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노포와 신상 맛집 ‘신구 조화’
50년 노포와 신상 맛집 ‘신구 조화’
을지로 DNA 그대로 ‘레트로 감성’
1970년대 한국 영화 시장 메카였던 충무로가 최근 ‘힙무로’라는 새 별칭을 얻었다. 노포와 신상 가게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젊은 세대 ‘감성’과 중장년층 ‘추억’을 아우르는 매력적인 상권으로 거듭났다는 평이다. 새로운 ‘힙플레이스’로 떠오른 충무로 상권 트렌드를 집중 분석해본다.
트렌드 1 절묘한 신구 조화 : ‘50년 노포’ 사이사이 ‘뉴페이스’
서울 충무로 인현시장에는 문 앞에 대기줄이 늘어서는 유명 노포가 많다(좌). 충무로 인쇄 골목 한편에서 3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영덕회식당’. 아담한 실내와 가게 앞 펼쳐진 파란 테이블에서 노포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우). (윤관식 기자) |
평일 점심시간 충무로 곳곳은 인쇄물을 나르는 지게차의 굉음과 점심 식사를 위해 모인 직장인으로 분주하다. 상권을 둘러보면 묘한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 수십 년 장사를 하며 간판 빛이 다 바랜 노포들 사이사이로, 화려한 네온사인과 트렌디한 인테리어로 눈길을 끄는 신상 가게가 곳곳에 포진해 있다.
‘사랑방칼국수’는 충무로를 대표하는 노포다. 1968년 문을 연 이곳은 허름한 건물 외관과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실내 모두 소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50년 넘은 오래된 가게지만 따뜻한 칼국수와 닭백숙을 먹으러 오는 직장인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랑방칼국수 사장은 “과거에는 중장년층 직장인 손님이 많았지만 최근 들어 젊은 손님이 더 많다. 외국인 손님도 점차 많아지고 있다”고 들려줬다.
인현상가 앞에 자리 잡은 ‘황평집’ 역시 점심시간이면 문 앞에 대기줄이 늘어서는 50년 전통의 닭곰탕 가게다. 닭곰탕은 물론, 매콤한 닭무침을 안주로 찾는 직장인이 많아 저녁에도 문전성시를 이룬다. 황평집 사장은 “최근 경기 불황이 체감되기는 하지만 점심시간에는 소박한 한 끼 식사로, 저녁에는 음주를 즐기려는 중장년 손님이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길게 늘어선 대기줄이 간판 그 자체인 ‘필동면옥’은 충무로를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평양냉면 맛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난 가을 날씨에도 가게 내부는 손님으로 가득 차 있다. ‘유명 맛집 지표’로 불리는 미쉐린 가이드 서울에도 등재된 곳으로, 2년 전 가수 성시경 유튜브 채널 ‘먹을텐데’에 소개되며 대기 전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충무로 인쇄 골목 한편에서 3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영덕회식당’의 외관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롭다. 하지만 20대 젊은 고객에게는 낡은 건물마저도 ‘힙’하게 느껴진다. 아담한 실내와 가게 앞 펼쳐진 파란 테이블에서 노포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동해와 포항에서 신선한 생선을 공수해 만든 막회로 유명하다.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유명 노포가 즐비한 충무로지만, 비교적 최근 생긴 ‘뉴페이스’ 약진도 두드러진다. 청년 창업자가 현대적인 감각을 입혀 만든 신상 맛집이 대거 들어섰다. 충무로에서 시작해 강남과 여의도 등지까지 분점을 낸 오므라이스 전문점 ‘을지다락’, 통버터로 숙성한 삼겹살을 파는 ‘빠삼’, 편의점 음식 고급화라는 콘셉트로 만든 일식당 ‘알돈익스프레스’, 유튜브에서 홍석천·이원일 셰프가 극찬하며 입소문을 탄 소바·돈가스 전문점 ‘낙원의소바’ 같은 식당이 최근 검색량이 많은 충무로 핫플레이스다.
트렌드 2 현지 느낌 그대로 : 베트남·독일·대만풍 완벽 재현
최근 충무로에 새로 들어선 가게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로컬’이다. 다양한 국가의 식당을 현지 분위기 그대로 재현해낸 식당이 들어서면서 충무로는 새로운 미식 상권으로 관심받는다. 일본, 태국, 베트남, 독일 등 이국적인 풍미를 서울 한복판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됐다.
충무로 골목에 위치한 ‘박지후스시’는 외관부터 일본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윤관식 기자) |
‘박지후스시’는 외관부터 일본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일본 전통적인 스시야에서 느낄 수 있는 간결함과 정갈함을 그대로 옮겨 왔다. 소박한 나무 간판과 더불어 우드톤의 바 테이블과 스시 셰프가 직접 요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오픈형 주방이 인상적이다. 일본 현지에서나 맛볼 수 있는 제철 생선으로 만든 스시를 즐길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가게 앞에서 만난 한 직장인은 “골목 가게 감성과 일본식 인테리어가 어우러져 음식도 현지에서 먹는 것마냥 더 맛있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올해 3월에 충무로에 새롭게 문을 연 ‘호앙비엣’. 마치 베트남 호찌민 시내에 있는 작은 식당을 옮겨놓은 듯한 인테리어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윤관식 기자) |
현지 베트남 음식점을 마치 ‘복붙(복사 후 붙여넣기)’한 듯한 ‘호앙비엣’도 인기몰이 중이다. 올해 3월에 충무로에 새롭게 문을 연 음식점으로, 마치 호찌민 시내에 있는 작은 식당을 옮겨놓은 듯한 인테리어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현지 분위기를 똑같이 구현하기 위해 호찌민에서 직접 각종 기물과 식기류 등을 컨테이너에 실어 가져왔다. 장준 호앙비엣 대표는 “올해 3월 오픈한 충무로점은 입소문이 나면서 매출이 매달 20%씩 증가했다”며 “현재 6개월 만에 월 6000만원 매출을 달성했다”고 귀띔했다.
태국 퓨전 음식점 ‘로스트템플’도 유명하다. 태국 식당 특유의 이국적인 조명과 열대 식물을 활용한 플랜테리어가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음식 역시 땅콩과 라임이 듬뿍 들어간 태국 특유의 새콤달콤한 맛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평이다.
충무로 ‘핫플’로 SNS에서 특히 인기인 ‘바오서울’은 대만 스트리트 푸드인 ‘바오’를 메인 메뉴로 삼는 퓨전 레스토랑이다. 바오는 폭신한 빵 속에 다양한 속재료를 채워 먹는 샌드위치와 비슷한 요리다. 한자를 활용한 간판 등 매장 곳곳에 대만 특유의 감성을 담은 소품들이 배치돼 있다.
최근 생긴 ‘구텐독’은 독일 느낌을 물씬 풍긴다. 화덕에서 굽는 독일식 소시지 맛집으로, 야외 바 테이블에서 즐기는 독일 수제맥주가 별미다.
트렌드 3 을지로식 ‘레트로 감성’ : 낡은 소품과 내외벽…‘추억 여행’
최근 충무로 상권이 급부상한 이유는 ‘을지로 상권 확장’과 연관이 있다. 힙지로 DNA는 충무로 이곳저곳 들어선 ‘감성 카페’나 ‘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낡은 건물 내·외벽, 옛 소품을 활용한 인테리어 등 을지로 상권을 대표하던 레트로한 콘셉트가, 충무로에도 고스란히 이식된 모습이다.
올해 4월 문을 연 카페 ‘카우치소셜’은 이름처럼 커다란 카우치를 한데 모아놓은 미국식 이색 카페다. 아늑한 카펫 바닥과 다양한 조명이 1990년대 미국 시트콤을 절로 연상하게 한다. 시나몬 라테와 함께 먹을 수 있는 아메리칸 홈메이드 쿠키가 메인 메뉴다. 카우치소셜 관계자는 “과거 을지로 인기가 점점 충무로로 번지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해 입지와 콘셉트를 결정했다”며 “매장에는 다양한 소품은 물론 질문지를 넣은 포춘쿠키 등 즐길 거리를 배치해 신선함을 주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인현시장에 위치한 ‘재해석’은 일반 벽지 대신 낡은 신문지로 벽을 발라 인테리어 포인트를 줬다. (윤관식, 나건웅 기자) |
인현시장에 위치한 ‘재해석’은 일반 벽지 대신 낡은 신문지로 벽을 발라 인테리어 포인트를 줬다. 충무로에 위치한 인쇄 골목과 어울릴 수 있는 인테리어를 고민하다 나온 결과물이다. 어둑한 조명 사이로 신문 벽지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메뉴도 이색적이다. 커피에 푸딩이 들어간 푸딩모카오레와 몽블랑푸딩파르페가 대표 메뉴다. 재해석 관계자는 “카페를 충무로라는 동네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에 맞게 인테리어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간판 없이 칵테일과 와인을 파는 스피크이지 형태 ‘바(Bar)’도 을지로 상권과 결이 같다. 최근 문을 연 칵테일바 ‘아우’는 어둡고 붉은 조명이 시그니처다. 레트로한 콘셉트지만 칵테일이나 위스키를 먹는 손님들은 대부분 20~30대다. 특히 여성 손님 비중이 높은 편이다.
인현시장 골목에 자리 잡은 와인바 ‘코다’는 이색 안주로 레트로한 감성을 챙긴 케이스다. 주력 메뉴는 어묵과 떡볶이. 와인과 다소 안 어울리는 메뉴로 보일 수 있지만, 색다른 콘셉트로 호평을 받는다.
힙지로 상권에서 운영하다 올해 초 충무로 골목으로 ‘이적’한 위스키바 ‘숙희’. 그 이름처럼 동양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바로 유명하다. (윤관식, 나건웅 기자) |
힙지로 상권에서 운영하다 올해 초 충무로 골목으로 ‘이적’한 위스키바 ‘숙희’. 그 이름처럼 역시 동양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바로 유명하다. 위스키 발음과 유사한 ‘숙희’를 매장 한가운데에 한문으로 적어놨다. 한지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조명과 외벽 디자인으로 손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다.
트렌드 4 MZ들의 새 놀이터 : 젊은 층 열광 ‘베이커리’ 매출↑
충무로 상권의 가장 큰 변신 중 하나는 연령대가 점점 어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을지로 상권 확장, 여기에 SNS 입소문을 타고 새로 유입된 MZ세대가 주요 고객으로 부상했다.
가장 큰 변화를 보이는 업종은 주점이다. 충무로는 과거 유흥주점이 큰 비중을 차지한 상권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유흥주점 대신 최근 생겨난 감성적인 분위기의 주점이 대세로 자리 잡는 모양새다. 올 상반기 충무로 유흥주점 매출은 약 35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7%가량 감소했다. 반면 퓨전 요리(19%)와 간이 주점(14%) 등 젊은 세대가 주로 찾는 외식 업종은 두 자릿수 매출 증가율을 보였다.
인현시장에 지하 1층에 위치한 ‘무작위MZW’는 젊은 세대 놀이터로 정평이 자자하다. 충무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클럽형 요리 주점’이다. 어두운 조명과 강렬한 네온사인, 힙한 음악이 손님 발길을 붙든다. 무작위를 뜻하는 ‘MZW’ 네온사인은 이미 유명한 포토존이다. 비교적 연령대가 높은 인현시장 상권에서 20대 초반 손님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그야말로 ‘힙한’ 주점으로 꼽힌다.
대화가 금지돼 있는 뮤직바 ‘인현골방’의 콘셉트도 독특하다. 대화를 불편해하는 젊은 세대 취향을 고려해 각자 신청곡을 조용히 들으며 술을 마시는 ‘예약제 혼술바’ 방식으로 운영된다. 홀로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젊은 손님은 물론 퇴근 후 방문하는 직장인 손님도 많은 편이다. 신청곡은 비틀즈부터 뉴진스까지 다양한 세대와 장르의 음악이 공존한다.
인현골방 관계자는 “2시간 정도 의도적인 대화 단절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에 대한 공감을 깊이 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며 “특히 ‘골방명록’으로 불리는 방명록 제도는 자신의 깊은 이야기를 털어내고 다른 사람의 글을 보며 힐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젊은 세대 반응이 좋다”고 덧붙였다.
명보아트홀 주변에 위치한 아소토베이커리는 일본 고유의 카페 문화를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재해석했다는 평을 받는다. (윤관식 기자) |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많은 ‘베이커리’ 업종의 약진도 돋보인다. 충무로 상권 내 베이커리 매출은 주요 업종 중에서도 손꼽히는 증가세를 보인다. 올 상반기 충무로 상권 제과·제빵 매출액은 약 18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무려 109% 증가했다.
신상 베이커리가 대거 오픈했다. ‘아소토베이커리’ ‘에스터스’ ‘빵쌤’ 등 최근 생겨난 베이커리는 2030 고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각각 특징이 확실하다. 명보아트홀 주변에 위치한 아소토베이커리는 일본 고유의 카페 문화를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재해석했다. 커피·차 등 음료와 간단한 간식거리를 제공하는 카페로, 한국의 다방과 비슷한 성격을 지니는 일본 ‘킷사텐’ 감성을 녹여냈다. 일본에서 비롯한 메론빵과 소금빵을 맛보려는 손님으로 평일 점심시간에도 대기줄이 있을 정도다.
아소토베이커리와 인접해 문을 연 또 다른 베이커리 ‘에스터스’도 유명하다. 크루아상을 기반으로 한 달달한 타르트부터 휘낭시에, 페스츄리, 샌드위치까지 먹을거리가 다양하다. 오렌지 컬러를 강조한 색감과 통창으로 구성된 시원한 인테리어가 특징이다. 지난해 오픈한 ‘빵쌤’도 충무로에서 인기 있는 베이커리다. 무엇보다 접근성이 좋다. 충무로역 5번 출구와 연결돼 있어 역에서 나오자마자 방문 가능하고, 오피스텔 지하에 위치해 입주민도 자주 찾는 장소다.
힙무로 이면에 드리운 그림자 : 재개발로 하나둘 철거하는 인쇄 골목
충무로가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인쇄 골목의 쇠퇴라는 그림자도 있다.
충무로는 과거부터 인쇄업의 중심지로, 한때 종이 인쇄물 수요가 폭발하면서 인쇄소가 활기를 띠었지만, 이제는 디지털화와 재개발로 인해 그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지난 10월 8일 찾은 충무로 골목에 위치한 일부 인쇄소는 일감이 없어 기계를 돌리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인쇄소 앞에서 만난 한 직원은 “음식점 상권은 살아남고 있지만, 인쇄소는 점차 문을 닫는 중이다. 종이 대신 인터넷을 사용하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혀를 찼다. 또 다른 인쇄소에서 만난 60대 이 모 씨는 “연말에는 관공서에서 발주하는 달력이나 연하장 같은 특수 수요로 잠시 일감이 생기지만, 대부분 시간에는 일거리가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문지민 기자 moon.jimin@mk.co.kr, 조동현 기자 cho.donghyu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0호 (2024.10.16~2024.10.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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