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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한 적막, 먹먹한 산책… 이 길은 언제쯤 넉넉한 ‘숨’을 쉴까

1일 개방 ‘DMZ 평화의길’ 철원 구간을 가다


한국전쟁 당시 스무 번도 넘게 주인이 바뀌었던 격전의 땅

포성 멎은 지 오래지만 전적비 옆 시계는 지금도 ‘6시25분’이다


북에서 남으로, 다시 북으로 흐르는 역곡천엔 경계 없는 초록의 향연

70년 미답의 땅에 열린 길, ‘코앞’에 마주 선 GP와 ‘미완의 평화’

철조망이 사라지는 상상…이 길 꼭 닮은 ‘저 길’을 걷고 싶다

경향신문

강원도 철원군 ‘DMZ 평화의길’에 조성된 공작새능선 조망대에서 취재진이 철책선 너머 비무장지대를 바라보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27일 평화의길 고성 구간을 1차로 개방한 데 이어 오는 6월1일부터 철원 구간을 민간에 개방한다. 사진공동취재단

70년 가까이 민간인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비무장지대(DMZ)를 밟았다. 그곳은 모순의 땅이었다. 녹음 짙은 산천은 더없이 아늑했지만 철조망 너머로 팽팽히 대치한 현실의 긴장감은 여전했다.


6월 1일 개방에 앞서 언론에 먼저 공개된 ‘DMZ 평화의길’ 철원 구간에 지난 22일 다녀왔다. 정부는 DMZ와 연결된 고성·철원·파주에 평화안보 체험여행을 할 수 있는 둘레길을 만든다고 지난달 밝혔다. 남북정상회담 1주년에 맞춰 4월27일 고성 구간이 먼저 문을 열었고 이번에 개방하는 철원 구간이 두 번째다. 철원 평화의길은 도보 구간 3.5㎞를 포함해 총 15㎞로 둘러보는 데 3시간쯤 걸린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싸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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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조망대에서 바라본 역곡천.

DMZ 탐방은 백마고지 전적지에서 시작한다. 백마고지 휴게소에 도착해 자작나무와 태극기가 도열한 오르막길을 오르면 844명의 국군 희생자를 모신 위령비가 먼저 나온다. 백마고지는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였다. 국군 보병 9사단과 중공군 3개 사단은 1952년 10월6일부터 15일까지 총 12차례에 걸쳐 백마고지를 쟁탈하기 위해 맞붙었다.


처절한 포격전과 수류탄전, 백병전이 계속되는 동안 고지 주인이 스무 번도 넘게 바뀌었다. 열흘 동안 양쪽이 쏟아부은 포탄은 27만발이 넘었다. 영화 <고지전>이 이 전투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다.


해발 395m에 불과한 야산을 점령하려 그토록 처참하게 싸운 것은 백마고지가 철원평야를 낀 중부 전선의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백마고지라는 이름은 포격으로 수목이 다 쓰러지고 헐벗은 산의 형상이 누운 백마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었다. 전투에 승리한 9사단은 백마부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위령비를 지나면 나오는 기념관에는 백마고지 전투의 개요가 일목요연하게 설명돼 있다. 기념관 뒤로는 양 손바닥을 모은 형상의 전적비가 서 있다. 전적비 높이 22.5m의 숫자를 더한 9는 9사단을 뜻한다. 전적비 옆 시계탑은 전면과 좌우측에 각각 세 개의 시계가 멈춰 있는데, 전면 시계는 한국전쟁 발발일을 뜻하는 6시25분에 고정돼 있다. 전적비를 지나 커다란 종이 있는 언덕배기에 서면 백마고지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백마고지 오른쪽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고암산 높은 봉우리는 김일성이 직접 고지에 자리 잡고 군을 독려한 장소이기도 하다.

꾸미지 않은 자연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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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머리고지 위에 자리 잡은 감시초소(GP)에선 군사분계선과 북한군 초소가 손에 닿을 듯 보인다.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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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비가 서 있는 언덕을 내려와 1.5㎞ 구간은 차량으로 이동한다. 군 호위차량이 앞장섰다. 일행은 남방한계선 바로 앞에 자리 잡은 백마고지 조망대에서 하차했다.


바로 앞 산꼭대기에 요새처럼 버티고 선 국군 감시초소(GP) 건물 위로 태극기와 유엔사령부 깃발이 휘날렸다. 철책선 너머로 작은 다리와 굽이쳐 흐르는 역곡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개천 주위로 잡목이 무성했다. 오랜 세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흔적이 역력했다. 햇빛에 누렇게 타들어간 천변의 수풀과 주변 산의 푸른빛이 묘한 조화를 이뤘다. 꾸미지 않은 자연의 색감에 눈이 편안해졌다.


백마고지 조망대부터 3.5㎞는 남방한계선 철책을 따라 걸어서 이동하는 코스다. 철책 너머 DMZ 풍경이 길동무다. 북에서 발원해 DMZ 이남으로 흘러 넘어왔다가 다시 북으로 돌아간다 해서 이름이 붙은 역곡천은 내내 오른쪽에서 함께 달렸다. 초여름치고는 햇살이 강했다. 언덕길을 내려갈 땐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10분쯤 걷자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군사지역 특성상 길가엔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들었다. 짙은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역곡천 물에 그만 뛰어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무리 지어 경계를 따라 걸으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는데 눈앞에서 뭔가 번쩍 하고 빛났다. 군인들이 경계등이라고 부르는 조명탑의 철제 구조물이 태양을 반사하고 있었다. 30여m 간격으로 늘어선 조명탑이 꼭 보초 서는 병정들 같았다. 철조망 너머 친숙했던 풍경이 다시 서먹해졌다.

눈앞의 철책선이 없다면…

도보 구간은 공작새능선 조망대에서 끝났다. 언덕배기에 새로 만든 나무데크 전망대 위에 오르자 지금껏 철책선 따라 걸어온 길과 구불구불 이어진 역곡천이 한눈에 들어왔다. 측면에서 바라본 백마고지는 왼쪽 머리부터 오른쪽으로 몸통과 꼬리 부분까지 누운 말의 형상이다.


DMZ는 군사분계선(MDL)을 기준으로 남북 각각 2㎞에 이르는 구간을 말한다. 사람의 출입이 통제되며 생태계가 잘 보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역곡천엔 천연기념물인 어름치를 비롯해 다수의 1급수 어종이 서식한다고 한다. 고라니와 멧돼지가 무시로 출몰하고 까투리가 꺼병이 여러 마리를 데리고 느긋하게 산책하는 모습도 종종 목격된다. 동행한 김미숙 문화관광해설사가 “바로 앞에 저 철책선이 없다고 상상하고 눈앞의 경치를 한 번 바라보라”고 주문했다. 고요하고 어쩌면 적막하게도 느껴지는 풍경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전쟁으로 지금은 마을이 다 사라져버렸지만 과거 철원읍 주민들은 역곡천에서 천렵을 자주 했다고 한다. 하천의 가장자리로 형성된 동굴에서 놀았던 추억이나 주상절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회상하는 노인들도 여전히 많다. 옛날이야기를 듣는 동안 바람결 따라 달콤한 꽃향기가 실려왔다. 둘러보니 아카시아 흰 꽃이 지천에 피어있었다. 민통선 안에서 농사짓는 농부들이 논 옆에 벌통을 가져다 두면 벌들이 제멋대로 DMZ를 넘나들며 꿀을 나른다고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DMZ 아카시아꿀은 특유의 진한 향 덕분에 찾는 이가 많다고 한다.

평화의길과 친일 시인의 부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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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출발한 차량은 통문 앞에서 멈춰섰다. 일행 모두 내려서 신분을 확인하고 휴대전화를 제출했다. 기자들은 취재를 위해 카메라 소지가 허용됐지만 향후 탐방객들은 카메라 포함 일체의 정보통신장비나 기록장비를 휴대할 수 없다고 했다. 통문 앞 경고판에는 “승인된 자만 출입하며 근무자의 통제에 응해야 함. 불응자는 체포 및 사살”이라고 적혀 있었다. DMZ 안으로 들어간다는 실감이 났다.


방탄복을 입은 군인들이 이중으로 굳게 잠긴 철문을 열어젖혔다. 자동차는 비마교라는 작은 다리를 건너 곧장 화살머리고지로 향했다. 주변 풍경에 감탄할 새도 없이 “군사분계선 1.7㎞”라고 쓰인 표지판이 다시 몸을 긴장시켰다. 화살머리 모양처럼 삼각형으로 생긴 281m 고지 위에 GP가 있었다. 벙커로 된 건물 1층엔 지난 4월부터 진행된 화살머리고지 유해발굴작업에서 수습된 유품이 전시돼 있었다. 흘깃 봐도 너댓개의 총탄 자국이 난 철모, 수십개의 구멍이 뚫려 너덜너덜해진 수통이 전쟁의 참혹함을 웅변하고 있었다.


2층 전망대에 오르자 북쪽 산봉우리마다 인공기가 게양된 북한군 GP 4곳이 선명하게 보였다. 북한군 GP와 군사분계선이 모두 1~2㎞ 안에 있으니 그야말로 ‘코앞’이었다. 가까운 거리는 바로 옆에서 삼엄한 경계를 서는 군인들의 모습과 대비되며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철원 평화의길은 분단 후 처음으로 DMZ 안 깊숙이까지 민간인의 출입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특별하지만, 이름 그대로 평화의 분위기를 느끼기엔 아쉬움이 남는 길이기도 하다.


코스와 구성이 기존 안보교육과 크게 차별화되지 않는다. 백마고지 기념관 벽에 새겨진 모윤숙의 시 ‘백마의 얼’도 평화와 통일의 새 시대를 상징하는 평화의길과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모윤숙은 대표적인 친일 시인이다. 반공 이념을 강조하기 위해 친일파건 독재 부역자건 가리지 않고 떠받들어 정권 안보에 활용했던 지난 세기의 추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평화의길을 탐방하려면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걷기여행 홈페이지 ‘두루누비’(www.durunubi.kr)나 행정안전부 DMZ 통합정보시스템인 ‘디엠지기’(www.dmz.go.kr)를 통해 방문 신청을 해야 한다. 만 10세 이상이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날짜와 코스(철원·고성), 회차를 선택하고 신청서를 작성·제출하면 추첨으로 참가자를 선정한다. 철원 구간은 주 5일(화·목 휴무), 오전 10시와 오후 2시 두 차례, 회당 20명씩 탐방을 진행할 예정이다.


철원 |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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