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이곳]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당일치기 여행
하늘 위에서 바라 본 한라산 정상 백록담에 핀 상고대. [사진 제공 = 공항사진기자단] |
"코로나 때문에 앞으로 비행기 타는 것도 어려울 듯하고. 내 나이 80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쩌면 이번이 죽기 전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청했어요."
그랬다. 코로나19는 여행을 꿈꾸는 이에게 희망보다는 절망을 전하고 있다. 여전히 국내 확진자가 세 자릿수를 보이고 있고, 미국이나 유럽은 숫자를 확인하기 무서울 정도로 확산세가 거세다. '죽기 전에'란 표현이 허투루 나온 말이 아니란 얘기다.
"더구나 '하늘 위 호텔'인가 하는 비행기라고 하기에 더 끌리더라고요. 내가 언제 타보겠어요. 그런 비행기를."(호호호)
'A380 한반도 일주비행.' 침체기에 빠진 여행 업계에 잠시 숨통을 터주는, 마치 아이디어 상품 같은 존재로 최근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른바 '관광여행' 또는 목적지 없는 비행(Flight to nowhere)이나 스카이라인 투어(Skyline tour)로 부른다.
한마디로 이 여행은 이륙과 착륙하는 곳이 같다. 되돌아온다는 얘기다. 이 여행 상품은 고작 20분 만에 전석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심지어 '비즈니스석+숙박 상품'은 다 팔리는 데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도대체 그 마력에 가까운 매력이 무엇일까.
지난달 24일. 8개월 만에 찾은 인천국제공항. 북적거려야 할 공항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사실 출발 전부터 이상 조짐을 감지했다. 공항버스가 대폭 운행을 줄인 탓에 아침발 비행기 시간을 맞추려면 다른 교통편을 찾아야 했다. 이번 관광비행 프로젝트를 위해 여러 회사가 힘을 모았다. 비행은 아시아나항공, 예약 진행은 하나투어, 숙박을 겸한 호캉스는 파라다이스시티와 네스트호텔, 그리고 프로모션은 싱가포르관광청이 주관했다.
싱가포르관광청 한국사무소를 담당하고 있는 서린 운(Serene Woon) 소장은 "한국은 싱가포르 관광 입국 10위 안에 드는 중요한 마켓인데 최근 코로나19 여파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며 "이번 행사를 통해 싱가포르의 다양한 매력이 선보이길 바라고, 아울러 이른 시일 내에 많은 한국 관광객이 싱가포르를 찾을 수 있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비행기 탑승까지는 평소의 국내선 이용과 다름없었다. 다만 2m까지는 아니지만 어른 팔 너비만큼의 거리 두기를 최대한 유지하고, 2~3차례 체온을 재는 과정 등이 보통 때와는 조금 달랐다.
드디어 A380에 들어섰다. 매캐한 항공유 타는 냄새와 비행기 특유의 공기 내음이 먼저 코를 자극했다. 평소였다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그 냄새마저 반가웠다. 이내 기내 방송이 귀에 꽂혔다.
"손님 여러분, 코로나19 장기화로 얼마나 지치고 힘드십니까. 오늘 이 비행은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가는 여행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되살리고,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지치고 메마른 몸과 마음의 활력을 드리고자 계획됐습니다."
'잊혀가는 여행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되살리려 한다'는 부분에서 순간 울컥했다. 짧다면 짧은 이 순간의 여행이 그토록 사무쳤던 이유가 떠올라서다. 바로 그리움이다. 그 그리움 때문에 목적지가 없더라도, 잠시 하늘만 돌다가 오더라도 이 여행을 하고 싶었던 것이니 말이다.
이날 우리는 인천에서 강릉 상공을 순회한 후 기수를 남쪽으로 틀어 포항~김해~제주 상공까지 둘러본 다음 다시 인천에 내리는 2시간의 여정을 함께했다. 기체가 동해와 가까워질수록 창을 통해 보이는 강원도의 울긋불긋한 단풍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 매번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단풍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마치 명품 유화를 보는 듯했다. 단풍 융단은 포항 근처로 갈수록 옅어졌다. 일반 비행 때보다 기내방송이 자주 나왔다. 주요 지역이나 명소를 지날 때마다 살뜰한 소개가 이어졌다. 그 안내의 하이라이트는 제주에 다다랐을 때였다. 방송을 듣자마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졌다. 바로 한라산 백록담을 마주하는 때였다.
"바깥을 잘 주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좌측으로 앉아 계시는 손님께서는 한라산 정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한라산 백록담이 보입니다."
정말 찰나로 지나가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다행히 한 번 더 백록담을 볼 기회가 왔다. 흡사 한라산을 기점으로 해 한 바퀴 도는 듯 이번에는 오른쪽 창가 쪽에 앉은 이에게 백록담이 보였다.
"기장입니다. 머지않은 날에 코로나19가 종식되기를, 그리고 우리를 떠났던 여행도 일상도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기를, 그리고 그날에 손님 여러분을 이 비행기에 다시 모시고 함께 여행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좌석등이 꺼졌는데도 누구 하나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못내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이 아쉬워서인지 '빨리빨리'를 좋아하는 한국인이 이 순간만은 '느릿느릿'으로 바뀐 듯했다. 하차하다가 탑승할 때 '곰 세 마리' 노래를 불렀던 꼬마를 만났다. 기분이 꽤 신나보였다. 여행은 역시나 즐거움이다. 희망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은 그리움이다.
[장주영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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