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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억 사기 당하고 치매 어머니까지…“새장 속에 갇힌 어리석은 삶”

[인터뷰] 37년 만에 국내서 새 음반 낸 ‘엔카의 여왕’ 계은숙…

“치매 어머니 통해 ‘나’ 찾는 여행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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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카의 여왕' 계은숙이 37년 만에 한국에서 새 음반 '리버스'(Re:Birth)를 냈다. 그는 "지난 40년간 노래 인생은 새장 속에 갇힌 어리석은 삶이었다"며 "나와 똑같은 상처를 입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이동훈 기자

들꽃으로 태어나 화초로 자란 그의 인생은 기대와 달리, 서서히 병들어갔다. 화병에 꽂힌 꽃이 마냥 예쁠 것 같았던 겉모습은 화려할수록 더 깊은 내면의 상처를 안기며 한순간에 꺾였다.


수십 년 간 ‘엔카의 여왕’으로 불리며 일본 열도를 흥분케 했던 가수 계은숙(58) 얘기다.


1979년 들꽃 같은 곡 ‘노래하며 춤추며’로 스타덤에 오르기가 무섭게, 그는 82년 일본 가요계로 노선을 바꿨다. “좀 더 큰 야망을 위해”, 그리고 “각종 질시에 질려서” 떠난 그곳은 잘 가꾼 온실의 화초였다.


일본 가수들의 꿈의 무대라는 ‘홍백가합전’에 89년부터 94년까지 연속 출연해 앨범 대상은 물론, ‘엔카의 여왕’이라는 수식까지 얻었지만, 그뿐이었다.


“저는 바보였어요. 누구한테도 공격받지 않고 오로지 노래만 할 수 있는 곳이라면 가서 열심히 노래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거든요. 매니지먼트 계약이니, 수익 배분율 같은 건 하나도 알지 못했으니…”


그의 일본 활동 계약은 ‘월급제’였다. 커질 대로 커진 회사와 계약이 끝난 후엔 자기 회사를 차렸지만, 그때도 돈에 대한 관심은 남 얘기였다. 20년간 믿었던 일본 매니저가 횡령한 돈만 10억원 등 일본 활동에서 자기 수입 제대로 챙기지 못해 날린 돈이 수백억 원에 이른다.


빈털터리가 된 순간, 그는 마약에 손을 댔다. 누군가로부터 약을 건네받고 무엇이 문제인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오직 그 순간을 모면하는 데만 골몰했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07년 25년 만에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한국에선 활동을 접은 채 오로지 엄마 품에 안겨 자숙의 시간을 보냈다. 6년쯤 지났을까.


이번엔 30년 지기 친구 보증을 서다 일본에서 일찌감치 마련했던 한국의 집 한 채, 땅 등 120억원에 이르는 돈을 사기당했다. 이번에도 지인이 건네준 마약에 쉽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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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억 원의 사기를 당하고 빈털터리로 한국에 돌아온 계은숙은 치매 어머니를 돌보며 자신의 꿈과 역할에 대해 되돌아봤다고 말했다. /사진=이동훈 기자

“1년 넘게 복역하면서 ‘그래, 잘못한 일은 회개하고 벌 받자’고 끝없이 자책했어요. 여러 생각들이 스치더라고요. 일의 노예가 됐던 모습, 나를 나답게 소화시키지 못한 부분, 팬들에 대한 미안함, 하고 싶었던 일을 뜻대로 못 했던 일상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죠. 그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제 모습을 보니, 정말 프로답지 못했단 생각에 실망도 많이 했어요.”


울고 회개하며 죽을 생각까지 하다 만난 마지막 존재는 역시 ‘엄마’였다. 6.25 전쟁고아로 태어나 치매까지 앓은 어머니의 병원비조차 낼 수 없는 현실과 부딪히자, 다시 ‘살아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밀려왔다.


“새장 속에 갇혀 산 세월은 정말 어리석게 산 인생이었어요. 사기와 배반당할 때마다 약에 손을 댔고 제 탓만 해대며 숨으려고만 했으니까요. 어머니를 다시 보니 딸의 역할, 저와 똑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제가 해야 할 일을 다시 생각했어요.”


일본 데뷔 후 고국에서 37년 만에 낸 새 음반 ‘리버스’(Re:Birth)도 망가진 삶 속에서 다시 살아났음을 보여주는 고백서이자 희망가다.


“남들에겐 새 음반 제목이 포장으로 비칠 수 있는데, 설명하기 쉽지 않은 제 인생을 잘 요약한 제목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부분이 몰락한 상태에서 다시 화장하고 스포트라이트 받을 준비를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제가 부르는 노래에 위로받는 팬이 있다면 그 역시 저를 위로하는 거란 생각에 용기를 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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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카의 여왕' 계은숙. /사진=이동훈 기자

계은숙은 일본에서 ‘엔카’로 통했지만, 사실 그의 창법과 음색에는 트로트 느낌이 거의 없다. 어느 선율의 매무새에도 소위 ‘꺾기’ 창법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 대신 전매특허 같은 허스키한 음색에 실린 팝에 가까운 창법은 ‘어덜트 컨템포러리’(성인 가요) 시장에 어울릴 만큼 현대적이고 고급스럽다.


잔잔한 피아노로 시작하는 첫 곡 ‘길’부터 자전적 얘기가 쏟아진다. ‘가을비 건너 겨울산 넘어/날 반기는 건 뭐일까/…저기 서 있는 내 그림자 미소만 가득하고/지난 길가에 잊지 못할 추억의 자욱들/만남이 있었기에 기억하겠지/사랑이 있었기에 힘들었겠지/…’(타이틀곡 ‘길’ 중에서)


자박자박 습기 한 움큼 모아 가슴을 적시는 선율을 듣자니, 그의 슬픔이 읽히고 회한이 서린다.


‘엄마’에서 그는 ‘피지 못한 들꽃의 아픔으로/가슴 시린 이별의 아픔으로/내 곁을 떠나간 사람/당신을 닮아가는 이 순간에/당신의 빈자리에 기대어/하루를 견디는 사람/…’하며 남은 노래 인생의 인내와 처연함을 목놓아 부르는 듯하다.


“제 인생의 귀로는 ‘나’를 찾고 ‘나’를 사랑하는 자세로 향했으면 해요. 지난 40년 노래 인생에서 ‘나’는 없었는데, 한번 발견해보고 싶거든요. 그래서 남들은 우습게 볼지 모르는 무대도 욕심내서 기획해 보려고요.”


계은숙은 인터뷰 내내 약간 빠른 속도의 센 어조로 얘기를 풀었다. 그의 ‘강한 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은유적 고백을 솔직한 감정 그대로 토해낸 음악이라는 세계를 넘어 만나는 현실은 살아내야 하는 전쟁터였을지 모른다.


김고금평 기자 dann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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