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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문학동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이거 내 이야기 아니면 당신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저렇게 손을 꽉 붙들고 있었을까요.

꽤 긴 시간이었겠죠.

깍지 낀 손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시간이 보이질 않아요.

막 잡은 손 같죠?

그림은요, 순간을 낚아채진 못해요.

그렇죠.

사진이 부러울 때도 있어요.

찰나가 부러워요?

그림을 그리는 중에도 시간은 흐르니까요. 멈출 수 없어요.

「종이 위의 욕조」에 등장하는 화가 미요와 큐레이터 용철이 나눈 대화입니다. "두 명의 여자가 손을 꼭 붙들고 화면 밖을 응시하는 그림" 앞에서 미요는 시간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화가의 숙명에 대해 토로하고, 용철은 영혼을 담은 건지 안 담은 건지 모를 태도로 미요의 이야기에 맞장구칩니다. 시간이 딱 멈추어도 좋겠다 싶은 순간을 우리는 무시로 겪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시간의 덧없음을 탓할 뿐입니다(138억 년을 한결같이 달려온 시간이 한두 사람 사정 봐주겠다고 멈추어도 큰일이긴 하겠죠). 어쩌면 전시장의 저 그림 앞에서 미요는 가슴속에 싹튼 묘한 감정 때문에 새삼 시간의 야속함을 떠올렸을지 모릅니다. 그림 앞에서 눈이 빨개진 미요를 용철은 놀리듯(쯧쯧 철없는 사내여...) 지적하지만,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용철은 혼자 눈이 빨개진 채 미요를 떠올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은 소설가 김중혁의 네번째 단편소설집이자 첫번째 연애소설집입니다. 여덟 편의 단편이 주되게 다루는 화두가 '사랑'이고, 그의 전작 단편들과 달리 '여자'들이 비중 있는 캐릭터로 등장하고, 또 남여 대한 심리 묘사도 무척 세밀합니다. 작가는 그간 사물 얘기를 주로 써왔는데 어느 순간 자신의 소설 속에서 사람이 중요해지는 순간이 왔다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사람이 중심인 소설을, 관계와 감정에 초점을 맞추어 쓰게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김중혁 '첫 연애소설집'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김중혁 소설 속 '사람'들이 전하는 사랑 이야기들이 어찌된 사연인지 '연애소설스럽게' 달콤하지가 않습니다. 김중혁식 연애담에는 막 시작되려는 사랑, 끝나버린 사랑, 엇갈리고 엉킨 사랑, 부서져버린 사랑 같은 게 다루어진달까요? 작가는 아닌 게 아니라 "사랑을 둘러싼 변두리의 감정들"을, "열렬한 사랑 말고 그런 얘길 쓰고 싶"었다고 해요. 사물 아닌 사람 중심의 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는 그래서 권말 「작가의 말」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고맙다." 그리고 각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 혹은 역할을 작가는 하나하나 남김없이 호명합니다.

 

머뭇머뭇하다 사랑에 참방 빠지고 만 사내들이 사랑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읽노라면, 이거 참 내 얘긴가 싶게 부끄럽다가도, 이거 혹시 자네 속사정 아닌가 싶게 호기심이 동하기도 합니다. 가령, 지금은 다른 남자를 사귀고 있는 전 여자친구(정윤)를 술집으로 불러낸 알코올중독에 빠진 사내(규호)가 주정 반 투정 반 한다는 소리가 이렇습니다.

아무런 애정 없이 그냥 한번 안아주기만 해도, 그냥 체온만 나눠줘도 그게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대. 나는 그때 네가 날 안아주길 바랐는데, 네 등만 봤다고. 등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고.(「가짜 팔로 하는 포옹」 96쪽)

얼마 전 이 사내는 알코올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절친 '피존'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냈습니다. 오죽 의지할 데가 없었으면 위로 좀 얻겠다고 전 여자친구를 불러냈을까요? 제 버릇 개 준다고 이 사내, 여자의 마음을 빗맞히는 이야기만 거듭하다 포옹 한번 '얻어내지' 못하고 전 여친을 술집에서 퇴장시키고 맙니다. 이제 규호는 홀로 쓸쓸히 남은 술을 마시게 되었지만, 어쩌면 정윤은 그날 그 자리에서 숱하게 규호를 (가짜 팔로) 껴안아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정윤 덕분에 규호는 피존을 애도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번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이 쓰여진 시간 순서대로 배치된 것은 아니지만, 한 호흡으로 읽어도 좋습니다. 마지막에 배치된, 제13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요요」는 '시간'과 '사랑'이라는 화두를 다루며 이번 소설집에 실린 여러 이야기들을 아우르듯 읽힙니다.

서두에 인용한 소설 「종이 위의 욕조」의 미요와 용철은 전날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둘은 공통적으로 '명사 분실증'에 걸렸을 뿐 아니라 화가와 큐레이터로서 호흡이 잘 맞고, 남과 여로서도 쿵짝이 잘 맞는 듯 보입니다. 고주망태로 취해 술자리 대부분의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난 용철은 어렴풋하게 전날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걸었던 기억을 되살려냅니다. 그 여자가 미요인지, 새벽 1시에 자신을 데리러 온 여자친구 민희였는지까지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미요는 다음날 용철이 준비중인 모의 전시를 찾고(전날 약속을 했나본데 이 남자 그 약속도 기억을 못하고 있었네요), 함께 전시를 둘러보다 예의 그 "두 명의 여자가 손을 꼭 붙들고 화면 밖을 응시하는 그림"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전날 술집에서 미요는 용철이 여자친구 손에 끌려 귀가하던 모습을 보았을 텐데요, 그렇기 때문에 미요는 용철에게 사진 얘기와 그림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엉뚱한 끝말잇기나 하며 실없이 꺄르르 웃어대던 순간, 명사를 잘 끄집어내지 못하는 둘이 공감하던 순간, 전시 오픈 직전 용철이 듬직하게 다가온 순간 등이 미요에게 명장면이었다면, 그 순간들에 시간이 더해진 그림 같은 현실이 미요는 얼마나 야속했을까요?

 

시간을 x축으로 사랑의 감정을 y축으로 사람의 인생을 그려본다면,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곡선이 존재하는 걸까요? 나는 어떤 곡선을 그려왔는지, 앞으론 어떤 곡선을 그리고 싶은 건지, 내 옆에 있는 사람의 그림은 어떤 모양인지 궁금하시다면, '시간'과 '사랑'에 대해 읽는 소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추천입니다.


끝으로 중혁샘이 직접 만든 『가팔포』 북트레일러 덧붙입니다! :)

편집자 김형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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