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빈둥지증후군을 치유한, 슬기로운 SNS 생활
이찬재·안경자 부부는 팔로워가 39만 명 이상에 달하는 스타 인스타그래머다. 이들이 수많은 팔로워들의 응원을 받을 수 있었던 시작점에는 빈 둥지를 지키는 외로움이 있었다.
1981년 친정아버지를 따라 브라질로 이민을 간 이찬재·안경자 부부는 손주를 키우는 일상이 부부의 삶이었다. 특히 은퇴한 이찬재 씨가 맡은 두 외손주의 등·하교는 더할 나위 없는 노년의 기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네 가족이 한국으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딸이 아주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에 손자들하고도 자주 놀았어요. 특히 남편은 등·하교를 매일 함께했는데 그게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과였죠. 근데 그게 하루아침에 사라진 거예요. 마치 준비 없이 퇴직을 당한 것처럼요.”
딸의 가족이 떠나고 이찬재 씨의 외로움은 하루가 다르게 깊어갔다. 아버지의 외로움을 가장 먼저 걱정한 건 멀리 미국에 있던 아들. 아들은 아버지가 손주들과 보내던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의 결과는 그림이었다.
“남편이 선생님이던 시절에 수련회에 가서 사인펜으로 그린 그림 엽서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본 기억이 남아 있었나봐요. 그 엽서를 어느 날 찾아 달라기에 찾아서 보여줬더니 자기 생각이 맞았다고 하면서 아빠한테 매일 그림을 그리라는 숙제를 주는 거예요. 물론 남편은 뜬금없이 무슨 그림이냐고 펄쩍 뛰었죠.”
이찬재 씨가 선생님이던 시절 수련회에서 그려 보낸 엽서 |
완강한 거부에 아들은 엄마를 먼저 설득해 아빠를 움직였다. 늘 나가는 공원에 가서 눈에 보이는 아무거나 그려보라는 게 첫 숙제였고, 그 이면에는 무료한 생활의 탈피라는 목적이 있었다.
아내와 아들의 설득에 못 이겨 하나둘 그림을 그렸고 아들은 이제 그 그림을 인스타그램에 올리자는 두 번째 설득에 나섰다.
아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그린 그림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서 간단한 제목을 써서 올리기를 몇 개월, 친손주가 태어나 미국으로 가게 됐다. 아들은 미국에서 아버지를 만나자 작심한 듯 인스타그램 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가족끼리는 뭐 가르치는 거 아니라고 하잖아요. 아무래도 화를 내게 되니까. 그런데 아들이 꾹꾹 참고 하나하나 가르치는 거예요. 남편도 이걸 진짜 배워야 되는거구나 그때 더 느꼈죠.”
이때까지만 해도 아들과 노부부 모두 그림을 그려 SNS에 올리는 것은 노년의 무료함을 달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그 목적이 하루아침에 바뀌게 된 건 어느 날 저녁 식사를 하며 한 대화에서 기인한다.
“손주를 안고 ‘이 아이가 크면 뭐가 될까’ 하고 남편이 혼잣말처럼 말을 했는데 옆에 있던 아들이 ‘그게 궁금하세요?’라고 묻더군요. 그래서 남편이 ‘이 아이가 컸을 때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거 아니냐. 그러니 더 궁금하다’라고 했어요. 아들이 그 말에 충격을 받았죠. ‘아버지가 안 계시는 날이 오겠구나’ 하고요.”
아들은 그날 이후 이제 손주를 위한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나중에 할아버지가 손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어떤 삶을 사셨는지 남기자는 의미였다. 그때부터 인스타그램의 이름이 ‘drawings for my grandchildren’으로 바뀌었다.
가족이 함께한 세대의 기록
딸네는 한국에, 아들네는 미국에 그리고 부부는 브라질에 있었지만 노부부의 외로움은 아들과 딸에 의해 세상밖으로 나올 틈이 없었다. 부부가 손주를 생각하며 그린 그림과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써서 가족 메신저방에 공유하면 아들은 그것을 영어로, 딸은 포르투갈어로 번역해준다. 그럼 한국어와 더불어 3개 국어로 번역된 글과 그림을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이 일상은 매일 이어졌고, 그렇게 가족이 함께하는 인스타그램은 한국보다 먼저 해외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영국의 BBC와 더불어 브라질 전역에 방송되는 한 프로그램에서 노부부의 일상을 다루면서 그들의 팔로워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좋아요 수가 막 많아지는데 처음에는 그것도 별생각 없었어요. 매일 무얼 그릴까만 생각했죠. 그런데 방송을 타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지더니 한국에서도 취재 요청이 들어오면서 이게 보통 영향력이 큰 게 아니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생겼어요. 한번은 방탄소년단이 브라질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었어요. 한국에서는 유명하지 않을 때였는데 브라질에서는 대단했거든요.
우리 부부는 손주들이 그 가수를 좋아하고 춤도 따라 추니까 그걸 알고 그림을 그린 건데, 우리 아들은 방탄소년단 유명세를 함께 타려고 그린 줄 알고 싫어하더라고요. 초심을 잃지 말고 손주들에게 집중하라고 일침을 하는 데 재미있었어요.”
손주들이 공룡을 좋아할 땐 공룡을 그렸고, 어떤 가수의 팬이 되면 그 가수를 그렸다. 손주들의 생각과 관심에 따라 그림의 주제도 바뀌니 자연스럽게 유행도 알게 됐다.
그걸 지켜 본 아들은 문득 부모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졌다고 했다. 그래서 회상에 관한 주제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전쟁 때 피난을 가 아버지 배 위에 누워 잠들었던 기억, 설날에 예쁜 복주머니에 세뱃돈을 받았던 추억을 그린 그림은 그렇게 탄생했다. 재미있는 건 이를 본 세계의 팔로워들도 부부의 옛 추억에 공감하며 감동의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것.
“전쟁에 대한 아픔이나 가족에 대한 애틋함, 옛 이야기 등은 나이, 국적, 성별에 관계 없이 똑같은 감동을 준다는 걸 알았어요. 그림에 달린 수많은 공감과 응원을 보면서 저희 부부도 정말 많은 감동을 받았죠.”
달라진 노부부의 일상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고싶다는 손자들의 부름에 부부는 36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는 손자들 곁으로 왔지만 부부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올해 초에는 그동안 그린 그림과 글을 엮은 책 도 나왔다.
“더 이상 외로움과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지 않아요. 이제 노년 삶의 전부가 됐어요. 매일 무엇을 그릴지 생각하고, 그에 맞는 자료를 찾아보고 또 가족과 이야기하면서 공감과 소통에 대해 생각해요.
그러면서 저희 또래의 많은 사람들도 나이들수록 시대의 흐름을 잘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동안 관심도 없던 SNS를 통해 무료한 삶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고, 전 세계인들과 소통도 할 수 있게 됐잖아요.
또 전시회나 강연 같은 다양한 제의도 받고 있어요. 아직 제 친구들은 SNS 하나로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실감하지 못해요. 또 어떤 사람은 소소한 일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걸 조금 세속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이 들수록 시대가 만들어 낸 변화를 수용하고 체험하는 건 더욱더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브라질과 한국 두 나라의 문화와 정서를 모두 느낄 수 있는 그림과 글 덕분에 최근 부부는 ‘SNS공공외교관’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자신들로 인해 브라질과 한국이라는 나라가 전 세계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먼 나라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동화 같은 따뜻한 이야기는 오늘도 많은 이로 하여금 하트를 띄우게 만든다.
기획 서희라 사진 박충렬(스튜디오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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