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에 대한 이야기, '갈매기'
체홉의 희곡 <갈매기>에는 유난히 ‘기억’과 관련된 대사나 행동이 많이 등장한다. 3막에서 니나는 곧 떠날 예정인 트리고린에게 “가끔 저를 기억해주세요”라고 부탁하면서 메달을 선물한다. 트리고린은 “기억할 겁니다. 기억하고 말고요. 일주일 전 맑게 갠 그날 당신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날 당신은 밝은 색 옷을 입고 있었고, 벤치에는 하얀 갈매기가 놓여 있었지요.”하고 상세한 디테일을 자랑하며 자신이 그녀를 기억할 것이라고 단언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니나와 갈매기 모두를 잊어버린다.
바로 다음 장면에는 아르카지나와 트레플레프가 등장해 모처럼 애틋한 모자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이어진다. 다친 머리에 붕대를 새로 감아주는 아르카지나의 손길에서 오랜만에 어머니의 따뜻함을 느낀 트레플레프는 다정하게 “어머니 기억나세요? 예전에 어머니가요…”하면서 오래전 엄마와 함께 살았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지만, 아르카지나는 “아니, 기억나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하고, 이후 단절된 이들의 대화는 트리고린 이야기로 돌아오면서 다시금 파국으로 치닫는다.
국립극단이 제작한 <갈매기> 공연에서 연출을 맡은 펠릭스 알렉사는 이 작품에서 자주 반복되는 단어인 ‘기억’과 ‘망각’의 대비, 그리고 이것이 만들어내는 의미를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무대 위에 만들어내고자 한다. 이러한 연출가의 의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4막, 트리고린과 니나의 대사를 통해서이다.
오랜만에 소린의 집을 찾은 트리고린에게 샤므라예프는 “선생님이 저한테 맡기신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언젠가 콘스탄틴이 갈매기를 쏘아 잡은 적이 있는데, 그때 선생님이 그걸 박제로 만들어달라고 맡기셨지요.”하고 옛 기억을 끄집어낸다. 그러나 트리고린은 “기억이 안 나는데요. 기억이 안 나요!”하고 그의 말에 무심히 대꾸한다. 펠릭스 알렉사는 원작의 이 부분에 현미경을 들이댄 듯 확대하여, 트리고린이 “기억나지 않아요”라는 대사를 강박처럼 반복하게 만들었고, 바로 이 대사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했다. 한때 그토록 열망했던 무언가, 그토록 아름답고 열정을 쏟았던 무언가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큰 소리로 반복하는 트리고린의 말투는 함께 로또 게임을 하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무표정하고 기계적인 모습만큼이나 섬뜩하고 무미건조하다.
반면, 이들이 로또 게임을 하고 있는 곳 바로 아래에서는 2년 만에 재회한 니나와 트레플레프가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있다. 3류 여배우로 지방을 전전해야 하는 신산한 삶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로서 사명을 깨닫게 된 스스로의 신념에 대해 이야기하던 니나는 옆 방에 아르카지나와 트리고린이 와 있음을 알고서는 감정적으로 크게 흔들린다. 트레플레프를 떠나기 전, 니나는 마지막으로 “코스챠, 기억나요? 얼마나 따스하고 기쁨에 찬 생활이었는지? 부드럽고 화사한 꽃과도 같던 그 감정들…”이라며 예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나서 다시 “기억나요? 사람들, 사자들, 독수리, 뇌조들…”하고 그 옛날, 코스챠와 함께 올렸던 극중극의 길고긴 대사를 읊조리며 사라진다.
자신이 부탁했던 박제 갈매기에 대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반복하는 트리고린의 외침과, 아득한 기억 속, 순수하게 연극을 꿈꾸던 시절 낭송했던 극중극의 길고 긴 대사를 또박또박 기억해내는 니나의 음성은 그 자체로 ‘기억’과 ‘망각’의 대조를 이루면서 이 작품이 ‘기억에 관한 이야기’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또한 관객들로 하여금,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하며 살고 있는지 잔잔한 질문을 던진다.
공연정보 | 6월 4일부터 29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사진제공 | 국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