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와서야 더욱 명확하게 다가오는 메시지,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감독의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는 2003년 개봉 당시 저조한 흥행성적으로 몇 주 만에 극장가에서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영화였다. 평론가들은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데뷔작” “20년은 일찍 와 버린 영화” “시대를 앞서간 작품” 등 극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비슷한 시기 <살인의 추억> <실미도> <스캔들> 등 강력한 흥행작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냉혹한 시장의 논리 앞에서 <지구를 지켜라>를 지키기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이 작품은 개봉 후 한참 뒤에야 “가장 저평가된 한국영화 중 하나”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등의 평가 속에 재조명되었고, 몇몇 영화관에서는 재상영회를 통해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지구를 지켜라>가 개봉 당시 저평가되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실제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경고와 메시지는 개봉 당시가 아니라,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더욱 선명하고 명료하게 다가온다. 외계인을 믿는 주인공이 엉뚱한 소동을 벌이고, 실제로 외계인이 등장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SF’의 외형을 빌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작품보다 통렬한 시선으로 우리 사회의 비극을 고발하는 사회극에 가깝다. 또한 피식피식 웃음을 자아내는 황당한 설정과 캐릭터, 허를 찌르는 결말 등이 얼핏 ‘블랙 코미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작품은 우리 사회에 대한 지독한 비관으로 가득 찬,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극 중 주인공 병구는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의 인물이다. 2003년 당시 자본과 사회의 폭력 속에서 가족과 연인을 잃고, 벌레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던 병구의 모습은 안타까운 연민을 자아내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극적인 과장과 상상력이 덧붙여진 인물로 보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오늘, 우리 사회 어디를 둘러봐도 곳곳에 수많은 병구들이 고통받고 있다. 그것도 극적인 과장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리얼한 인물로서. 반대로 강만식 사장 같은 존재들도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영화에서 병구와 순이의 끈질긴 공격을 초인적인 힘으로 이겨내고 끝까지 살아남은 자는 강만식이었다. “너희는 절대 나를 못 이겨”라고 단언했던 그의 말대로,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강만식들이 끈질긴 생명력과 힘을 자랑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13년 전의 영화를 무대 위로 가져오면서 조용신 작가와 이지나 연출은 이 이야기가 얼마나 ‘동시대적’인 비극인지 강조하는 장치를 여럿 마련했다. 원래 화학공장 사장이었던 강만식에게 ‘신한당 1번’이라는 명함을 덧붙임으로써 이 인물의 의미를 정치, 경제적으로 확장시켰고, 병구의 연인이 부실공사로 무너진 천정에 깔려 죽은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일련의 실제 사건을 연상시키고 있으며, ‘흙수저’ ‘참빗이끼벌레’ 등의 대사를 의도적으로 집어넣음으로써 이 이야기가 황당한 외계인 이야기도, 오래 전에 개봉된 영화 줄거리도 아닌, ‘지금, 우리’의 이야기임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다만 영화가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을 통해 비극성을 강조한 데 반해, 연극 <지구를 지켜라>는 작품의 블랙 코미디적 요소를 증폭시킴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유머와 웃음이 이야기를 이끌도록 만들었다. 이는 지금 우리 사회의 상황을 생각할 때, 매우 적절한 선택으로 여겨진다. 영화 개봉 당시에는 비현실적으로 느껴 졌던 끔찍한 상황들이 이제는 너무나 일상적인 현실이 되어버린 오늘에 와서, 그 끔찍함을 또다시 재현하기보다는 오히려 한 걸음 떨어져서 쓴웃음을 지은 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즉, 연극 <지구를 지켜라>의 웃음은 이제는 ‘현실’이 되어버린 원작의 상상력에 대한 거리감으로부터 나오고 있으며, 그 거리감은 영화 개봉 당시보다 더욱 비관적으로 변해버린 사회에 대한 아픈 자각에서 비롯되고 있다.
물론 이 거리감을 반짝이는 유머 코드로 변환시킨 작가, 연출가의 뛰어난 감각과 이를 생생하게 구현해낸 배우들의 연기력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무대를 완성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배우들의 열연과 창작진의 노력에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공연 내내 배를 잡고 웃은 뒤에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고통이라는 건 익숙해질 수가 없다”는 극 중 병구의 대사처럼, 아무리 거리를 두고 지켜보려 해도 병구의 눈물이 환기하는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감각은 13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가슴 아프고 쓰라리다.
공연정보 | 5월 29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
사진제공 | 프로스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