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퇴직 후의 삶이 걱정된다면 이들처럼
퇴직은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퇴직하고 나면 무엇을 해야 할까? 퇴직을 예습하지 못했지만 공부로 퇴직 후의 위기를 극복해 가는 강찬영, 박경옥 부부를 만났다.
20~30대의 퇴직과 달리 50대 이후의 퇴직은 2라운드를 설계해야 한다는 점에서 두려움이 크다. 특히 권고사직 같은 비자발적 퇴직은 불행의 시작이자 나락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강찬영(59), 박경옥(56) 부부에게도 퇴직은 원하던 시점에 일어나지 않았다. 대기업인 한진해운에서 27년 넘게 일한 남편 강찬영 씨가 퇴직한 것은 6년 전이다.
“정년 시스템 안에 있었다면 62세가 정년이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겠지만, 당시에는 열심히 일을 했고 실적도 좋았기 때문에 마음을 놓고 있었어요. 언제 그만둬도 이상하지 않은 게 임원이었지만 당시에는 임원들도 보통은 계약이 연장됐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올해도 계약이 연장되겠구나 싶었지요.” _ 강찬영
“우리가 약간 방심하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도 50대가 되면서 앞으로 뭘 하고 살까 고민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살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돌아보면 (퇴직의) 위험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당연히 아무런 대책이 없었어요.” _ 박경옥
남편의 퇴직은 두 사람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의 인생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퇴사 후 4개월 정도 쉬다가 중소기업의 부사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해운회사의 경력을 살릴 수 있는 항공해운 물류회사였다.
퇴직 전에 미리 예정된 자리였기에 불안함은 없었다. 그런데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무산되면서 다시 회사를 나왔다. 이후 강 씨의 재취업 도전은 2년여 동안 계속된다. 그 기간 인맥에 기대어 약속받았던 자리가 어그러지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37평형 아파트를 전세로 내주고 전세보증금에 돈을 보태 16평형 빌라로 이사했다. 강 씨는 매일 온라인으로 디지털 대학 강의를 들은 후 왕복 2시간 거리의 택배회사에서 택배 분류와 상차 일을 하고 아내 박 씨는 남편의 퇴직 이후 분노 조절과 동의보감에 대한 강의를 하며 (나무옆의자)라는 책을 냈다.
Q 전혀 예상하지 못한 퇴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퇴직을 하게 됐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아내 남편이 퇴직하기 전에는 조직이란 시스템에서 보호를 받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매달 나오는 남편의 월급이 울타리였죠. 안락하게 살았는데 퇴직이라는 현실을 외면한다고 해서 방법이 생기는 게 아니더라고요.
남편 일을 성실하게 했기 때문에 퇴직을 앞서서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첫 번째 회사에서 퇴직을 했지만 금방 재취업을 했고 매월 받는 급여도 변동이 없었어요.
Q 당장은 아니더라도 위기감을 느끼게 되는 때가 있었을 텐데요.
아내 남편이 두 번째 퇴직한 후에 6개월 정도는 다시 취업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어요. 그러다가 2년 가까이 실업 상태가 됐지요. 그 기간에 생활비를 줄이지 못했어요. 예전 소비 습관을 유지하다가 퇴직금이 바닥나면서 위기를 느꼈지요.
급여가 들어오고 집이 있고 빚도 없고 하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에 무방비 상태였던 거죠. 그나마 개인연금을 넣었던 게 큰 도움이 돼요. 아직 퇴직 전이라면 연금은 꼭 준비하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Q 위기감이 실제 위기로 바뀐 것은 역시나 경제적인 부분에서겠지요?
남편 퇴직하고나서 수입이 한정된 범위에서 빚 내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그래서 기존 아파트를 전세로 주고 규모를 축소한 거지요. 규모를 유지하려고 무리해서 살 이유가 없었어요. 전세금으로 빌라 구입하고 남는 돈과 저축을 합해서 오피스텔을 사서 월세 수익을 꾀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내 바로 옆에 회사 건물이 붙어 있어서 해가 잘 들지 않고 고물상과 철공소가 가까이에 있어서 먼지와 소음이 많은 곳이지만 지하철역에서 걸어올 수 있는 거리라는 점에서 이곳으로 정했어요. 1호선을 이용하는 남편이 일터에 가기에도 편하고요.
Q 노년에 생활의 규모를 줄이는 것이 현명하다지만 집이 좁아지면서 불편한 점은 없나요?
아내 남에게 보여주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지만 작은 집은 살아보니 당연히 불편해요. 거실 소파는 세 명이 앉기 어렵고 집에 누가 방문하면 편하게 얘기할 곳이 마땅찮고요. 무엇보다 저는 책이 많아서 여유가 되면 조금 더 큰 집으로 가고 싶기도 해요.
집을 줄이면서 이사 오기 전에 4개월 정도 걸려서 물건을 정리했는데 가족과 함께했던 물건이 없어지니 추억도 사라지는 것 같아서 아쉬웠어요. 물건은 중고 거래로 팔고 안 팔리는 건 버렸어요. 다행히 첫째는 직장에서 숙소를 지원해줘서 독립했고 둘째는 일본으로 목조건축을 공부하러 가서 그곳에서 취직해서 정착을 했어요.
Q 매일 직장에 나가던 남편이 종일 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면 아내가 받는 스트레스가 많다는 얘기를 흔히 듣습니다. 갈등은 없었나요?
아내 낮에 누워서 쉴 때도 신경이 쓰였지요. 게다가 남편은 27년간 회사원이었고 퇴직 전에는 비서와 운전기사까지 있어서 본인이 스스로 하는 게 없었지요. 기차표 예약도 말만 하면 해결이 되었는데 그걸 저에게 기대하니까 스트레스였어요. 그래서 남편이 뭔가 요구를 해도 자립을 하도록 바로 도와주지 않기도 했어요. 이 때문에 잔소리도 하고 갈등도 있고 부부싸움도 있었어요.
남편 천국이 따로 없더라고요. 내가 자유를 느끼는 시기였으니까. 집에서 실컷 책을 읽을 수 있고 회사 다닐 때는 못 읽던 책도 마음껏 읽고(웃음). 이 시간이 오래 못 갈 것이라는 불안감은 있었어요. 퇴직 후에야 아내의 생활을 알게 됐는데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는지 몰랐어요.
Q 두 분 다 지금 디지털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공부를 시작했나요?
아내 책을 좋아하고 철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고전평론가인 고미숙 씨가 운영하는 감이당에서 공부를 여러 해 하고 있었어요. 한번은 라는 책을 남편과 함께 읽었는데 저는 어려워서 휙휙 넘긴 책을 읽어내더라고요. 그래서 동양학을 공부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어요. 도서관 등에서 하는 강의를 들으러 다니다가 제대로 공부를 해보라고 해서 시작했지요. 남편이 2017년에 원광디지털대학에서 동양학을 전공하고 저는 웰빙문화대학원에서 자연건강학을 전공하고 있어요.
남편 처음 1년간은 동양학 용어를 외워야 하니까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어요. 3학년인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강의량이 많아서 느슨한 시간이 없어요.
아내 사실 공부하는 게 돈이 제일 적게 들면서 만족도는 높을 수 있어요. 과정이 고통스럽지만 지적호기심이 충족됐을 때 만족감이 크죠. 퇴직 후 부부 사이의 대화가 쉽지 않다고들 많이 얘기하는데, 저희는 공부라는 공통 관심사를 찾은 셈이에요.
Q 두 분의 요즘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남편 이번 학기에 수강한 학점이 24학점이에요.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꼼짝 않고 강의만 들어도 쉽지 않아요. 오후 4시부터 11시까지는 택배회사에서 일을 해요. 오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수업 내용을 암기하고요. 평일에 여유시간이 없으니 주말에 쉬거나 약속을 잡아요. 아니면 밀린 공부를 보충합니다. 한 달에 두 번 일요일에는 디지털 대학의 오프라인 모임에 나가고요.
아내 일주일에 두세 번 강의를 나가야 하니까 강의 준비도 하고 강의 기법이나 컴퓨터 엑셀 같은 걸 배우러 다녀요. 사람들과 만나서 50+ 세대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책을 쓰는데 참고하려고 이야기를 수집하지요.
Q 사무직인 대기업 임원으로 일했는데 늦은 나이에 현장직으로 일하는 것은 힘들지 않나요?
남편 육체노동을 하면서 훨씬 마음이 편해졌어요. 직장생활할 때는 저녁마다 술을 마시는 게 일의 연속이었는데 지금은 뱃살도 없어지고 8kg가량 체중도 줄었어요. 워낙 일이 많으니까 농담삼아 묵언수행한다고 얘기해요. 일하면서 1만 보 이상 걷게 되니 저절로 다이어트를 하고 주급도 받지요. 이전의 삶에서 남아있던 거품을 걷어내는 시간이 내 경우에는 2년이 걸렸어요.
Q 퇴직 이후 인간관계에 변화가 있나요?
남편 예전 직장 동료들과는 온라인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에요. 직장 다닐 때 만나기 어려웠던 고교 동문들과 다시 연락을 하게 됐고요. 무엇보다도 50플러스재단이나 디지털 대학쪽의 인연이 생기면서 만나는 사람 수는 줄었지만 질적으로 더 나은 관계들이 생긴 것이 달라진 점이에요.
아내 책을 쓰고 싶으면 책 쓰기 선생님을 찾아가서 사제지간도 되고 친구도 됩니다. 거기서 만난 분들과 서로 응원도 해주면서 인간관계의 폭이 넓어졌어요. 외국에 살 때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집에서 만났는데 지금은 집을 줄이면서 손님을 부르기가 어려워졌고 둘 다 바빠서 주말에도 밀린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친구들보다는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깊어졌어요.
Q 부부 관계에는 어떤 변화가 있나요?
아내 당신도 퇴직했으니까 밥해, 빨래해 이렇게 하진 않았어요. 이제 6년이 되니까 자연스럽게 삶에 녹아들면서 같이 살림을 나누게 됐는데 그러면서 진짜 부부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이전에 살던 방식과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생활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빨래를 안 하던 사람이 빨래를 하고 요리를 안 하던 사람이 요리를 하게 되는 거죠. 남편이 살림을 분담해주기 시작하면서 도움이 됐어요. 내가 블로그에 글 올릴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던가. 퇴직 이후에 남자가 많이 바뀌어야 해요. 여자도 물론 남편에게 의지하고 의존하던 삶에서 벗어나야 하고. 각자가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시간이 바로 남편의 퇴직 이후에 시작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남편 남편이 퇴직하면 수입이 줄어드는데 아내 쪽에서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봤어요. 이전의 일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고 얘기하는 아내와 합의가 안돼서 이혼하는 경우도 봤고요. 현실인식이 중요하지요.
Q 두 분의 생활 가운데 공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이 인상적인데요, 관련해서 앞으로 계획이 있나요?
남편 디지털 대학을 등록할 때는 3년쯤 되면 길이 보일 것으로 기대했지만 여전히 앞일이 보이지는 않아요. 학당 쪽으로 방법을 찾거나 상담 쪽으로 길을 찾거나.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어요. 아, 제가 방탄소년단(BTS) 팬이거든요. BTS 팬클럽 아미(army) 친구들에게 BTS의 노래에 담긴 한국 문화와 동양사상을 알려주고 싶어요. 해외의 아미들 가운데 동양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에게 온라인 채널로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아내 두 사람이 공부가 끝나면 학당도 하고 계속 책도 쓰고 싶어요. 이번에 퇴직 관련 책을 쓰면서 기업의 퇴직 대상자를 대상으로 강의도 해보고 싶어요. 퇴직 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과 퇴직 후의 가정 경제, 부부 관계에 대한 강의를요.
기획 이인철 기자 글&사진 이은석(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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