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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경향신문

이성과 본능의 절묘한 화해…‘저당 마라 소스’의 비밀

[언어의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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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요즘 그거 먹고 살 빠졌잖아.” 귀를 쫑긋하게 하는 친구의 발언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오트밀에 우유, 과일, 견과류를 넣고 냉장고에서 숙성시킨 후 먹으니 살이 빠졌다는 그의 간증에 이끌려 레시피를 몇개 찾아보니 카카오 가루를 넣으면 더 달콤하게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카카오를 먹고도 살이 빠질 수 있다고? 신이 나서 오트밀과 카카오를 주문하고 인증 사진을 친구에게 보내니 답이 바로 날아온다. “야! 카카오도 저당으로 사야 돼!” 저당 카카오라니. 그렇다. 지금은 분명 ‘저당’이 대세인 시대다.


식품 앞에 ‘제로’와 ‘저당’이라는 키워드가 붙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 것처럼 뺄셈의 언어가 식품계를 장악 중이다. 혈당과 식습관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높아지면서 마트 양념 코너 주요 진열대에 놓인 제품들은 대부분 ‘저당’ ‘제로’ ‘프리’라는 키워드와 함께다. ‘양념’의 역할은 ‘입맛’을 돋우는 것. 그 엄청난 임무를 당도, 설탕도, 나트륨도 없이 해내겠다는 포부가 너무 당차다.


그중 가장 당찬 포부를 보여주는 제품은 ‘저당 마라 소스’다. 과연 ‘마라’ 앞에 ‘저당’이라는 접두사를 붙여도 될까, 하는 의심도 잠시, 최근 선물받은 밀크티의 맛 이름이 ‘저당 악마 초코’임을 떠올린다. ‘저당 마라 소스’ ‘저당 악마 초코’는 현대인의 욕망 충돌을 너무나 잘 함축하는 키워드다. 모든 것이 가속화되지만 노화만은 저속이길 바라며 로켓배송으로 저속노화 즉석밥을 주문하는 나. 사각사각 ASMR 쇼츠 콘텐츠를 한 시간 동안 보며 힐링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는 디톡싱에 중독된 내 모습만 봐도 그렇다. 이성과 본능쇼, 무절제와 자제, ‘추구미’와 ‘도달가능미’, 욕망과 현실 간 괴리와 충돌에서 균형점을 찾아 방황하는 우리에게 ‘저당 마라’ ‘저당 악마 초코’의 출현은 유쾌한 모순이면서도 신선한 대안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저당 마라’와 ‘저당 악마 초코’를 찬찬히 곱씹어보자. ‘저당’은 결코 모순과 대안의 언어가 아니다. 저당 요거트, 저당 두유 정도에서 머물 수 있었던 이 키워드는 ‘마라’라는 드높은 목표를 향해, ‘악마 초코’라는 야심 찬 고지를 향해 달려갔고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한 그 도전은 결국 성공했다. 그러니까 ‘저당’은 마라를 포기하지 않는, 초코를 외면하지 않는 희망과 집념의 언어이면서 스스로의 한계를 끝없이 돌파하는 혁신의 언어다. 글루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에게 ‘글루텐 프리’가 ‘희망’의 신호이며, 유당불내증을 가진 사람들에게 ‘락토 프리’가 구원인 것처럼 ‘저당’은 마라와 초코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행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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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포기하지 말라는 응원이 진부한 부담으로 들릴 때가 있다. 희망을 가지라는 말이 효과 없는 영양제처럼 부질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더 괴로운 건 무엇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나의 욕심이 모든 걸 그르치는 것 같아 스스로에게 ‘더 내려놓으라고’ 다그칠 때다. 그럴 때마다 나를 일으키는 건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가르쳐주는 도전의 발자국들이었다.


‘저당’과 ‘프리’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좀 더 오래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유연한 도전의 사고방식이다. 살짝 굽히고 접힐지라도 구불구불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만든 새로운 길이 있다는 것을 ‘저당’이 알려준다. 다행히도 구불구불한 길을 걷는 일은 꽤 재밌다.


정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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