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 같았던 국보연구의 선각자
국보의 자취-44
한국 문화재 연구와 박물관 역사의 태동으로 불리는 우현 고유섭의 말년 모습. 병색이 완연하다. /사진=부산근대역사관. |
"창조는 전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역사는 생활의 잔해가 아니라 창조의 온상이며 고적은 한낱 조박(糟粕·술지꺼기)이 아니라 역사의 상징, 전통의 현현(顯現·발현)인 것이다."
한국미술사의 선각자 우현 고유섭(1905~1944)의 대표작인 '송도고적'의 서문에 실린 글귀다. 이 책은 그의 생전에 조판까지 됐지만 결국 출판되지 못했다. 일제의 훼방으로 저자는 끝내 인쇄본을 받아들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만 했다. 제자 황수영(1918~2011·전 동국대 총장)이 해방 직후 드디어 책으로 펴냈다.
구한말 이후 조선의 역사유적과 미술문화재의 학술조사·연구는 일본인 전문가와 학자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일본은 침략정책을 정당화하는 식민정책 일환으로 우리 고적과 유물에 막대한 예산과 인원을 동원해 집중 조사했다. 조선인은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던 분야였고 엄두도 못 내던 황무지였다. 문화유산은 민족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민족의 자부심이다. 고유섭은 독학으로 아무도 가지 않던 조선 유물과 문화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는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해에 출생해 해방 한 해 전 4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한민족의 가장 불행한 시기에 짧은 삶을 살았지만 기적에 가까운 연구업적을 통해 전인미답의 한국미술사를 개척하고 완성해 냈다.
개성부립박물관장 시절 한복 차림의 고유섭. 유족 소장. |
1925년 보성고보를 졸업한 고유섭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여기서 미학·미술학사를 전공한다. 경성제대에서 미학을 전공한 사람은 광복 때까지도 그가 유일했다. 그는 강원도 출생이라는 설도 있지만 소년기를 인천에서 보내고 초등학교도 그곳에서 나와 인천 출신으로 언급된다. 처가도 인천이다. 서울로 유학와 고교·대학을 마쳤다.
개성에서 인생의 전기가 마련된다. 전통적으로 상업이 발달해 부유했고 개방적이었던 개성은 일제강점기 배일기질이 매우 강했다. 1930년대 초 개성지역 유지 모임인 개성보승회(開城保勝會)가 개성부립박물관 설립을 추진하게 된다. 개성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유적을 보존하고 알리려는 목적이었다. 한국 최초의 자발적 향토박물관이었던 것이다. 1929년 촉발된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사정이 열악했지만 넉 달 만에 기와집 30채 값을 모금했다. 개성보승회는 개성 중심부의 자남산 기슭에 건물을 짓기 시작해 1931년 10월 100평 남짓한 본관과 사무동, 관사를 완공한다. 건물은 개성부에 기증돼 11월 5일 박물관을 개관했다.
개성부립박물관. /사진=수원광교박물관. |
초대 관장으로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출신의 이영순이 부임했지만 버티지 못하고 이내 그만뒀다. 박봉의 관장직을 하겠다는 지원자가 나타나지 않아 개점휴업상태가 지속됐다. 1933년 어느 날 29세의 젊은 학자가 관장으로 오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그가 바로 고유섭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유적지를 답사하며 홀로 조선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었다.
고유섭은 관장 부임 이후 일본인 전문가 속의 유일한 조선인 학자로서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한국 고유의 미의 본질을 찾는 데 몰두했다. '진단학보'를 비롯한 학회지와 신문·잡지에 발표된 약 150편의 연구논문, 유적조사, 답사기, 연구여담, 화가론, 시평, 해설, 수필 등 방대한 저작을 쏟아냈다. 그 밖에도 캐비닛 하나를 가득 채울 만한 분량의 미발표 유고 뭉치와 조사노트도 남겼다. 이러한 결과물은 제자 황수영이 보관했다가 해방 직후부터 송도고적(1946)을 시작으로 조선탑파의 연구(1948), 조선미술문화사논총(1949), 고려청자(1954), 전별의 병(1958), 한국미술사급 미학논고(1963), 조선화론집성(1965) 등 순차적으로 출판됐다.
그는 석탑과 불교조각 등 불교미술을 연구해 시대별 양식적 변화와 특징을 처음으로 정리했다. 한국 회화사를 학술적으로 집대성했으며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한 도자기 이론도 체계화했다. 이러한 결과물은 지금도 능가하기 힘든 업적으로 평가된다.
열정적으로 연구에 매진하던 고유섭은 1944년 급성간경화로 쓰러졌다. 관장을 맡은 지 11년째 되던 해였다. 몇 년 전에도 병석에 누웠지만 곧 회복했다. 이번에는 일어나지 못했다. "정화수 떠놓고 기도나 하라"고 농담을 건네던 그는 봄꽃이 만발하던 4월 26일 타계했다.
고유섭은 민족문화재의 재인식과 민족적인 미술사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발품을 팔아 문화유적을 답사하고 글을 써서 세상에 알린 문화유산답사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끊임없이 현장을 찾아 실물을 확인하고 문헌을 통해 보충하는 실증적 연구를 실천했다. 춘원 이광수는 역사소설을 쓸 때 정확한 고증을 위해 고유섭과 함께 답사를 다녔다. 답사에서 얻은 결과로 역사책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았다. 그에게 답사는 곧 고증이었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태도에 감명받은 열렬한 후계자들이 나타났다. 혜곡 최순우(1916~1984·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황수영, 진홍섭(1918~2010·전 이화여대 교수) 등 3인의 젊은 학도들이었다. 1934년 송도고보 졸업반이던 최순우가 제일 먼저 제자가 됐다. 문학도를 꿈꾸던 최순우는 우연한 기회에 박물관을 찾았다가 그의 학문관을 듣고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최순우는 이듬해 송도고보를 마치고 고유섭의 주선으로 개풍군청 고적계에 들어가면서 문화재 분야에 발을 본격 내디뎠다. 1940년대 초반 각각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와 메이지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교편을 잡고 있던 황수영과 진홍섭이 합류했다. 두 명은 고유섭과 전국의 불교유적지를 조사하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스승의 사후 학도들은 모두 한국미술사의 전문가로 성장, 활약하면서 학계 발전의 중심 역할을 했고 그들 밑에서 숱한 제3세대 연구학도들이 배출됨으로써 한국미술사학계의 근간을 형성했다. 고유섭은 인천 출신이었지만 3명의 학도는 모두 개성 출생이다. 세인들은 개성 출신의 고유섭 제자 3명을 특별히 '개성학파 3인방' '개성 3걸'이라 칭한다.
[배한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