히 우리의 문학교육에서 몹시도 취약한 부분인 대학원 ‘이론교육’이란 걸 실시해보느라 무용의 열정을 쏟아온 듯하다. 그 83년 봄학기 무렵의 나에게는 적어도 몇 권의 ‘저술’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그 저술의 어느 것도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물론 게으름 때문이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에 문단의 몇몇 인사들과 잡지 편집장들이 나를 세상으로 끌어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도 대학 한구석에 처박혀 소리 없이 게으른 뼈다귀나 추스르고 있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끌려나와 등을 떠밀리고 채근질당하면서 이런저런 글들을 쓰는 사이에 내게는 ‘문학평론가’니 ‘비평이론가’니 하는 딱지들도 붙게 되었다. …

… 지금은 나라 안팎이 사상과 가치의 극심한 혼돈 시대를 맞고 있고 나 같은 태골에게도 해야 할 일이 다소 있을 것 같아 1995년부터는 단단히 마음먹고 이런저런 ‘저술’들을 세상에 내놓을 계획이다. 친구여, 내 글을 읽어주는 독자여, 원컨대 내가 다시 게으름에 빠지지 않도록 채찍질해주겠나. _초판 서문에서

당시로부터 셈을 해도 그가 쓴 평론은 130여 편, 칼럼/에세이는 300편이 넘습니다(평론을 두 달에 한 편꼴로, 칼럼이나 에세이를 한 달에 한 편 이상씩 쓴 그는 굉장히 부지런한 필자였습니다). 그는 결코 글 쓰는 일에 게으른 적 없지만, 이런저런 ‘저술’들을 세상에 내놓겠다는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알리바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얼마나 바빴었는지는 앞서 소개해드린 적 있습니다. http://cafe.naver.com/mhdn/81034)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개정판 출간을 계기로 저자가 ‘1994년의 약속’을 다시 한번 새기고 우리들에게 이런저런 저술들을 ‘내놓길’ 응원합니다.

 

편집자 김형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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