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없는 노인들을 품어준 사랑의 정원
전라북도 익산시 황등면에는 지난해 9월 문을 연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잠실야구장만 한 크기인 12만㎡의 정원에는 500여 그루의 메타세쿼이아가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섬잣나무, 공작단풍, 배롱나무, 향나무, 소나무 등 1400주가 넘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계절마다 수선화, 튤립, 목련, 양귀비가 피어나는 화단은 한 폭의 그림. 그리고 이 정원에는 풍경보다 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다. 50여 년 동안 이곳을 지키고 있는 94세 박영옥 이사장의 사랑과 헌신의 이야기다.
풍광이 아름다워서 이곳을 수목원으로 아는 사람이 많겠어요.
‘아가페 정양원’은 무의탁 노인들이 여생을 보내는 무료 양로원입니다. 노인들이 지내는 곳이니, 꽃과 나무를 심고 오솔길을 내어 산책로를 좀 신경 써서 가꾸었지요. 양로원 운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나무를 심기 시작했어요. 일종의 관상수 농장으로 운영한 것이지요. 그러다 코로나19가 길어지면서 지친 시민들이 좋은 공기를 마시며 쉴 수 있는 곳으로 쓰이면 좋겠다 싶어 정원을 무상으로 개방했어요. 좋게 봐주셔서 주말에는 2000여 명이 다녀갈 정도로 소문이 났네요.
아가페 정양원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저는 초등학교 교사였어요. 천주교 신자인 제자들을 따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오신다는 신부님을 뵈러 간 곳에서 박희운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사실 사범대학에 다닐 때부터 수녀원에 입소하기를 희망하고 있었어요. 그런 제 바람을 들으시고 서정수 알렉시오 신부님이라는 분을 소개해주셨고, 신부님으로부터 소화 데레사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서울 수유리에 있는 갈멜봉쇄수녀원에 입소하도록 추천해주셨어요. 입소 소식이 올 때까지 신부님이 계시던 개척성당에서 사무장으로 일했는데 그 길로 신부님의 일을 계속 돕게 되었습니다. 본래 서신부님의 평생 숙원사업은 자선사업이셨어요.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 30여명을 가족으로 모시고 싶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복지라는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이라 국가에서 보조를 받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었죠. 그렇게 차근차근 양로원을 지을 수 있는 곳을 물색하던 중 마침 이 곳 황등면에서 19,000평의 농장을 판다는 소식이 들려서 제가 바로 샀습니다. 2년에 걸쳐 근처에 있는 땅도 함께 매입해 총 30,000평의 터를 마련할 수 있었지요.
서신부님께서는 65세로 시목에서 은퇴한 이후, 본격적으로 이 곳에 많은 나무를 심고 가꾸셨습니다. 고결한 이념의 사제이자 참 부지런한 농부셨지요. 그리고 1983년에 정식으로 여자양로원 열었고, 1985년에 전주에 있는 농장터에 남자양로원을 지을 계획을 앞두고, 1월에 선종하셨습니다. 이후 제가 서신부님의 이념을 이어받아 계속 양로원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젊은 여자가 이 넓은 땅을 사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저 혼자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제가 땅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덕분이었어요.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건축용 목재를 만들어 파는 목상을 하셨어요. 그렇게 번 돈으로 아들, 딸 가리지 않고 대학 교육까지 시키셨고, 돌아가실 때도 딸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셨지요. 물질적인 유산만 물려주셨다면 제가 그 큰 돈을 이렇게 쓰지 않았을 거예요. 더 큰 돈을 벌려고 욕심을 부렸거나 엉뚱한 곳에 탕진했겠지요.
아버지는 사업가인 동시에 때마다 학교에 큰돈을 기부한 후원가였어요. 그리고 자식들에게 도 늘 “밑지고 살아라” “한 발 손해 보고 살자” 그렇게 성경 말씀 같은 얘기를 평생 하셨죠. 그런 아버지가 늘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웠어요. 덕분에 저도 아버지가 물려주신 큰 돈을 망설임 없이 자선사업에 쓸 수 있었어요.
처음에 양로원을 운영하면서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허가에 대한 개념도 없어서 무턱대고 시작부터 했어요. 이곳을 찾아오는 노인들을 보살피는 것에만 급급했으니까요. 그런데 양로원 문을 열고 1년여 쯤 지났을 무렵 세무서에서 찾아와 방 곳곳을 들여다보며 조사를 했습니다. 왜 그러시냐 물었더니 익산에 무슨 호화 주택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와서 보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허가를 받고, 법인을 설립하는 등 행정적 절차를 너무 몰랐던 겁니다. 좋은 일이면 그저 괜찮을 줄 알았던 거지요. 뒤늦게 서류를 가지고 여기저기 뛰어다닌 끝에 몇 년 만에 정식으로 개원을 했습니다.
농사라곤 일체 모르고 살다가 나무 심고, 꽃 가꾸며 너무 힘들어 엉엉 운 날도 많았지요. 지금 생각하면 무식하고 안목도 없는 제가 덜컥 일부터 시작해서 참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었어요. 하지만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나무를 많이 심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양로원을 무료로 운영하려다보니 수입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조경수를 팔아 비용을 충당하려고 나무를 심었습니다. 풍광이 좋고 공기가 맑으니 나무와 꽃이 유난히 잘 자랐고요. 그렇게 한 해 두 해 키우고 가꾼 것이 40년이 넘으면서 이렇게 큰 정원이 되었습니다.
사실 훨씬 멋있고 근사하게 가꿔놓은 곳도 많은데 우리 정원이 보기가 좋다고 느끼시는지 사진 촬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그래서 여기가 좋다고들 하는데 우리 할머니들만 누리면 되겠나 싶어 개방하게 되었지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니까 어떤 이는 입장료를 받으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건 나눔이 아니잖아요. 신부님이 생전에 “천주교 신자만이 아니라, 부처님을 믿는 사람들도 우리 집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러 들어올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종교에 상관없이, 돈이 있든 없든, 누구나 편하게 드나드는 집을 만들자고요. 그래서 그렇게 한 것 뿐입니다.
장학 사업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 제5회 라이나50+어워즈에서사회공헌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 1억 원도 그대로 장학회에 기부하셨다고요.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번에 정원이 개방되면서 탄로가 나버렸습니다(웃음). 장학재단을 만들기 전에는 전라북도 지역의 신학생과 수녀원 학생들에게 학비 일부를 후원해 주는 정도였는데, 제가 2011년에 크게 아팠습니다. 그때는 정말 이제 죽는구나 싶어 제가 가진 건 다 장학금으로 쓰이도록 미리 정해 두었죠. 그런데 감사하게도 건강을 되찾았고, 그 돈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해 해마다 55명씩 장학생을 선발해서 300만 원에서 많게는 600만 원까지 장학금을 주었습니다.
일평생을 끊임없이 나누며 살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제가 특별히 한 건 없어요. 제 역할도, 제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환경과 주변 사람까지 그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제게 주어진 것이었을 뿐이죠. 자랑스러울 것 없는 삶이지만, 적어도 후회스럽지는 않습니다. 감사한 일이죠. 아흔이 넘어 더 바랄 것도 없는 삶입니다만, 제가 가더라도 우리 아가페 정양원과 소화장학재단이 잘 운영되어서 다른 단체에도 도움을 주고 모범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그것이 저의 남은 꿈입니다.
소화장학재단
- 전화번호 : 02-592-5100
- 홈페이지 : www.sohwafoundatio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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