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시절의 야반도주,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었습니다”
[김종수의 농구人터뷰(72)] '팡팡' 방지윤
“지금은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방성윤 선수랑 무슨 관계냐고 물어보시는 분들도 종종 계셨어요. 방씨성을 가진 농구선수가 많지않고 이름도 비슷해서 그런 듯 해요. 학창 시절부터 이름으로 얽힌 소소한 에피소드가 좀 있죠. 실제로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데요. 제 이름은 언니들에서 이어져온 돌림자랍니다”
WKBL 신세계 쿨캣에서 슈팅가드로 활약하던 ‘팡팡' 방지윤(41‧174.5cm)을 기억하는 팬들은 많지않다. 청소년 시절부터 재능을 인정받았고 남다른 미모로 인해 남성 팬들도 적지않았지만 프로에서 뛴 기간이 적었던 관계로 쉽게 잊혀졌다고보는게 맞다. 때문에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조금만 선수생활을 오래 가져갔다면 기량과 인기를 겸비한 선수가 되었을텐데…'라는 말로 적지않은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
“어찌보면 제가 잘알려지지 않은 탓이 큰 듯 싶어요. 방성윤 선수가 워낙 유명한 스타이기도했지만 그래도 여성부와 남성부는 다르잖아요. 선수 생활을 하다보면 좋을 때도 있고 반대인 경우도 적지않아요. 특히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때 견디어내는게 중요한데 그 순간을 이겨내지 못한 것 같아요. 결국 프로 생활을 짧게 가져갈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 그 사실을 깨닫고 어느 정도 농구에 눈이 띄여졌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죠”
2001 WKBL 신입선수 선발회에서 전체 6순위로 신세계에 선발됐던 방지윤은 2005년까지 총 76경기를 뛰는데 그쳤다. 당시 신세계 전력이 워낙 탄탄했던 관계로 주로 식스맨으로 뛰며 평균 9분 27초 동안 3.09득점, 0.72리바운드, 0.3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004년 우리은행전에서 35분 11초를 뛰며 18득점, 5리바운드, 2스틸, 1블록슛으로 공수에서 맹활약을 펼치기도 했으나 들쭉날쭉한 출전시간으로 인해 페이스를 이어가지 못했다.
“보통 신입선수 선발회에서 뽑히면 축하의 목소리가 쏟아지거든요. 저같은 경우 위로해주시는 분들도 적지않았어요. 하필 당시 최강팀으로 불리던 신세계에 지명되었거든요. 신세계가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에요. 워낙 강한 팀이라 신인이 출장시간을 얻기 쉽지않았던 이유카 컸죠. 그러다 주축선수들이 빠져나간 이후에는 내리막길을 타서 하위권을 맴돌았어요. 그러다보니 이번에는 최대어급 신인들이 팀에 들어왔습니다. 정말이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어요. 물론 핑계입니다. 의지가 있었다면 더욱 열심히 노력해서 실력으로 이겨냈어야죠”
어둠이 있으면 빛도 있다. 방지윤은 지금도 그 시절을 후회하고있지만 단순히 아쉬워하며 세월을 보내고있지만은 않다. 굴곡많았던 선수시절을 되새기며 지도자 생활을 하는데 있어 자양분으로 삼았다. 제자들만큼은 본인처럼 아쉬운 선택을 하지않기를 바라며 당장의 실력향상 보다 농구에 대한 사랑과 힘들 때 견딜 수 있는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모교 숙명여고에서 10여년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숙명여중으로 자리를 옮겨 지도자 생활을 이어갈 예정인 방지윤 코치를 만나 농구에 대한 그녀의 생각과 후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들어보았다.
“다양한 경험을 쌓아가면서 지도자로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아! 자리에 변화가 있었네요. 모교인 숙명여고에서 10여년동안 코치 생활을 한 것은 아시죠? 중고농구연맹에서 10년 근속상도 받았답니다.(웃음) 하지만 다음달부터는 숙명여중에서 코치생활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숙명여중 코치선생님께서 그만두셨거든요. 그 빈자리로 제가 가게된 것이죠. 그 과정에서 ’아니 왜?‘라며 의아해하시거나 ’맨땅에 헤딩하려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반대하는 분들도 계셨어요. 학교가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고 구태여 오랫동안 맡고있던 익숙한 여고를 떠나 여중으로 갈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죠. 저도 많이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에요. 저희랑 연계관계에 있던 서초초등학교 농구부가 해체됐거든요. 그러다보니 숙명여중 입장에서는 선수 수급이 어려워졌죠. 스카웃도 쉽지않은 상황이고요. 당장은 숙명여고의 전력이 나쁘지않지만 길게보면 위기거든요. 숙명여중이 흔들리면 자연스레 숙명여고까지 영향이 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뿌리가 되는 숙명여중으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었어요.
Q.어찌보면 일부러 더 어려운 길로 가는 것이네요.
쉽지않겠죠. 더욱이 10여년 동안 숙명여고에서만 있던 제 입장에서는 더더욱요. 여고부는 아무래도 어느 정도 만들어진 친구들을 다듬는 과정이거든요. 그래서 더 어린 친구들을 가르치며 기초부터 나쁜 습관까지 잡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있다가 마침 여중에 자리가 비어서 가게 됐죠. 오해는 하지마세요. 여고부 코치했다고 그 이름값으로 무턱대고 들어가게된 것은 아니고요. 지원서 내고 면접까지 거친후 합격을 해서 코치로 임명받게되 었습니다. 모교 출신에 여고부에서 오랜시간 지도자 생활을 했다는 부분이 플러스로 작용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과정 자체는 절차대로 밟아나갔어요. 여고부같은 경우 현재는 공석인데 채용공고를 냈으니 가까운 시일내에 새로운 선생님이 오실겁니다. 여고와 여중은 분명히 다를 것인지라 새로이 배워야할 부분도 많고 한동안은 고생길이 활짝 열렸죠.(웃음) 그래도 제가 자발적으로한 선택이니까 열심히 한번 해보겠습니다.
Q.숙명여고 코치로 있으면서 U18 한국여자농구대표팀 감독도 맡았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아, 이래저래 운이 좋았죠. 제가 2016년에 코치로 처음 합류하게 되었어요. 그때 지도자 5년차였는데 무엇인가 좀 더 경험을 쌓고 배워야되겠다는 의욕이 막 올라오더라고요. 그때 춘천여고 김영민 감독님이 대표팀을 이끌고 계셨는데 저도 함께 하고싶다고 학교에 의견을 내비쳤는데 그 얘기를 들으셨는지 전화를 하셔서 코치를 할 수 있겠냐고 물어오시더라고요. 저로서는 기뻤죠. 새로운 무대를 경험하면서 지도자로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거든요. 이후에도 운이 좋게 감독님이 바뀌셔도 계속해서 기회가 주어졌고 3차례나 코치로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후 경력이 쌓이자 저도 한번 감독으로서 팀을 이끌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원을 해서 합격한 다음 맡게 되었죠. 개인적으로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지도자로서 국제대회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큰 배움의 장이거니와 사령탑으로서의 책임감 등도 절실히 느꼈습니다.
Q.생뚱맞은 질문같지만 혹시 이름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같은 것 있을까요?
아, 방성윤 선수 말씀하시는군요? 한때 종종 그런 질문을 좀 받기는 했어요. 무슨 관계냐고요?(웃음) 방씨 농구선수도 많지않거니와 이름이 좀 비슷하니까요. 신세계에서 프로선수 생활을 할 때 였을거에요. 저희 둘째 언니 이름이 방정윤이거든요. 병원 업무과에서 일하고 있는데 농구선수 동생이 있다고 하니까 고객분들께서 혹시 동생이 방성윤이냐고 묻고 그런 적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학창시절에도 저보다는 방성윤선수가 인지도가 많이 높았잖아요. 그래서 괜스레 이름으로 궁금해하거나 장난치는 분들도 있었어요. 뭐, 딱히 기분나쁘거나 그런적은 없어요. 정말 잘나갔던 선수잖아요. 막연히 나중에 나도 유명해지면 같이 인터뷰 한번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은 해봤어요. 물론 이뤄지지 않았지만요.
“은퇴요? 새벽에 짐싸서 담넘어 야반도주했죠”
Q.은퇴 이후 부지런히 뛰신 것 같습니다.
워낙 부지런한 분들이 많으시니까 그 단어가 제게 어울릴까 싶기는하지만 은퇴후 좀 더 열심히 해보려고 노력 한 것은 사실입니다. 2001년 숙명여고 졸업하고 바로 신세계 쿨캣 입단하고 2005년도까지 있다가, 2006~2007년도에는 대구 동아백화점(현 대구시청) 실업팀에서 뛰었어요. 그러다가 2009년부터 서경화 감독님이 농구부를 이끌고있던 용인대학교를 진학했어요.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대학의 필요성을 느끼고있었는데 프로시절 저를 이끌어주셨던 이문규 선생님께서 미래를 위해서라도 대학을 가는게 좋을 듯 싶다고하셔서 선택을 하게된거죠. 그러다가 졸업하자마자 숙명여고에서 불러주셔서 바로 지도자생활을 시작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Q.지도자로서 가는 길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연결된 듯 싶어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매우 감사한일이죠. 아쉬운 프로생활을 생각했을 때 더더욱 그렇습니다. 솔직히 롱런한 것도, 이름을 날린 것도 아니잖아요. 어떻게 하다보니 잠깐 우당탕탕하다가 그만두게 되어 버린지라 지금 생각해도 아쉽게 느껴집니다. 프로에서 나올 때 짐싸서 도망나왔거든요. 새벽에 담 넘어가지고…, 말그 대로 야반도주였죠. 미리 형부한테 와달라고 부탁해서 도움받고요. 되게 철이 없었어요. 당시 5년차였고 일본전지훈련이 잡혀있던 상황이었거든요. 통역언니한테 부탁해서 몰래 여권빼내고 말그대로 007 탈출작전이었습니다.(웃음) 당시 저희팀에서는 선수들을 오래 데리고 있으려고하는 분위기였어요. 나이가 어렸던 탓인지는 몰라도 차마 대놓고 은퇴하겠다고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런행동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죠. 왜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요.
Q.지도자 생활을 꾸준하게 오래 가져가고 계세요.
워낙 오랫동안 지도자 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이 많아서 제가 거기에 끼기에는 많이 부족하겠지만 제 나이를 생각하면 꾸준하게 하고 있는 듯 싶기도 해요. 대학졸업 후부터 한자리에서 계속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으니까요. 앞으로도 변함없는 마음으로 지도자의 길을 가고 싶습니다. 사실 선수시절 마무리도 그렇게하고서 같은 실수를 또 반복한다면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는것이죠. 프로무대를 떠난 이후 후회도 많이하고 반성도 깊게했습니다. 특히 임영희 언니를 보면서 배운게 많죠. 언니같은 경우도 처음부터 주전이 아니었잖아요. 무명의 설움, 백업생활이 정말 길었어요. 그런데도 끝까지 버티어내고 대기만성형으로 이름을 남긴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하죠. 왜 나는 언니처럼 하지못했을까 싶은 생각도 들더라고요. 하지만 엎지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잖아요. 지난 시간을 아쉬워하고 힘들어하기보다 실수를 통해 성숙하고 성장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더라고요. 머릿속으로만하는 반성은 의미가 없잖아요. 사고를 치고 그런 세월이 있다보니 제자들을 보는 시선도 좀 더 깊어지고 그 마음까지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Q.늘 밝은 표정과 친절한 말투가 인상적이세요. 아쉽게 선수생활을 마무리했음에도 나쁘게 이미지가 박히지않은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저요?(웃음) 현재의 표정, 말투 이런 것은 지도자 생활하면서 만들어진 부분이 커요. 현역시절에는 지금과 조금 달랐어요. 어두운 성격까지는 아니었지만 막내급이다보니 혼자 기가죽어서 눈치보기도하고 선수로서도 잘 풀리지않아 밝은 모습은 잘 나오지않았어요. 감정 표현에도 서툴렀고요. 지도자 생활 초반에도 그런 성향이 이어져서 힘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하지만 지도자는 선수와 다르잖아요. 선수입장이었으면 내가 이런 성향인데 뭐 어쩌라고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지도자는 나아닌 다른이도 챙겨야하는지라 변하지않으면 안되겠더라고요. 그렇게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고 살다보니 아쉬운 부분도 상당부분 고쳐지고 또 제자들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웃고 표정도 밝아지지 않았나 싶어요.
Q.표정이 밝아졌다는 것은 마음에서 여유가 생겼다는 뜻으로도 들려요.
맞아요. 나이를 먹을수록 사고가 유연하지 못하고 딱딱해질 공산이 크다고 하더라고요. 자신만의 신념같은게 강해진다고나 할까요. 스스로 그것을 버리고 다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할 수 있어야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신인 시절 (정)선민 언니, (양)정옥 언니, (장)선형언니 등이 팀내 주축이었거든요. 하늘같은 선배들이기도해서 말도 함부로 못걸었거든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언니들이 어렵게 한 것은 없었는데 제가 혼자 얼어붙었던거죠. 하지만 그렇게 알았던 인연이 사회생활 할 때는 큰 도움이 되었어요. 늘 챙겨주시고 좋은말도 많이 해주는데 여러 가지로 힘을 많이 얻게되요. 신세계 가족으로 들어가서 얻은 가장 큰 재산이라고 할수있죠.
“성급한 은퇴였지만 배운 것도 많았습니다”
Q.프로 은퇴후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아요.
신세계에서 나와서 대학 3년, 실업 2년 동안 선수생활을 더 했잖아요. 그 시기도 제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에요. 사회 생활도 뒤늦게 배우고 여러 가지로 성장 할 수 있었던 시기거든요. 프로있을 때는 말 그대로 철부지였죠. 힘든 일이 닥치면 곧이 곧대로 힘들다고만 느꼈는데 이후 대학, 실업생활을 거치면서 다른 쪽으로 생각할 줄도 알게됐습니다. 지도자를 하면서는 완전히 달라졌다고해도 과언이 아니고요. 무엇보다 당장의 힘듬보다 멀리 바라보면서 참을줄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Q.아무리 그래도 단순히 훈련이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야반도주를 하지는 않았을 듯 싶어요. 다른 요인도 겹쳤을 듯 싶어요.
맞습니다. 오로지 힘든 것만으로 그만둘거면 학창 시절에 이미 농구를 때려쳤겠죠. 프로까지 오지도 못하고요. 아시다시피 이문규 감독님이 신세계를 이끌던 시절에는 팀이 정말 강했어요. 정규리그에서 단 4패만을 허용하고 우승한적도 있을 정도로 적수가 없었죠. 그러다가 김윤호 감독님으로 바뀐후 삽시간에 최하위권팀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물론 온전히 그분만의 잘못은 아니었겠죠. 농구라는게 좋을 때가 있으면 나쁠 때도 있는 것이고 전력적으로 정점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사이클이기도 했으니까요. 어쨌거나 팀이 최하위권팀에 머무르다 보니까 신인드래프트때 최대어급 선수를 뽑게 됐어요.
Q.아무래도 밀릴 수밖에 없었겠네요.
그렇죠. 팀입장에서는 당연히 좋은 일이었겠지만 제입장에서는 점점 더 힘들어지더라고요. 그렇지않아도 팀내에서 7~8번째 선수였는데 1순위급 선수가 팀에 들어오면 그나마 조금 가져가던 출장시간이 더 깎일 수밖에 없었죠. 아무래도 팀으로서는 기존 식스맨을 성장시키기보다는 높은 순위로 들어온 신인을 키우려고 할테니까요. 언니들이야 원체 검증된 선수들이고 저보다 연장자니까 크게 신경을 쓰지않았지만 들어온지 얼마안된 후배들에게 밀려 벤치를 지키려니 정신적으로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와중에 상처 입을 일도 종종 일어났고 당시 멘탈로는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4년차때였을거에요. 조금씩 출장시간이 늘어가면서 자신감을 찾아가려던 찰나 발목을 크게 다쳐서 수술을 하고말았어요. 하필이면 경기력이 올라오려던 때에 그렇게되어서 너무 아쉽더라고요. 어쨌든 좋았던 페이스를 잃어버리기싫어서 수술후 재활도 열심히했습니다. 그렇게 복귀를 앞두고있던 순간 이번에는 허리를 빼끗하고 말았죠. 부상으로 고생하셨던 선후배들은 알거에요. 몸의 고통보다는 심적인 고통이 더 심하더라고요. 자꾸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했던 가운데 이를 악물고 잡고있던 희망의 끈이 뚝하고 끊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물론 더 힘든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버티어내서 기회를 잡은 선수들도 있어요. 그만큼 당시의 제가 멘탈적으로 약했다고 보면 맞을거에요. 당시의 그릇으로는 그만큼 밖에 견디지 못했고 결국 야밤에 도망치듯 나가버리게 됐죠.
Q.나이도 어렸고 성격적으로도 ’이러 이러해서 선수 생활을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하기가 많이 어려웠나봐요?
어려웠습니다. 당시 사령탑이 정인교 감독님이셨거든요. 코치를 하시다가 막 감독으로 부임하셨던 때였어요. 감독님을 찾아 뵙고 ‘저 힘들어서 은퇴하겠습니다’라고 말했더니 바로 ‘알았어’라고 짧게 대답하시더라고요. 어쨌든간에 감독님 허락은 어렵지않게 받아냈지만 농구단 부장님은 다르셨어요. ‘왜 그렇게 허망하게 그만두려고 하냐’며 은퇴를 쉽게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생각해보면 고마운 분이시지만 그때는 빨리 그만두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어쩌면 저를 뽑아주셨던 이문규 감독님이 계속 계셨더라면 은퇴 결심을 그렇게 빨리 마음먹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어요.
Q.이문규 감독의 신뢰가 꽤 탄탄했었나봐요?
그렇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당시 신세계 주전 멤버가 (정)선민 언니, (양)정옥 언니, (장)선형언니, (이)언주 언니에 외국인선수로 구성되었는데 저뿐 아니라 대부분 백업멤버들이 출전시간을 보장받지 못하던 실정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감독님이 저를 키워주려고하신다. 기회를 주려고 하신다는 마음이 느껴졌어요. 적어도 이감독님과 함께라면 반드시 기회는 올거야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죠. 물론 이후 감독님들이 나쁘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에요. 단지 사람간에도 궁합이라는게 있는데 이감독님과 그런 면에서 잘 맞지 않았나 싶은 것 뿐입니다. 당시의 경험때문인지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뒤처지는 아이들한테 더 마음이 가더라고요. 저는 충분히 경험했으니까 그 심정 알고있잖아요.
“악으로 깡으로…, 플레이 스타일까지 바꾸었습니다”
Q.김은혜 해설위원 얘기를 들어보니까 고교 시절에는 박빙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김)은혜가 좋게봐줬네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나름 괜찮게 했던 것 같아요. 잘한다는 소리도 곧잘 듣고 했으니까요. 지금도 기억나는게 청소년대표에 선발됐던 7명이 있는데 한자리에서 신인드래프트를 지켜봤거든요. 보통은 지명이 되면 축하해주는 분위기인데 저는 위로해주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웃음) 워낙 신세계가 강팀이라 신인이 밀고 들어갈 틈이 없었거든요. 차라리 금호생명에 지명되기를 원했어요. 창단된지 얼마되지않아 선수층이 두텁지않았던 이유가 크죠. 아무래도 신인때부터 기회를 많이 받으면 성장 속도 자체가 다를 수 있으니까요. 물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어쩌면 핑계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정말 열심히 간절하게 하는 선수에게는 시기의 차이일뿐 기회는 오게되어있으니까요.
Q.좀더 빨리 깨달았으면 더 잘 할수 있었을 듯 싶어요.
그럼요. 프로 은퇴 후 대학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 어느 순간 농구에 눈이 떠지더라고요. 지금 프로에서 뛰었으면 정말 잘했을텐데부터 온갖 생각이 다들었습니다. 선수마다 자신의 시기가 있는데 저는 20대 후반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제 스스로 저의 한계를 너무 빨리 그어버렸던 것이죠. 그래서 지도자를 하면서도 제자들에게 자주 말하는게 있어요. (박)지수같이 처음부터 잘하는 선수는 많지않다. 기다릴줄 알아야 좋은 선수가 될 수 있다고요.
Q.선수 방지윤의 플레이 스타일은 어땠을까요?
생각해보면 저는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농구를 잘 배우지 못한 것 같아요. 선생님들이 잘 가르쳐주지 못했다는 것이 아닌 제가 잘못된 방향으로 갔다는 얘기입니다. 플레이 스타일은 좋게말하면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였지만 냉정하게 짚어서 표현하면 독선적인 막농구에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또래중에서 개인기가 조금 좋다는 이유만으로 개인플레이도 많이하고 심할 때는 1대5에 가까운 움직임도 많이 가져갔습니다. 3점슛 거리도 멀었고 미드레인지점퍼에 자신감이 있었어요. 전형적인 공격형이었죠. 쓸데없이 자부심만 넘치던 시기가 아니었던가 싶어요. 그러다가 프로에가서 쓴맛을 제대로 봤죠. 한번은 (양)정옥 언니와 함께 백코트 듀오로 나와 연습경기를 치렀는데 공을 거의 잡아보지 못했어요.
Q.정말요? 충격이 컸겠어요.
컸죠. 발도 느렸고 흐름을 읽는 능력 자체가 너무 떨어졌습니다. 수비도 자주 지적받았고요. 공수 모두에서 밀려버리게 되니 무엇부터 해야할까 고민이 커졌어요. 그렇게 무색무취로 지내다가 저만의 스타일을 만드는데까지 4~5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저는 3점슛과 미들슛을 특기로 하는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슈팅가드였어요. 한데 재미있는 것은 5년차 때는 수비수로 경기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에요. 어찌보면 분위기 전환용? 어느덧 5년차인데 제대로 자리도 못잡았고 후배들에게는 밀리고 있고…, 경기는 뛰고싶은데 현실은 그렇지않자 마음깊은 곳에서부터 독기는 올라왔던거죠. 무엇이든지해서 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어찌보면 그때가 전체적인 밸런스는 더 좋지않았나 싶어요. 그러고나서 성장할 틈도 없이 스스로 은퇴해버리고 말았지만요. 한라운드를 온전히 주전으로 뛰는 등 한창 경기력이 올라오려고할 때 발목을 다친 것이 치명적이지 않았나 싶어요. 출전 시간도 늘어나고 할만하다고 느낄 무렵 크게 다쳐버렸으니까요.
Q.당시 팀 기강은 어땠나요?
예전 선배님들이 들으면 ‘에이, 그 정도로…’ 그렇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때도 나름대로는 힘든 시절이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 친구들보다는 예전 선배님들 세대에 더 가까웠다고 보는게 맞을거에요 그래서 나름대로의 기강도 존재했죠. 특히 신세계는 우리은행과 더불어서 분위기가 세다는 소문이 나서 신인들이 주저하는 팀으로 꼽혔죠.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알려진 삼성생명을 선호하는 친구들이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가고싶다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또 팀마다 각자의 장단점이 있었을테니까요. 아무튼 초년병 시절에는 훈련도 힘들지만 그 외 다른 부분에서도 모두 힘들다고 느껴졌어요. 지금처럼 선수를 위한 다양한 시설이 제대로 구비된 시절이 아니었거든요. 빨래도 삶아서 해야하고 물도 끓여서 먹고, 청소도 장난아니었어요. 운동 외에도 할게 정말 많았죠. 그게 나아진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선배님들 얘기를 들어보면 과거에는 어땠을지 도무지 상상이 안가요. 기타 지켜야될 여러 가지 예절도 적지않게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런 부분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꽤 됐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너무 삭막하게만 표현한 것 같은데 반대로 정도 많고 챙겨주는 부분도 강해서 가족같은 느낌도 받고 그랬어요.
Q.기억에 남는 외국인선수로는 누가 있을까요?
저는 엘레나 비어드요. 워낙 운동능력과 개인기가 좋아서 팀내 주포 역할을 맡기도 했죠. 득점력이 대단했어요. 한번 폭발하면 어지간하면 제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으니까요. 기량도 기량이지만 성격이 무척 좋고 밝은 친구라는 점에서 잊혀지지가 않아요. 저랑 동갑내기에 포지션도 같아서 친하게 지냈는데 저를 ‘팡팡’이라는 애칭으로 불러주고 그랬어요. 거기에 한국말을 조금씩 배워서 감독님 이름을 부르며 ‘000 미친놈’이런 식으로 장난도 치고 그랬던 기억도 나요. 외국인선수로 왔으면서도 팀내에서 분위기메이커 역할까지 했죠.
Q.팡팡 외에 또 다른 별명은 없었나요?
제가 잘 알려진 선수는 아니라서 딱히 유명한 별명은 없어요. 성을 따서 ‘방가방가’ 혹은 ‘방가’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는데요, 아! (김)은혜같은 경우 저한테 ‘이모’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제가 좀 또래에 비해서 성숙한 얼굴이라서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오죽하면 고등학교때 대학생 언니들이 부르는 별명이 ‘보고 또 보고’였겠어요. 고등학생 얼굴같지않은 노안이라서 저를 보면 너 아직도 졸업안했니?라고 장난도 자주 치셨던 기억이 나요. 제가 나이에 맞게 얼굴을 찾은 것은 25살 정도부터 랍니다. 다행히 어릴 때 노안인 친구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덜 변한다고하던데 저도 이제는 나이보다 더 들어보인다는 소리는 잘 안듣게되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스스로 느끼고 움직이게끔 방향을 잡아주고 싶습니다”
Q.예전에는 폭력도 심했다고 들었는데 코치님 정도 세대면 거의 없어졌다고 보는게 맞겠죠?
상당 부분 남아있기도 했어요. 특히 고등학교 때까지는 때리면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적지않았다고 기억됩니다. 운좋게(?)도 저는 따귀맞고 엎드려서 엉덩이 맞는 정도에 그쳤지만 주먹에 맞아서 코뼈가 부러지는 친구도 본적이 있어요. 맞는 학생들이야 당연스레 안타깝지만 때리는 선생님도 어떤 의미에서는 참 대단했죠.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폭력에 가까운 아니 그냥 폭력이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겠네요. 저도 맞으면서 운동을 했고 이후 지도자 생활을 하다보니까 이른바 ‘사랑의 매’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되더라고요.
Q.지금이야 많이들 없어지고 있는 추세지만 예전에는 왜 그렇게 때렸을까요?
빠른 방법을 택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선수를 온전히 이해시키고 동기부여를 해가면서 성장시키기에는 당장의 성적이 급하거든요. 가장 빠르게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방법이 무엇이겠어요. 폭력과 체벌로서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것이죠. 맞기싫어서라도 필사적으로 하게되니까요. 그러다보면 폭력이 폭력을 부른다고 때리는 선생님들은 물론 맞는 학생들까지도 당연하다고 상황을 인식해버립니다 특히 당장의 성적에 지도자직이 걸려있는 경우에는 폭력의 강도가 더 세질 수밖에 없고 제자가 아프다고하면 걱정보다는 신경질부터 나게되는 것이죠.
Q.즐기는 농구는 기대하기 힘들었겠네요.
그런 분위기에서 즐길 수 있는 선수는 거의 없겠죠. 그저 맞지않기위해 수동적으로 말을 듣게되죠. 단기적으로 볼 때는 때리면서 가르치는 쪽이 효과가 크기도 해요. 특히 많이 때리기로 악명높은 팀의 선수들을 보면 눈빛부터가 다르거든요. 움직임도 다르고요. 물론 좋은 방향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도에서건 폭력은 그 자체로 용납될 수 없는 방법이고 무엇보다 선수들에게 농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가 있어요.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후 성장해서 프로에 가서도 지극히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폭력, 기합 등에 견디는 힘은 강하겠지만 스스로 알아서하는 방식에 매우 취약해지죠. 폭력을 내세운 지도방식이 위험한 이유입니다.
Q.그렇다면 지도자 방지윤의 지도철학은 무엇일까요?
아직도 부족한게 많은 사람인지라 지도철학이라고하면 너무 거창하고요. 적어도 제가 프로때 했던 실수나 아쉬움을 제자들은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 그래야만 하는지는 제가 톡톡히 겪어서 알고있으니 그런 부분에서 잘 이해하게끔 소통을 자주 하려고 해요. 더불어 수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게 아닌 동기부여를 가지고 스스로 찾아서 움직이는 선수들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큽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거든요. 해당 지도자가 평생 따라다닐 것도 아니고요. 그러한 방향을 잘 잡아주고 싶어요.
Q.마지막으로 농구인 방지윤을 응원하는 팬 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많이 유명하지 않았음에도 한결같은 응원을 보내주셨던 팬분들이 계셨고 덕분에 힘든 시절 큰 힘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때문에 선수에게 있어 팬분들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너무도 잘알고있습니다. 응원해주신 팬분들에게 지도자로서도 꾸준히 노력하고 성장하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도 큽니다. 이런 마음은 다른 선수 출신들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추운 겨울이 끝나고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 오고 있네요. 따스한 봄햇살처럼 밝고 좋은 일 가득하시기를 기원할께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