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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연예인 팬인 저, 오늘부로 ‘탈덕’합니다”

‘정준영 카톡방’ 사건 이후 선언 줄이어

팬들 앞에선 ‘사랑한다’ ‘소중하다’…뒤에서는 여성을 물건 취급해

존중이 결여된 연예계 전체에 실망

경향신문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초등학생 때부터 KTX 타고 매번 전시회, 콘서트 전부 쫓아다니면서 너무 힘들었는데 돌이켜보면 정말 그 순간까지도 설렘, 기대로 가득 차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빅뱅에게 제 존재를 알리고 싶어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중략) 정말 속으로는 너무 이승현(승리)을 사랑하지만, 더 이상 이런 이승현을 소비할 수는 없어요. 정말 너무 지쳤어요. 그래서 저는 빅뱅을 추억으로 남겨두고 살아가려 합니다.”


김미연양(16·가명)은 지난달 14일 고민 끝에 더 이상 빅뱅의 팬이 아님을 선언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글에는 그간 빅뱅을 응원하며 느낀 보람과 기쁨,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덕’(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애정을 철회하는 행위)을 할 수밖에 없었던 고뇌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김양이 글을 올린 이날, 빅뱅의 멤버였던 승리(29·본명 이승현)와 가수 정준영(30)이 각각 성접대 혐의와 성관계 영상 불법 촬영 및 유포 혐의로 경찰에 출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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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그룹 빅뱅 전 멤버 승리가 경찰에 입건되자 김미연양(16·가명)은 5년간 모은 빅뱅 관련 자료를 정리하고 ‘탈덕문’을 트위터에 올렸다. 김양 제공

‘정준영 카톡방’의 여파로 최근 온라인상에는 김양처럼 ‘탈덕문’(탈덕을 선언하는 글) 형식을 통해 더 이상 남자 연예인의 팬이 아님을 밝히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승리, 정준영, 로이킴 등 카톡방 멤버로 지목돼 형사 입건된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이 카톡방에서 일상적으로 여성 혐오 발언을 일삼고 음란물 유포 등 성범죄에 가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건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남자 연예인들 역시 탈덕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들 역시 여성 혐오 문화를 공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깊어진 때문이다. 최근 그룹 SS501 출신 가수 김형준의 성폭행 의혹, 가수 겸 배우 박유천의 마약 투약 혐의 등 남자 연예인들의 사회적 물의가 잇따르면서 이 같은 흐름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김모씨(21)는 지난 7일 자신의 블로그에 ㄱ보이그룹에 대한 탈덕문을 올렸다. 지난 3년간 모았던 소속사와 팬들이 판매한 상품과 앨범들, 잡지와 달력, 멤버들이 모델로 나선 브랜드 화장품들을 폐기하는 사진도 덧붙였다. ㄱ보이그룹은 정준영 카톡방 사건에 일절 연루된 바 없는 그룹이다. 그럼에도 김씨는 정준영 카톡방 사건이 탈덕의 방아쇠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남자 아이돌들은 주요 팬층인 여성들 앞에서는 ‘사랑한다, 여러분은 소중하다’고 말하지만 뒤에서는 여성을 물건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에 드러났다. 애써 피해왔던 사실을 직접 마주한 느낌이었다”면서 “앞으로 어떤 남자 연예인을 위해서도 지갑을 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이 주된 소비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연예계에 대한 실망이 탈덕을 결심한 핵심 요인이라는 지적이다.


최근 ㄴ보이그룹에 대해 탈덕을 선언한 유모씨(23) 역시 “좋아하는 연예인이 여성을 성적 욕구를 만족시켜 줄 ‘도구’로만 보는 줄도 모르고 그들을 좋아했던 팬들의 상처가 얼마나 클지 공감이 돼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ㄴ보이그룹 역시 정준영 카톡방 사건과는 무관했지만, 평소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던 유씨는 이 사건 이후 더 이상 전처럼 남자 아이돌 팬으로 남아있을 수가 없었다. 유씨는 “본 것만을 믿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불법 촬영이나 데이트폭력을 당했던 사람들이 가해자가 그런 사람인 것을 알았던 것이 아닌 것처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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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영으로부터 불법 촬영 영상을 전해받은 가수 용준형의 팬이었던 이모씨(22)는 지난달 ‘탈덕’을 선언하며 7년간 모은 상품과 음반을 정리했다. 이씨 제공

이처럼 여성 팬들이 별다른 ‘확증’도 없이 남자 연예인의 여성 혐오 문화를 근거로 탈덕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최근 2~3년간 여성 팬들 사이에서는 남자 연예인들의 여성 혐오 발언이나 노래 가사 등을 지적하는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돼왔다. 그러나 해당 연예인들의 반성이나 행동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아 이에 대한 실망과 무력감이 탈덕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김미연양은 “승리가 지난해 8월 tvN <짠내투어>에서 구구단 멤버 세정에게 술을 따라달라고 했을 때도 팬들이 나서 승리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총공’(단체행동)까지 했다. 결국 그가 공개 사과를 해왔기에 믿음을 유지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보이그룹 블락비의 팬이었던 이모양(18) 역시 “블락비의 가사와 뮤직비디오 등에 여성 비하적 내용이 있어 다른 팬들과 함께 사과 요구 운동을 펼치고, 멤버들에게 페미니즘 도서까지 선물했었다. 그러나 우연히 멤버들이 나눈 사담을 보고 그들이 여전히 여성 혐오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남자 연예인과 연예계 전반의 성차별적 문화를 시정하려 노력해왔던 팬들은 ‘정준영 카톡방’이라는 사건 앞에서 무너지고 만 셈이다.


팬들과 전문가들은 연예산업 전반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최지은 칼럼니스트는 “유튜브 등 라이브 방송이 많아지면서 연예인들의 평소 모습이 언제 대중들에게 드러날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 이제는 남자 연예인들이 무대나 공식석상에서의 모습뿐 아니라 일상적인 언행도 평가받게 됐다. 페미니즘이 시민의 기본 양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회적 변화를 인식하고 스스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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