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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세 번 찾아간 레스토랑서 깨달은 세 가지

인류학자 이민영의 미식여행

파리 샤토브리앙

 

전통 중시 프랑스도 요리는 글로벌 융합

대화는 미각의 적, 음미는 고독하게

음식도 아는 만큼 맛을 느낀다

 

예약 불가, 줄 서 9시45분 입장

전채요리 ‘아뮈즈부슈’ 4접시

신묘한 맛의 새우에 수프 3종

분자·생선회·참치 타다키·수육

3가지 코스 ‘개성만점’ 디저트


어느 나라에서 영감 얻었을까

국경 넘나들며 맛의 세계일주

가격 8만원, 와인 추가 16만원

경향신문

꽃잎이 든 시큼한 액체 속에 생선 조각이 든 세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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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과 베리와 바질의 신기한 조합.

파리에는 내가 무려 세 번이나 방문해 세 가지 깨달음을 얻은 ‘나름 단골’ 레스토랑이 있다. 첫 미식여행이었다. 마지막 날 저녁식사를 할 레스토랑을 미처 예약하지 못한 채 출국했다. 현지에서 몇몇 곳을 찾아가고 전화도 해보았지만, 모두 만석이었다. 미식여행자는 한 끼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의미 있는 식당들을 찾아다니는데… 이를 어쩌나. 좌절해 호텔로 돌아온 나는 음식인류학 박사 선배이자, 미식전문여행사 대표인 S선배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2012년 월드 레스토랑 랭킹 15위(이후 수년간 10~30위 사이를 지킨) 샤토브리앙(Chateaupiand)으로 가서 줄을 서라’는 답이 날아왔다. 이른 저녁에는 예약 손님만 받지만 오후 9시45분부터는 현장에서 줄을 선 손님을 입장시킨다고 했다. 게다가 전 세계적인 미식 트렌드의 최첨단을 경험해볼 수 있는 곳이라니! 즉시 노트북을 덮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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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라즈베리, 생선 회 등 이질적인 재료들의 엉뚱한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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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채 맛이 독특했던 선지 샐러드.

도착해 보니 동네 카페처럼 수수하고 별 장식이 없는 가게였다. 정말 세계적인 레스토랑이 맞는지, 잘못 찾아온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으나 가득한 손님을 보고 안심했다. 직원에게 메뉴판을 보자고 했더니, 허름하긴 하지만 ‘샤토브리앙’이라고 분명히 쓰여 있는 A4용지 한 장을 내밀며 “문 앞에서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순식간에 내 뒤로 줄이 길어졌다. 내가 자리를 잡은 후로도 선 채로 와인을 마시고 수다를 떨며 밤 11시까지 대기하는 사람들을 보니 이곳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실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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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고기, 가지, 허브, 꽃, 양 치즈.

메뉴는 테이스팅 메뉴(셰프가 엄선한 대표요리들로 이루어진 풀코스 메뉴) 하나뿐이었다. 가격은 단돈 60유로(약 8만원). 각 코스마다 소믈리에가 엄선한 와인을 함께 마시는 와인페어링까지 포함하면 120유로였다. 테이블마다 와인잔이 가득한 것을 보니 손님들 대부분이 와인페어링 코스를 시키는 것 같았다. 직원이 와서 쾌활하게 전체 코스를 쭉 설명해주는데, 무릎을 접고 쪼그려 앉아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맞추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닌가. 유럽에서 본 적이 없는 일이어서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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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와 바질, 그 속에 숨어 있는 오징어 회.

그 뒤로도 계속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아뮈즈부슈(식전 한입 먹거리)가 4접시나 나왔으니까. 버터와 치즈가 들어간 슈 다음에 이탈리아식으로 만든 세비체(페루 등 라틴아메리카에서 흔히 먹는 샐러드로 생선회를 레몬즙에 재워두었다가 먹는 음식)가 나왔다. 살짝 태국 향신료 맛도 나면서 아보카도 조각이 씹히는 조합이었다. 먼저 담백한 탄수화물로 위장에 기별을 준 뒤 강한 신맛으로 입맛을 돋우는 듯했다. 아뮈즈부슈의 사전적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글로벌한 레시피로 깜짝 놀래킨달까. 다음 코스가 기대되어 바보처럼 혼자 웃기 시작했다.


이후 무장해제된 내 앞에 나온 것은 버터를 발라 구웠지만 신묘한 맛이 튀어나오는 새우, 각각 다른 맛이 나는 3가지 수프, 면처럼 보이지만 상상을 뒤엎는 식감의 분자 요리, 라즈베리와 생선회라는 이상한 조합, 그리고 빨간색 케첩처럼 보이지만 세 덩어리의 색깔과 맛이 다 조금씩 다른 소스였다. 이어 나온 접시는 올리브와 참치 타다키, 바싹 말려 약간 딱딱하게 만든 채소 이파리, 겉을 깎아내 주사위처럼 만든 셀러리까지 모두 독특했다. 수육처럼 담백한 돼지고기에 곁들인 오이절임과 무절임은 또 어느 나라 요리에서 영감을 얻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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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가 든 디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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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체리 2개와 가짜 체리 1개가 든 디저트.

3코스로 이루어진 디저트도 모두 개성이 넘쳤다. 체리 3개가 담긴 그릇이 먼저 나왔다. 의외로 너무 단순한 디저트 같다는 생각을 하며 꼭지가 위로 솟은 왼쪽 체리부터 오른쪽 체리까지 먹었다. 이어 가장 알이 큰 체리를 먹으려니 꼭지가 없었다. 무심코 스푼으로 떠서 입에 넣었는데 이건 체리가 아니라, 아주 신맛의 아이스크림이었다! 그제서야 왜 직원이 메뉴를 설명하면서 “놀랄 일이 있을 거”라며 윙크를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 후 안에서 유자맛즙이 터져나오는 두 번째 디저트와 인도에서 흔히 쓰는 향신료를 초콜릿 조각처럼 만들어 딸기 위에 뿌려놓은 세 번째 디저트까지, 위트 넘치는 메뉴를 즐기다 보니 충만한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때 첫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프랑스에서 확립된 요리문법에 글로벌한 재료와 요리법을 담은 것이 전 세계적인 미식 트렌드가 되었으며 이것이 전통을 중시하는 프랑스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설 및 인테리어에서 거품을 쫙 빼고 한 가지 메뉴로만 통일해 운영하다 보니 동급 레스토랑에 비해 가격 대비 성능비가 월등히 좋으며, 이 때문에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미쉐린 가이드북에 오르진 못해도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리스트 상위에 오른다는 것. 이 레스토랑은 모든 면에서 추천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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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세계적인 레스토랑이 맞는지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소박한 ‘샤토브리앙’의 외관.

2년 후 이곳을 다시 방문했다. 캐주얼하고 소박한 인테리어와 활기찬 분위기에, 직원들도 그대로였다. 이쪽 음식문화에 익숙지 않은 외국인 입장이어서 그런지 빵바구니로 가볍게 장난을 치고 윙크와 농담을 던지며 긴장을 풀어주던 직원들의 얼굴이 모두 기억났다. 2년 전과 바뀐 것은 자리 배정뿐이었다. 바(bar) 끝에서 2번째 자리로 앉았더니, 이 레스토랑을 혼자 찾은 ‘유이한’ 손님이었던 호주 청년이 끝자리에 외로이 앉아 있다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이런 곳에 혼자 오는 청년이라니 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고맙게도 청년이 먼저 내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이번 여행에서 갔던 레스토랑 이름들을 물어보더니 그 셰프는 어떤 사람이며 그 레스토랑은 메뉴가 어떻다고 알은척을 하며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알고 보니 그는 14세 때부터 주방에서 일하다 셰프가 됐다고 했다. 몇 년간 일하다 너무 지쳐서 대학교 물리학과에 진학했고(호주에서는 이렇게 일하다가 대학으로 가는 일이 아주 흔하다고 했다), 1학기를 마친 스스로에 대한 보상으로 미식여행을 왔다고 했다.


“음식에 대한 당신의 그 집착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나오지. 인간은 얼마나 창의적일 수 있을까?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인간은 어디까지 섬세해질 수 있을까? 특히 음식에서 말이야.” 이런 선문답 같은 대화를 하다가도 음식이 나오면 칼같이 대화를 끊고 각자의 접시에만 집중했다. 음식 하나하나에 감탄하는 섬세하고 명랑한 청년과 함께 식사를 했으니 더욱 맛있고 즐거웠을 법하지만… 두뇌가 대화 모드로 활성화되면 다른 영역의 감각이 30% 이상 무뎌진다는 것이 이곳에서의 두 번째 깨달음이었다. 미식수행은 고독해야 한다는 것! 이 깨달음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나는 잽싸게 계산을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뛰어갔다. 야심한 밤에 지하철이 끊길까봐 걱정이었는데, 이 청년은 온갖 감언이설로 나를 붙잡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디너를 먹었는데 지하철 따위야 뭐 어때! 원래 디저트는 만사를 다 잊고 즐기라는 거야! 이럴 때 와인 한 잔 더 하고 가야지!” <비포 선라이즈>까지는 아니더라도 e메일 주소 정도는 교환하고 올 수도 있었는데 너무 냉정했나. 다르게 생각하면 처음 보는 외국인과 너무 이야깃거리를 외국어로 나누는 것이 음식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뿐,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이 문제는 아닐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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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 수행은 고독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한 ‘레스토랑 일일 동석자’ 호주 청년.

다시 1년 후. 단체 배낭여행 인솔자로 출장을 갔다가 팀원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나를 잘 따르던 대학생 룸메이트가 프랑스에 왔으니 미식 체험을 한 번 해보고 싶다며 조언을 구한 것이 발단이었다. 마침 가성비 좋은 월드 클래스급 레스토랑을 예약해두었다고 하자,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 8명이나 따라붙었다. 파리 테러 때문에 국가비상사태 기간인 데다가, 이상기후로 인한 ‘역대급’ 폭염까지 겹친 덕분(?)에 쉽게 예약 인원을 추가할 수 있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맛있다, 아름답다, 와인과 너무 잘 어울린다 등 감탄을 연발하며 즐겼다. 반면 남자들은 식감이 이상하다, 다 먹었는데 배가 고프다, 이게 왜 맛있는지 모르겠다, 푸짐하게 퍼주는 한국 식당이 더 맛있다는 둥 구시렁대더니 심지어 맥주를 시켜 마시기까지 했다. 미식의 나라로 유명한 프랑스에, 그것도 월드 레스토랑 랭킹 10위권에 드는 엄청난 레스토랑까지 왔는데, 현지 문화를 체험한다는 마음으로 새로운 맛을 음미하고 익숙하지 못한 술(와인)을 마시는 게 그렇게 힘들까? 이때 세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외국 음식과 글로벌한 미식 문화를 즐기려면 다문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문화만이 옳다고 생각하기 쉬운 존재이지만, 글로벌 시대에는 의식적인 교육을 통해 내가 익숙하지 못한 맛과 문화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를 익힐 필요가 있다.


이 깨달음들이 싹을 틔워 나를 관광인류학자로 인도했으니, 샤토브리앙은 나에게 너무나 의미 있는 곳이다. 이처럼 여행 중 만나는 식당과 음식은 나와 나의 문화를 성찰해볼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어준다. 여행 중 먹는 것을 너무 부차적인 것으로만 여기지 말고, 좀 더 적극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를 권한다.


필자 이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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