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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못 벌면 어때! 성북동 '소행성' 부부의 '노는 세계'

결혼하기 싫은 남자와 '다시는' 결혼하기 싫은 여자가 중년에 만나 부부가 됐다. 책장을 합치고 나란히 백수가 된 두 사람. 남들이 넘어졌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진짜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것도 ‘놀면서’.

<부부가 둘다 놀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너도나도 우울한 시절에 무슨 팔자 좋은 소리를 늘어놓겠다고 저런 책이 나왔나 싶었는데, 읽어보니 이건 ‘슬픈 자기소개서’에 가깝다. 유명 광고 대행사에서 20년 넘게 일했던 남자가 프리랜서로 독립을 했는데 일감이 없어 SNS에 ‘실력 있는 카피라이터가 놀고 있습니다’란 공개 청탁을 올린다.


여의도성모병원 대신 강남성모병원으로 조문을 가는가 하면, 천백 원을 백십만 원으로 오해해 아침 6시 15분부터 카드 회사에 전화를 걸기도 한다. 이 빈틈 많은 남자가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대형 출판사에서 유능한 출판기획자로 커리어를 쌓았다.


바에서 혼자 보드카를 홀짝이는 차도녀였고, 일종의 자가 성향 테스트인 애니어그램에 따르면 완벽을 추구하는 ‘올곧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연애를 하고 동거하다 부부가 된 지 어언 6년, 둘은 함께 놀고 있다는 또 하나의 공통분모를 갖게 됐다. 책의 저자인 편성준 씨와 윤혜자 씨의 이야기다.

집 이름이 성북동 소행성(小幸星)이다.

편성준(이하 편) : 이 집에서 소소한 행복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다. 친구들과 마당에서 삼겹살도 구워 먹고, 여름이면 작은 풀장에서 지인의 아이들이 놀고 가기도 한다. 코로나로 주춤하지만, 독서 모임이나 작은 요리 강좌도 종종 열린다. 어머니가 예전부터 사람들이 많이 놀러 오는 집이 ‘좋은 집’이라고 하셨는데, 내 생각도 그렇다.


윤혜자(이하 윤) : 사실 우리는 원래 저쪽 언덕에 있는 작은 양옥집을 개조해 살았다. 그러다 우연히 이 집과 연이 닿아 지난봄 대대적으로 공사를 하고 들어왔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살던 집이 팔릴지 말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덜컥 계약부터 해놓고는 친구한테 목돈을 빌려 계약금을 넣었다. 그때 부동산 아주머니의 걱정 어린 표정이란(웃음).


놀라운 점은 집을 내놓은 지 4시간 만에 세 분의 ‘매수 희망인’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중 한 분이 보지도 않고 집을 사셨는데, 알고 보니 SNS에서 우리가 종종 올리던 집 사진을 보셨단다(웃음). 이 한옥을 수리하느라 빚이 생겼지만 구석구석 신경을 많이 쓴 집이라 애정이 각별하다.

부부가 다 놀고 있다면 대개 벌어놓은 돈이 많은 줄 안다.

윤 : 전혀. 두 달 뒤엔 생활비가 똑 떨어질 텐데 같은 걱정을 하며 살았다. 빚이 생겼고, 수입도 현직에 있을 때의 10분의 1로 줄었지만 그렇다고 비참하거나 슬픈 적은 없었다. 조니워커 마시다 소주를 먹게 됐지만, 예전엔 메뉴를 지금은 단가를 고민하며 외식을 하지만, 10만 원어치 보던 장을 5만 원어치만 보게 됐지만,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라 기꺼운 마음으로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다.

회사는 왜 그만뒀나?

편 : 회사 일로 여러 번 자존심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며 꾸역꾸역 6~7개월을 버텼는데 이제 한계라는 판단이 들었다. 아내가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여러 아이템을 구상 중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나까지 퇴사하게 됐으니 돈 걱정이 안 됐던 건 아니다. 매달 나가는 생활비를 생각하면 당장 한 푼이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참는 건 능사가 아니었다. 언제든 인생의 새 출발을 도모할 때가 오는데 그 시기가 좀 더 일찍 왔다고 생각할 필요도 있었다.

새 출발이 결국 ‘글’이었나?

편 : 나는 카피라이터로 오래 일했다. 그때그때 광고주의 요청에 따라 글을 쓰며 성과도 내고 보람도 느꼈지만, 자유롭게 내 생각을 글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했다. 그래서 페이스북이나 브런치에 틈틈이 아내와의 소소한 이야기, 술 먹고 저지른 에피소드, 광고나 영화 리뷰 같은 걸 올리곤 했는데 이걸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었다.

작가가 됐으나 결과적으로 ‘퇴사’는 잘한 결정이었다.

편 : 그렇게 됐다. 물론 아내의 역할이 컸다. 사표를 낸 나한테 ‘힘들었겠다’고 위로해준 것도, 제주도에 거처까지 마련해주며 한 달간의 시간을 허락해준 것도 모두 아내다. 덕분에 제주도에 있으면서 많이 걷고 썼다.


그때 브런치에 연재한 '아내 없이 제주 한 달 살기'가 전자책으로 출간되기도 했고, 이번 책의 기획과 초안도 정리할 수 있었다. 아내는 남자에게 동굴이 필요하다며 선뜻 안방을 정리해서 내 서재로 꾸며주기까지 한 여자다. 이런 아내가 있어 나는 더 열심히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서로 좋은 시너지를 주고받는 느낌이다.

편 : 가볍게 주고받은 대화 속에서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올 때가 있다. 내가 끄적끄적 캘리그라피를 썼더니 어디에 꾸준히 정리해두라더라. 그렇게 인스타그램에 ‘공처가의 캘리’를 올리게 됐고, 이번에 제주에서 쓴 도 사실은 아내와 각자의 브런치에 그날 하루하루를 기록해 올리기로 한 약속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여유롭던 제주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와서는 어떻게 지냈나?

편 : 놀았다(웃음). 느긋하게 같이 동네 한 바퀴 하고, 영화나 책도 보고, 저녁엔 좋아하는 소주도 실컷 마시면서 놀았다. 그 와중에 둘이 전국 ‘스마트팜’ 농장을 다니며 취재해 책을 내기도 했는데, 그 덕분에 21세기 대한민국의 다채로운 호텔과 모텔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웃음). 무인모텔이니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욕실이니 하는 것들이 있을 줄이야.

놀았다더니 어쩔 수 없이 ‘일’에도 매여 있었다.

편 :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것이다. 노는 것과 쉬는 것을 혼동하기 쉬운데, 즐기며 신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설령 일이라도 ‘노는’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보자면 나는 요즘 내가 쓰고 싶었던 글을 쓰며 놀고 있다. 그걸로 약간의 돈을 벌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과 교류할 기회를 얻기도 한다.


회사 다닐 때에 비해 수입이 10분의 1로 줄었기 때문에 공공근로를 하며 생활비를 메꾸기도 한다. 집 근처 고등학교에 나가 소독제로 책걸상 등을 닦는 일인데, 오전에 일이 끝나니 시간 활용에도 좋고 몸을 움직이는 일이니 운동 효과도 있다.


논다는 건 때론 해보지 않은 일들에 부딪혀보는 데서 오는 새로움일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따른다. 일단 한 분야에 투신해서 열심히 살아봐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일에서 느껴지는 낯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 과정 없이 처음부터 ‘놀자’고 들려면 남들 이상의 대단한 능력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새롭게 사는 법을 고민하라는 얘기처럼 들린다.

편 : 맞다. 지금까지 오랜 기간 열심히 살아왔으니 한 번쯤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해보는 것도 좋다고 본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용기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내가 예전에 잘나가던 카피라이터였는데 이런 일을?' 하면 공공근로는 할 수 없다. 책을 쓰게 된 것도 좀 다르게 살 순 없나 고민 중인 분들에게 내 사례가 기분 좋은 동기부여가 됐으면 해서였다.


윤 : 살다 보면 시시콜콜하게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정말 많다. 미용실이나 백화점에서 ‘발렛 하시겠냐’고 물을 때마다 차가 없는 우리는 주차 필요 없다고 할까, 차 없다고 할까 생각이 복잡해진다. 또 우리는 아이가 없는데 점원이 당연하다는 듯 ‘어머님’ ‘아버님’ 호칭을 붙일 때마다 '내 이름 석 자는 이렇소!' 하고 밝히고 싶은 충동이 든다. 결국 남들과의 비교가 버거운 삶을 억지로 끌고 가게 만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새로운 일에서 놀려고 할 때는 지금껏 누린 것들을 내려놓는 용기도 챙겨야 한다.

지향하는 바가 비슷해서인지 부부가 참 편안해 보인다. 그 와중에 조용히 주말 영화 예매표를 내미는 부인과 설레는 마음으로 기꺼이 따라나서는 남편이라니, 로맨틱하기까지 하다

윤 : 우린 아이가 없다. 그 대신 평생 친구처럼 의지하며 즐겁게 살자는 데 뜻이 맞는다. 자연히 함께하는 시간도, 활동도 많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한국 소설을 읽고 리뷰하는 ‘독하다 토요일’을 비롯해 토요일마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토요食忠團(먹을 것에 충성하는 사람들의 모임), 여럿이 모여 함께 걷는 남녀의 모임 '토요 Walking Queen’ 등을 결성해 함께 활동해왔다. 아는 사람이 거의 겹치고 함께하는 것들이 늘어나면서 책의 취향 같은 건 서로 다를지언정 삶의 목표와 태도는 비슷해졌다.

이번에 낸 책의 원래 제목이 ‘늦은 연애는 없다’였다고 들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연애를 시작했나.

윤 : 글 때문에! 아는 동생이 재미있게 읽고 있다며 온라인에 연재되던 남편의 글을 보여줬는데, 술자리에서 보고 들은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음주일기’란 카테고리에 정리한 것들이었다. 그 글을 쭉 읽다 보니 선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하는 일이 출판 편집자다 보니 글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우연히 자주 가는 바에서 그 사람을 만나게 됐지 뭔가. 그는 어디서 1차를 하고는 술이 모자라 단골 바를 찾아온 상황이었다. 생맥주를 시켰던 그가 내가 혼자 홀짝이던 앱솔루트 한 잔을 달라고 하면서 얘기가 시작됐고 번호 교환까지 하게 됐다. 그 후 정확히 한 달 보름 뒤, ‘고노와다에다 소주 한 잔 하실래요’ 하는 내 문자에 그가 쏜살같이 달려나오면서 사귀게 됐다.


편 : 나는 결혼을 안 할 생각이었던 남자고, 이 사람은 ‘다시는 결혼을 안 할’ 생각이었던 여자인데 이렇게 부부가 된 게 신기할 따름이다. 물론 막내아들의 동거 소식에 ‘차라리 결혼을 하지 그러니’ 하셨던 어머님의 말씀이 결정적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될 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책에 우리가 어떻게 만나고 결혼했는지 그 과정이 다 나오는데, 그걸 읽고 늦은 나이에 연애를 해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

늦은 나이에 서로를 만난 게 득일까, 실일까?

편 : 만일 우리가 20대 초반에 만났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거다. 설익은 젊은 시절엔 '나는 이게 좋아' 혹은 '이게 싫어’ 하는 선을 그어놓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은 아예 배제해버리지 않았나. 나이가 들며 그 선을 적당히 풀어놓고 플러스마이너스 오차를 받아들이게 됐다. 싸울 수 있는 상황에서 심호흡 한 번 하고 넘어가는 여유가 젊은 시절엔 없었던 것 같다.


윤 : 서로가 충돌하지 않으려면 나와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한 것 같다. 나는 애니어그램을 공부했다. MBTI처럼 사람의 유형을 9가지로 분류해 파악하는 시도인데, 나는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1번 개혁가 스타일이고 남편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9번 조정자 스타일이라고 했다. 그 점을 알고 나니 마음이 급할 때 바지 지퍼를 올리지 않고 나오는 남편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반면 미루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성향을 고려해 남편도 바로바로 설거지를 한다. 자연히 갈등이 적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편 : 신영복 시인이 그러셨다. 위층 아이가 쿵쿵 뛰거든 올라가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주며 얼굴도 보고 이름도 물어보라고. 그렇게 ‘아는 아이’가 되면 뛰는 소리가 예전보단 참을 만할 거라는 뜻인데, 여기에 답이 있다. 알면 이해하고, 이해하면 싸울 일이 없다.


기획 장혜정 사진 지다영(스튜디오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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