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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의 비일상’ 매일 타는 전철이 여행이 됐다

전철 타고 서울·수도권 673개 전역 여행한 블로거 ‘kepper’

경향신문

‘이렇게 여행하면 안돼요’를 운영하는 블로거 kepper는 시간이나 경비 같은 제약에서 ‘전철여행’을 떠올렸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재래시장의 활기를 싸고, 건강하게,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 전철여행이다. 이 여행은 삶에 새로운 공간을 각인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거창하고 여유롭지는 않지만

꾸준히 다닐 수 있는 전철여행”

기억에 남는 곳은 ‘신설동 폐역’


재래시장·기사식당 찾아 맛 기행

주거지선 집 구경·허허벌판 걷기

숨은 여행지 찾기도 또 다른 재미


전철을 타고 가다 노선도를 보며 ‘전철여행’을 떠올렸다. 2017년 11월 어느 날이다. 지하철 2호선 신설동역 폐역인 일명 ‘유령역’에서 경의중앙선 문산역과 연결되는 셔틀전동열차 종착역인 임진강역까지 여행기를 실었다. 임진강역 여행기 작성일인 7월27일 현재까지 서울과 수도권 673개 전역 주변을 여행했다.


‘이렇게 여행하면 안돼요(kepper.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 ‘kepper(케퍼)’ 이야기다. 역 주변 랜드마크에서 동네 사람들이 찾는 근린공원까지, 유명 맛집에서 무명 기사식당까지 찾아갔다. 볼거리가 없으면 주택가, 벌판을 돌아다녔다. 직접 보고 맛본 곳을 일기 쓰듯 담담하게 적어 사진과 함께 올렸다.


서울과 수도권 모든 역을 섭렵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동네 사람들이나 찾는 작은 백반집까지 들러 기록을 남겼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지도를 만들어 마우스만 갖다 대면 해당 역 주변 여행기를 보도록 했다. 날짜·역명·호선별로 들여다볼 수 있다. 키워드 검색도 가능하다. 이 블로그에서 ‘국밥’이나 ‘박물관’을 검색하면 전철 따라 ‘국밥여행’이나 ‘박물관여행’ 동선을 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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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역 - 3500원 국밥

kepper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보잘것없는 글이 부끄럽고, 익명에서 벗어나기 두렵다”는 답이 왔다. 대신 e메일 문답엔 응했다. 자기 소개를 부탁하자 “남들처럼 여행을 좋아하는 평범한 30대”라고 했다. ‘kepper’는 ‘keeper’의 오타다. 무심코 낸 오타가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지금까지 쓴다고 했다.


왜 전철일까. 그는 운전면허 소지자인데 “제 손과 발을 믿지 못해서 버스나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 여행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거창하고 여유로운 여행을 꿈꾸지만 시간이나 경비 등 현실적인 제약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제약 속에서 꾸준히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내놓은 답이 전철여행”이라고도 했다.


‘이렇게 여행하면 안돼요’는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려던 계획이 폭풍 때문에 어그러지는 등 돌발상황이 더 기억에 남아 지은 블로그 이름이다. 다른 이들의 여행은 기대대로, 계획대로 진행되길 바라는 마음도 담았다.


궁금한 건 기억에 남는 여행지다. kepper는 우선 ‘유령역’이라 불리던 신설동 폐역을 꼽았다. 이 역은 2017년 10~11월 주말에만 예약제로 일반인 관람을 받았다. 그는 “과거 자취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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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역 - 서호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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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역으로 일단 마침표를 찍고 나서 블로그에 올린 소회 글엔 화서역 부근 서호공원을 넣었다. 조선 정조 때 화성 축성과 더불어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저수지가 효시다. 수원시가 산책하기 좋은 곳으로 꼽은 곳이다. 서호낙조(西湖落照)는 수원팔경 중 하나다.


“몸이 고생하면 기억에 남는다”며 꼽은 곳은 남한산성이다. 마천역에서 출발해 가파른 등산길을 고생하며 올라갔는데, 성곽은 보수 중이었다. 안개까지 자욱해 사진도 찍지 못했다. 망월사는 망월사역 이름과 달리 동떨어진 곳에 있어 걸어가느라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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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티역 - 영동스낵카

블로그엔 맛 기행 글도 많다. 공항시장역 옆 공항시장 순댓국, 면목역 옆 동원시장 ‘닭도리탕’(닭볶음탕), 등촌역 옆 목동깨비시장 탕수육 등 재래시장에서 싼값에 배불리 먹은 음식이 많다. 그는 “여행 경비를 줄이면서도 배 부르게 먹고 싶어 기사식당도 여러 곳 가봤다”고 말했다. 그중 하나가 한티역 부근 영동스낵카다. 지난 4월1일 문을 닫는다는 소리를 듣고 부랴부랴 찾았다고 한다. 영동스낵카는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역삼역 부근에서 1978년부터 운영한 강남스낵카도 찾았다. 서울에 유일하게 남은 스낵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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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역 - ‘고인돌’ 있는 공원

숨은 여행지도 찾곤 한다. 지석역 근처 지석2공원은 아파트촌의 평범한 근린공원으로 보이지만, 용인 상하동에서 발굴된 고인돌을 이전한 곳이다. 역세권에 주거지밖에 없으면 집들을 구경하며 다녔다. 허허벌판에선 사람 사는 곳까지 걸어갔다. 그는 “어떻게든 여행의 재미를 찾아 돌아다녔다”고 말했다. 박물관을 좋아해 역 주변 박물관은 거의 빠짐없이 다녔다.


Kepper는 구의역에서 새벽 식사를 한 뒤 뚝섬유원지역 광진 둘레길, 양원역 중랑캠핑숲, 한양대역 살곶이다리 등 11개 역 주변을 다닌 적이 있다고 한다. 보통은 역 4곳을 묶어 다녀왔다. 서울에선 역과 역을 주로 도보로 이동했다. 하루 1만보 정도 걸었다. 경기도에선 버스로 환승하며 다녔다. 인천을 여행할 때는 인천교통공사에서 발행하는 한 달 정기권을 구입해 이용했다.


임진강역 여행기는 쉼표라고 했다. 대전, 광주, 부산 등 다른 지역 전철여행도 가려 한다. ‘전철여행’이 무엇인지 물었다. “일상 속의 비일상”이라고 말했다. 전철 타기 같은 일상 행위가 삶의 새로운 장소 같은 비일상 이벤트를 가져다준다는 취지의 말이다.

하남선 타고…팔당 품은 수변공원·유니온타워 ‘동네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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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 팔화수변공원, 풍산정, 유니온 파크 해적선과 전망대 타워, 스타필드의 존 레넌 밀랍 인형(왼쪽 사진부터).

전형적 신도시 풍경에 당황도 잠깐

강길·호수길 주민들처럼 거닐며

쇼핑몰서 존 레넌 밀랍 인형 관람도


여행 블로거 ‘kepper’의 맥을 일회성이나마 잇기로 했다. 최근 개통한 하남선을 찾았다. ‘하남 여행’을 검색해보니 검단산이니 이성산성이니 미사리경정공원이니 하고 뜬다. 9일 오후 늦게 하남선 종착역인 하남풍산역에 도착했다. 2번 출구 밖으로 나오자 대형마트와 아파트, 네거리 등 신도시의 전형적인 역 풍경이 드러났다. 갈 길을 잃었다. 이 상황에 맡기자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마주친 주민 A씨에게 물었다. 그는 “2번 출구에서 근린공원을 거쳐 유니온타워 전망대로 가면 된다. 팔당 팔화수변공원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이 동네엔 유흥시설은 없고, 편의시설은 많다. 주택가 곳곳이 공원”이라고도 했다. 하남 일대 아파트값이 계속 상승 중이란 언론 보도가 떠올랐다.


A씨가 알려준 동선대로 길을 걸어갔다. 3호근린공원 시각공원에서 나눌도서관 부근 언덕배기에 올랐다. 솔밭 너머 희뿌연 운무가 감악산 정상과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어린이 6호공원을 지났더니 꽤 큰 규모의 수변공원이 나타났다. 풍산정(豊山亭)이란 누각도 놓였다. 덕풍리의 온천마을과 황산마을 일부를 각각 통합하면서 두 마을 이름에서 한 글자씩 떼어 ‘풍산동’이라고 했다고 한다.


유니온타워 전망대에서 하남 일대를 조망하리란 기대를 안고 계속 걸었다. 구글 여행 정보엔 ‘영업 중’ ‘9시까지 영업’이라고 떴다. 웬걸. 월~금 오후 5시까지만 문을 열었다. 팔당 팔하수변공원은 ‘아름다운 물결과 모래로 이루어진 섬’이란 뜻을 지닌 하남 ‘미사(渼沙)’의 일단을 보여주는 듯했다. 긴 장마에 지친 주민들이 공원으로 나와 강길을, 메타세쿼이아길을, 호수길을 걸었다. 미사대로와 덕풍천이 만나는 덕풍교 쪽은 요충지였다. 나무고아원, 산곡천으로 이어지는 위례강변길, 남한산성으로 가는 위례둘레길, 팔당댐으로 연결되는 위례사랑길이 이곳에서 만났다.


하남역사박물관(hnart.or.kr/museum)은 들르지 못했다. 홈페이지에서 구석기·청동기 유물 정보와 수십년 전 허허벌판의 하남 일대 이미지 등을 볼 수 있다. 박물관은 ‘한강과 전쟁’전을 9월27일까지 진행한다.


전망대가 문을 닫아 간 곳이 스타필드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일대를 조망하고 싶었다. 건물 앞 별마당 둘레길 벤치에 앉으니 팔화수변공원 너머로 적갑산, 예봉산, 예빈산, 덕소역과 도심역 주변 일대 아파트가 드러났다.


물이 떨어져 음수대 물이라도 먹으려고 쇼핑몰 안에 들어갔다. ‘월드 셀러브리티 밀랍 인형 특별전’(29일까지)이 열렸다. 김연아, 박지성, 박찬호 같은 한국인 스타와 톰 크루즈, 오드리 헵번, 마이클 잭슨 같은 외국인 스타들이 몰 곳곳에 서 있었다. 마이클 잭슨 옆 인형은 존 레넌이었다. 그의 뉴욕 시절 하면 상징처럼 떠오르는 ‘5달러짜리 뉴욕시티’ 티셔츠와 청재킷, 청바지를 입은 1974년 모습으로 재현됐다. 거대 쇼핑몰에서 ‘무소유를 상상하라’는 1971년 작 ‘이매진’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하남풍산역으로 돌아가는 길 송창식과 윤시내가 미사대로변 라이브 카페에서 공연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글·사진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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