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확하게 아름답다’··· 일러스트레이터 제임스 진의 새로운 세계
제임스 진은 2012년부터 화려한 색채를 사용해 아름답고 신비한 화면을 창조했다. ‘아우렐리안즈’(2016)의 소녀들은 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나비를 잡는다. ⓒ 2019 James Jean |
그림을 보고 혼자 고민에 빠졌다. “이건 상업미술인가 순수미술인가”. 금방 결론을 내렸다. “그게 뭐가 문제인가. 이렇게 아름다운데, 그것도 선명하고 명확하게 아름다운데.”
지난 4일부터 서울 송파구 롯데뮤지엄(LMoA)에서 열리고 있는 제임스 진(40)의 개인전 ‘끝없는 여정’에 나온 작품들은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시다. 선은 정교하고 색은 강렬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제임스 진은 원래 일러스트레이터로 출발했다. 마블과 함께 미국 그래픽노블의 양대산맥 중 하나인 DC코믹스에서 8년간 표지를 그렸다. 그래픽노블 시리즈 페이블즈(Fables)를 비롯해 제임스 진이 그린 표지만 이번 전시에 150점이 나왔다. 제임스 진은 전시 개막을 앞두고 지난 3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매달 다른 표지를 그려야 했기에, 다른 소재와 다른 방식으로 실험을 할 수 있었고, 그 결과물들이 다른 작품에 포함됐다”고 말했다.
‘에이비어리-레드파이어’는 붉은 색을 통해 화면 오른쪽에 잠든 승려의 꿈을 보여준다. 제임스 진은 가마우지를 훈련시켜 물고기를 잡던 중국의 어부들이 현대에서는 사진을 찍는 것으로 돈을 버는 것을 보고 이 그림을 그렸다. 전통이 훼손되고, 변질되는 모습을 시각화했다. ⓒ 2019 James Jean |
일러스트레이트로 명성을 얻은 제임스 진은 2008년부터 ‘순수미술’을 시작했다. 어린시절부터 좋아한 공상과학소설과 일본 애니메이션, 미국의 그래픽 노블 등이 반영된 그의 작품은 금세 큰 호응을 얻었다. 2009년 미국 뉴욕 조나단 레빈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지난해에는 일본 도쿄의 카이카이 키키 갤러리에서도 작품을 선보였다. 카이카이 키키 갤러리를 운영하는 일본의 팝아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57)는 제임스 진의 열성 팬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롯데뮤지엄에서 열리는 전시는 그간의 개인전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다. 페이블즈 표지와 드로잉을 포함해 총 500여점이 나왔다. 제임스 진의 작품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임스 진도 이번 전시를 위해 대형 회화 9점을 새로 그렸다. 전시장 입구로 들어서자 마자 만나는 이 그림들은 종이나 모니터로 봐서는 그 위용을 실감할 수 없다.
지난 4일부터 롯데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제임스 진 개인전 ‘끝없는 여정’은 그의 대형 신작으로 시작한다. 사진 맨 오른쪽에 보이는 작품은 ‘디센던츠-블루 우드’(2019). 롯데뮤지엄 제공 |
전시장 맨 앞에 놓인 대형 회화 ‘디센던츠-블루 우드’(2019)에서는 소년들이 구름과 꽃으로 가득 찬 하늘을 떠다니고 있다. 제임스 진은 “전시를 제안받은 뒤 롯데월드타워를 방문했는데, 건물이 너무 높아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어릴 적 읽은 ‘잭과 콩나무’ 동화가 생각났고, 구름 위를 떠다니는 소년의 이미지로 연결됐다”고 말했다. ‘하강’을 뜻하는 디센던트(Descendent)는 ‘후손’을 의미하는 디센던트(Descendant)와 동음이의어이기도 하다. 롯데뮤지엄 구혜진 수석큐레이터는 “디센던트는 2016년 태어난 제임스 진 작가의 아들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피기백’(2014)은 제임스 진의 정교한 드로잉 솜씨를 보여준다. ⓒ 2019 James Jean |
제임스 진의 수려한 작품들은 그의 꼼꼼하고 탄탄한 ‘밑작업’에서 시작된다. 제임스 진은 완벽하게 스케치를 그린 뒤 본 작업에 들어간다. 이번 전시에 함께 나온 드로잉들은 그가 얼마나 기초를 잘 닦았는지 보여준다. 실재하는 동물이든, 상상속의 동물이든 정밀하지 않은 묘사가 없다. 제임스 진은 대학시절부터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수시로 들러 오귀스트 로뎅, 에드가 드가, 프란시스코 고야 등의 작품을 보며 인체 드로잉을 연습했다고 한다.
제임스 진이 2009년 그린 ‘헌팅 파티’에서는 폭력과 죽음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 2019 James Jean |
제임스 진이 밝고 화려한 작품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그가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낸 2009~2010년에 나온 작품들은 완전히 다른 작가의 작품같다. ‘헌팅 파티’(2009)와 ‘호랑이’(2010), ‘체럽스’(2010)에서는 폭력과 죽음이 난무하는 파괴자의 모습까지 보인다.
제임스 진이 2005년 3월 그린 페이블즈의 표지 ‘언틸 더 스프링’ ⓒ 2019 James Jean |
영화 <세이프 오브 워터> 의 포스터 ⓒ 2019 James Jean |
제임스 진은 ‘순수미술’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상업미술에서 보여준 그의 재능을 주변에서 내버려두지 않았다. 제임스 진 역시 더 많은 대중과 소통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2007~2008년 유명 패션브랜드 ‘프라다’와 협업을 진행했던 제임스 진은 지난해 다시 남성복 디자인에 참여했다. 또 <세이프 오브 워터> <블레이드 러너 2049> <마더!> 등 미국 헐리우드 영화 3편의 포스터를 그렸다. 제임스 진은 “나에게 모든 자유를 허락하는 브랜드와만 작업을 한다”며 “많은 사람들이 내 작품과 함께 폭넓은 경험을 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타이거-화이트 메탈’ 속 어미호랑이는 사방을 경계하며 새끼 호랑이를 지킨다. 제임스 진은 미국이 멕시코와 정치적 문제로 국경 지역에서 이주자와 그 자녀들을 분리한다는 뉴스를 보고 이 그림을 그렸다. ⓒ 2019 James Jean |
강렬한 색채와 정교한 묘사로만 기억될 작가는 아니다. 작품 속 동식물은 세상에 없을 것 같지만, 그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그림의 한쪽은 현실과 맞닿아있다. 제임스 진은 미국 정부가 멕시코 접경 지역에서 이주자와 그 자녀들을 분리한다는 뉴스를 보고 ‘타이거-화이트 메탈’(2019)을 그렸다. 기괴한 동식물들이 배틀 타고 가는 ‘패시지-블루 우드’(2019)에서는 전지구적인 난민문제가 보인다. 전시는 9월1일까지.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