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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없는 차별은 아직 덜 나쁠 뿐…뿔 난 악마의 공모자가 될 수 있다

위근우의 리플레이

광주행 여권과 복도식 아파트…해맑은 ‘차별의 언어’들


별 뜻 없이 한 농담과 편집 실수?

차별적 맥락에 너무 둔감했다

의도의 순수성만을 따질수록

혐오주의자가 올라탈 공간을 준다

무엇을 잘못한지 모르는 사과는

그래서 공허할 수밖에 없다


살고 있는 아파트 평수 하나로

아이들끼리 계급이 나뉘는 현실

복도식을 붉고 굵게 강조하고

비하 의미가 없었다는 건 무책임

해맑은 특권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평등을 위한 첫걸음이다


해맑은 차별이 문제다. 지난 7월25일, SBS 스포츠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ㅇㅈTV>에 출연한 프로야구 해설가 안경현은 KIA 타이거즈의 진갑룡 코치와의 전화 연결 후 KIA의 연고지인 광주에 대해 “난 광주 못 간다. 가방에 항상 여권 있다. 광주 가려고”라 발언했다. 안경현이 정확히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광주에 가는 데 여권이 필요하다는 농담은 광주, 정확히는 전라도를 자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일간베스트 저장소’(이하 일베) 같은 극우 커뮤니티에서 사용되는 지역차별 발언이기도 하다.

광주행 여권

경향신문

지난 25일 SBS 스포츠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ㅇㅈtv> 에 출연한 프로야구 해설가 안경현은 KIA의 연고지인 광주에 대해 “난 광주 못 간다. 가방에 항상 여권 있다. 광주 가려고”라 고 발언해 지역차별 논란을 불렀다. <ㅇㅈtv> 방송 화면 캡처

해당 발언이 논란이 되자 <ㅇㅈTV>에선 영상을 비공개로 전환했고, SBS 스포츠 측은 “안경현 해설위원은 KIA 타이거즈의 광주 구장 경기를 더욱 자주 중계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달하고자 했으나, 멘트가 편집되는 과정에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겼습니다. 부적절한 표현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하고 여과 없이 노출한 점 또한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습니다”라고 사과문을 올렸다. 안경현 본인도 엑스포츠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방송에서 백 번은 얘기했을 거다. 해외여행처럼 가기 어려워 (광주) 갔으면 좋겠다고 장난식으로 농담을 많이 했다”고 비슷한 요지의 해명을 했다. 그가 굳이 본인의 일베 활동을 방송에서까지 인증하려 했다는 것보단 해당 해명이 진실일 확률이 좀 더 높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가 어떤 의도로 여권 운운했느냐는 것이 아니다. 나쁜 의도 없이, 그의 말을 빌리면 “광주는 재밌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을 수 있어 좋아한다”는 의도였다 해도 그것이 본인이 좋아한다 했던 바로 그 지역에 상처가 될 수 있다. 안경현과 SBS 스포츠가 비판받아야 한다면, 그들이 일베라서가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 특정 발언이 사용되는 차별적 맥락에 너무나 둔감했기 때문이다.


SBS 스포츠 측은 해당 발언에 대해 “전체적인 맥락이 생략되는 실수”를 인정하며 “속내를 잘못 해석될 수 있게 편집한 부분”과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한 것에 사과했다. 그들 말대로라면 특정 발언을 앞뒤 맥락 자르고 지역비하로 몰아가는 것이 말 그대로 ‘불필요한 오해’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바로 그 ‘맥락’을 따져보자. 굳이 일베까지 가지 않더라도 포털의 정치나 스포츠 기사에서 ‘7시 그 지역’이나 ‘전라공화국’ ‘전라자치도’ ‘전라디언’처럼 호남지역을 철저한 타자로 배제하는 지역차별의 언어들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박정희 군부 독재 시절과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을 거치며 40년 가까이 누적된 호남에 대한 배제와 차별의 경험은 동시대 혐오 세력에 의해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이것이 여권 발언이 지역차별로 해석되는 화용론적인 맥락이다. 시민사회는 옆의 동료 시민이 이러한 해석의 맥락과 윤리적 합의를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다는 믿음 위에서 지탱된다. 잘못은 믿음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그 믿음을 깬 이들이 저지른 것이다. 이것은 무지의 문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처럼 해맑은 무지는 폭력적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위치로부터 비롯된다. 적어도 현존하는 차별과 혐오의 문제에서 해맑을 수 있는 건 특권이다.


해맑은 차별의 언어가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혐오와 결과적으론 동일하게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광주를 가고 싶어 여권이 필요하다고 웃으며 말한 야구 해설가는 뿔 난 악마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들은 바로 그 악의 없음 때문에 차별적 상황을 아무 문제없는 정상 상태처럼 왜곡한다. 그의 농담에 웃어주기 위해선 그동안 광주라는 공간이 겪어야 했던 차별의 역사를 없거나 이미 다 해결된 셈 쳐야 한다. 심지어 광주라는 지역의 역사적 특수성을 빼고 보더라도, 지방을 가는 데 여권이 필요하다는 농담은 다분히 서울 중심적 사고다.


차별은 뿔 난 악마들의 사악한 의도를 통해 강화되는 게 아니다. 어떤 차별적 전제들에 대해 그것을 차별이라 여기지 않는 악의 없는 은폐를 통해 차별은 강화 및 재생산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해맑은 차별이 악의적 혐오만큼 나쁜 건 아니다. 물론 발화자의 의도가 보이지 않는 작은 천사처럼 말에 들러붙어 발언의 해악을 중화시켜주진 않는다.


악의 없는 차별은 오직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차별적 전제와 구조를 인식하고 교정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아직’ 덜 나쁠 수 있는 것이다. 본인들의 좋은 의도만을 강변할 뿐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고 교정해야 할지 인식하지 못한 SBS 스포츠와 안경현의 사과는 그래서 공허하고 나쁘다. 일베냐 아니냐, 라는 기준으로 의도의 순수성만을 따질수록, 바로 그 일베류의 혐오주의자들이 올라탈 수 있는 차별의 전제들은 공고하게 남는다. 이때 해맑은 차별주의자들은 뿔 난 악마의 공모자가 된다.

복도식 아파트

경향신문

지난 7월24일 방영된 MBC <나 혼자 산다> 에서 배우 이규형의 집이 공개되자 기안84가 “복도식 아파트에 사시네요”라고 말해 일부 시청자들이 문제제기를 했다. <나 혼자 산다> 방송 화면 캡처

경향신문

지난 7월24일 방영된 MBC <나 혼자 산다> 에서 배우 이규형의 집이 공개되자 기안84가 “복도식 아파트에 사시네요”라고 말해 일부 시청자들이 문제제기를 했다. <나 혼자 산다> 방송 화면 캡처

역시 최근 방영한 MBC <나 혼자 산다>에서 기안84의 발언에 대한 갑론을박을 단순히 예민한 일부의 문제제기로 치부할 수 없는 건 그래서다. 지난 7월24일 방송에서 게스트로 나온 배우 이규형의 집이 공개되자 기안84는 “복도식 아파트에 사시네요”라고 한마디 거들었다. 이미 긴장해 있던 이규형은 조금 당황했고, 이에 박나래는 기안84에 대해 “건물84”라 소개했다. 이에 대해 일부 시청자들은 그가 계단식 아파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노후하거나 좁은 복도식 아파트를 희화화한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다. 복도식 아파트를 보고 복도식 아파트라 말하는 것이, 고딕 건물을 보고 고딕이라 말하고 로마네스크 양식을 보고 로마네스크라 말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알기 위해선 복도식 아파트라는 호명이 실제 세계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해석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최근 개봉한 <#살아있다> 감독의 변처럼 복도식 아파트는 한국적 리얼리티를 대표하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다만 영화 <숨바꼭질>에서 주인공 성수(손현주)와 형의 경제적 차이는 도심의 계단식 고가 아파트와 도심 외곽 복도식 아파트의 대비로 비춰진다. 영화 <목격자>에 대한 매일경제 기사에선 배경이 되는 아파트가 계속 바뀌는 것을 지적하며 “부자동네라면서 왜 복도식 아파트를 썼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아파트 평수나 임대아파트냐 아니냐로 아이들끼리도 계급이 나뉘는 부동산 공화국에서 “복도식 아파트에 사시네요”는 의도와 별개로 투명한 의미일 수 없다. 심지어 굳이 아파트를 골똘히 보는 기안84의 모습을 따로 비추고 ‘복도식 아파트’를 굵고 붉은 자막으로 강조하는 제작진의 연출에선 더더욱 그러하다. 복도식 아파트라는 말을 강조하고 거기에 당황하는 거주자와 폭소하는 다른 사람들을 비추면서 여기에 어떤 희화화된 차별이나 비하의 의미가 없다고 하는 건 무책임하다. 이것은 발화의 의도와 별개 문제다.


기안84가 악의적이거나 깔보는 의도로 복도식 아파트를 거론한 건 아닐 것이다(제작진의 의도에 대해서까지 선해해 줄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인터넷 유사언론 인사이트는 “대부분의 누리꾼은 ‘복도식 아파트에 어떤 의미 부여도 하지 않았는데 왜 이게 논란이 되지’ ‘멤버들이 웃은 건 기안84가 뜬금없이 복도식 아파트에 초점을 맞춰서인 듯’ 등의 반응을 내비쳤다”며 이를 일부의 유난으로 치부했고, 비슷한 사이트인 위키트리도 기안84에 대해 “창조 논란 피해자”라 규정했다. 안경현의 사례처럼 이 역시 기안84의 의도에만 집중하면 마술의 미스디렉션처럼 논의의 쟁점들은 유유히 사라진다. 옹호하는 이들의 말대로 기안84는 별다른 의도 없이 말을 꺼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어떤 의미값을 갖게 될지 고려하지 않고 해맑게 말해도 괜찮은 문제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실제 세계에서 차별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하는 공간에 대해 좀 더 사려 깊게 연출해주길 바란 것이 그저 유난인 걸까.


지역에 대한 개인적 호의를 담은 농담이 어떻게 지역비하와 공모할 수 있는지, 건물 구조에 대한 건조한 사실명제가 어떻게 주관적 평가로 해석될 수 있는지 따지는 게 과도해 보이고 때론 정말 과도할지 모른다. 하지만 해맑은 차별에 대한 민감함은 언제나 유난스러울 수밖에 없다. 둔감함 안에 가려진 차별은 그 이유로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세상의 불평등한 요철에 확대경을 들이미는 게 때로 과하다면, 세상의 요철을 마치 평평한 것처럼 가정하는 것은 매 순간 기만적이다. 앞서 해맑음은 특권일 수 있다고 했다. 그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평등을 위한 첫걸음일 것이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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