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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경향신문

, 그들이 말하는 이웃사촌에 전라도는 없다

위근우의 리플레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모델로 만든 영화 ‘이웃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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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촌> (왼쪽 사진)은 호남 사람의 정체성을 귀하게 여겼던 김대중을 모델로 하면서 정작 사투리는 배제했다. ‘전라디언’ 등 호남 차별과 혐오, 타자화가 여전히 남은 사회에서 김대중의 실존적 고민이었던 호남과 사투리 문제를 제거한 것이다. <이웃사촌> 은 김대중이 겪었던 차별의 메커니즘을 반복·재현한다.

지난해 6월, 이 지면을 통해 SBS 드라마 <녹두꽃>, 유튜브 ‘박막례 할머니 Korea Grandma’ 채널, 네이버 웹툰 <정년이>에서 그동안 대중매체에서 듣기 힘들었던 전라도 방언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을 환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사회의 무관심이나 반강제적 배제 속에서 익명화되었던 이들이 다시 구체적인 형태와 목소리를 얻고, 그것을 전라도라는 지역의 언어로 발화한다는 건 상징적”이라고. 너무 이른 낙관이었던 것 같다. 2018년 완성된 뒤, 지난 25일 개봉한 영화 <이웃사촌>에서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하는 가택연금 중인 야권 대권주자 이의식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김대중처럼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구 출신 배우 오달수가 전라도 사투리 연기에 대한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오달수 측의 코멘트를 담은 YTN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이웃사촌>의 초고는 사실 전라도 사투리로 쓰였다. ‘사투리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 그 감성이나 철학이 배어 나와야 하는데 (내가 잘 연기하지 못할 것 같아서) 걱정했다.’ (중략) 또한 정치영화가 아닌 휴먼드라마인데 누군가를 연상시킬 만한 걸 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도 전달했다. 이 말을 들은 이환경 감독은 사투리를 삭제한 버전으로 시나리오를 바꿨”다. 배우로서 익숙하지 않은 지역 방언에 “감성이나 철학”을 녹일 수 없는 것을 고민하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 인천 출신으로 SBS <은실이>에서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 연기를 보여준 성동일도 있지만 예외로 치자. 이해하기 어려운 건 배우를 교체하거나 설득하는 대신 영화에서 전라도 방언을 삭제했다는 사실이다.


영화 속 이의식과 김대중이 동일인물은 아니라는 지적은 하나 마나 한 소리다. 노무현을 모델로 한 영화 <변호인>의 송우석은 부산을 배경으로 배우 송강호의 입을 빌려 유창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남산의 부장들>에서 구체적 이름이 제거된 ‘박통(이성민)’은 그럼에도 박정희의 시그니처인 “임자”라는 표현을 쓴다. 이것은 단순히 실존 인물과의 유사성 때문만은 아니다. <변호인> 같은 경우엔 실존 인물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포함될 수밖에 없고 이는 <이웃사촌>에도 요구할 만한 사항이지만, 그 때문만도 아니다. 실재했던 누군가를 모델로 픽션의 캐릭터를 구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인물의 삶에서 픽션에 필요한 어떤 부분만 편의적으로 도려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어떠한 선택을 한 인간을 진지하게 재현할 때, 그가 살아온 구체적인 삶의 프로필 역시 필연적으로 전제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전두환을 모델로 한 군부 정권의 독재자를 대머리로 재현하느냐 마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변호인> 속 송우석의 정겹고 리드미컬한 경상도 말씨는 단순히 노무현에 대한 말투의 흉내가 아니라, 변호사임에도 엘리트 의식보다는 지역 내 이웃에 대한 따뜻한 공감 능력을 지녔던 실존 인물의 구체적 인장 같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박해받는 투사이자 정치인이었던 김대중과 전라도 사투리의 관계는 더더욱 불가분하다.


너무나 잘 알려진 것처럼 김대중은 지역차별의 희생자인 동시에, 이를 철폐하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1992년 정계 은퇴 뒤 냈던 자서전인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서 지역감정이란 말은 기만적이며 문제는 지역차별이라고 확실히 못 박은 바 있다. 그의 사후 발간된 <김대중 자서전>에선 그가 호남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귀하게 여기는 동시에 그럼에도 왜 그것을 드러내는 데 있어 다른 지역 사람들은 절대 하지 않을 고민을 해야 했는지 밝히기도 했다. “나는 내가 호남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 번도 고향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품어 본 적이 없다. 차별받는 호남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을 제대로 못해 늘 가슴이 아팠다. 그렇기에 호남인들과 고통을 나누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실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때로는 지역감정을 선동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 나는 고향인 전라도를 찾는 데 많이 망설였고 가지 않았다. (중략) 왜 나라고 그립지 않았겠는가. (중략) 정작 저들은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다시 나에게는 지역감정의 굴레를 씌워 감시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전라도 사투리는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다. 정체성의 문제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낸 지역차별 담론에 희생당하면서도 정작 본인이 지역감정과 분열을 획책하는 원흉 취급을 받았던 정치인이 있다. 그가 여전히 지역차별 전략을 계승한 군부 정권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하고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면서, 정작 그의 중요한 프로필을 이루는 실존적 고민을 제거해버린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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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동교동 가택연금’으로 발이 묶인 김대중이 집 담장 너머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대중평화센터

정치드라마가 아니라는 <이웃사촌> 측의 강조는 그래서 실존 인물의 구체성을 제거한 것에 대한 변명처럼 보인다. 언론시사회에서 이환경 감독은 “시대 배경이 그렇다 보니 저도 모르게 80년대 정치적인 상황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략)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게 전혀 아니다. 가족 간의 이야기, 사람들의 소통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때의 정치와는 완전히 다른, 제가 느끼는 감정에서 나오는 시나리오다”라고 밝혔다. 앞서 인용한 “정치영화가 아닌 휴먼드라마인데 누군가를 연상시킬 만한 걸 할 필요가 있느냐는” 오달수 측의 질문과도 상통한다. 말하자면 야당 대권 주자의 가택연금이라는 모티브를 사용하고, 그를 불법 도청하는 부당한 절대 권력을 묘사하면서도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역사적 정치적 토대와 맥락을 지우고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겠단 것이다. 이쯤 되면 이들이 휴먼드라마 혹은 휴머니즘이란 말을 구체적 현실의 문제를 추상화하거나 회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진다. 탈역사적이고 탈정치적인 존재지만 울고 웃고 가족애에는 강하게 반응하는 선택적 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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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근우 칼럼니스트


과연 실존적 고민을 제거한 인간이 진정한 인간일 수 있을까. 이 당연한 질문은 그들이 휴먼드라마의 보편적인 인간상을 위해 전라도 사투리라는 구체적 프로필을 지운 사실과 함께 묶어 제기되어야 한다. 가상의 보편 인간을 표현하기 위해 말투를 서울말로 바꾼다고 할 때, 그것은 그저 캐릭터의 변경이 아닌 보편이라는 지위로부터의 배제가 된다. 차별은 보편의 이름으로 자연스러워진다. 서울말을 쓰면 사람이지만, 전라도 말을 쓰면 전라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관념적 분석이 아니라, 한국의 지역차별 안에서 실제로 자행되어온 일이다. 댓글 서비스를 중단하기 전, 포털의 정치나 스포츠 기사에서 ‘7시 그 지역’이나 ‘전라공화국’ ‘전라자치도’ ‘전라디언’처럼 호남 지역을 철저한 타자로 배제하는 지역차별의 언어들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김대중이 경험하고 울분을 토해냈던 현실에 이어 전라도라는 정체성은 가상의 세계에서조차 보편적 인간의 범주로부터 탈락했다. <이웃사촌>은 고인의 지역차별에 대한 고민을 재현하진 않지만, 그가 겪어야 했던 차별의 메커니즘은 그대로 반복한다. 그들이 말하는 이웃사촌에 전라도는 없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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