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세에 은퇴한 박헌정 ”게으를 권리 찾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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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정 수필가는 쉰살이 되기 전 자발적 은퇴에 성공했다. 은퇴 후 원 없이 늦잠도 자고, 원하는 책도 마음껏 읽는다. 부부가 함께 때 되면 국내외로 여행을 다닌다. 그냥 관광이 아닌 길게 머물고 살아보는 여행이다. [더,오래]에 ‘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을 연재 중인 그는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논다. 그가 말하는 원초적 놀기란 무엇일까.
Q : 언제, 어떤 계기로 은퇴했나?
A : 2016년 만 48세에 명예퇴직했다. 금융권 재보험회사를 마지막으로 25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20대 초부터 피상적으로 ‘20년 노동’을 생각했다. 20년 이상 기획실이나 경영전략팀에서 근무했다. 나름대로 능력을 인정받아 업무는 힘들지 않았으나, 회사 내에서 일로서는 더이상 인생의 동기 부여를 할 수 없었다. 회사도 잘 다니고 인생도 잘 사는 롤 모델을 발견하기 쉽지 않았다.
Q : 가족의 반대는 없었나?
A : 아내가 걱정했지만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퇴하고 둘이 재미있게 놀며 지내자’는 식으로 부담을 덜어줬다. 다만 우리 부부의 의도나 경제 상황 등을 잘 모르시는 양쪽 부모님을 안심시켜드리기 위해 신경 써야 했다. 무엇보다 당시 대학생, 고등학생이던 아이들이 아빠의 조기 은퇴를 ‘사회 낙오’로 이해하지 않도록 잘 설명해야 했다.
Q : 노후자금은 어떻게 준비했나? 금수저인가?
A : 부자는 아니지만 부족함 없이 성장했고, 2번 부동산 재테크에 성공했다. 운 좋게 보수가 높은 직장에서 일해서 퇴직금을 적지 않게 챙길 수 있었고, 아내와 함께 맞벌이했다. 부모님으로부터 약간의 재산을 물려받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직장인이 은퇴할 시점인 60세까지 모을 수 있는 자산 이상으로 준비했다고 생각한다.
명예 퇴직금 전액은 퇴직연금으로 묶어 55세부터 받을 수 있게 설계했고, 나의 경우 국민연금은 63세부터 받을 수 있다. 은퇴 이후 잘 놀기 위해 재정적인 준비가 중요하다. 재정적 여유가 없으면 조급해지고 당당할 수 없으며, 직장에서 생각했던 은퇴 후 설계가 흔들리기 쉽다.
Q : 현재 생활비는 얼마나, 어떻게 조달하나?
A : 생활비는 퇴직 이전의 수준에서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두 아이 용돈, 주거비, 차량유지비, 통신비, 식생활비, 국내 여행비, 부부 용돈, 부모님 용돈, 연금, 건강보험 등으로 지출한다. 연간 수입은 아내가 비정기적으로 하는 일로 얻는 수입과 부동산 월세, 이자 수입 등이다. 아이들 학비와 해외여행 비용까지 고려하면 수입 전액을 소비하고 있고, 노후자산 원금은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다.
Q : 시샘, 우려 등 여러 가지 시선이 있을 것 같다. 자발적 은퇴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A : 주변 반응은 크게 부러움, 시샘, 우려였다. 부러움과 시샘이 반반인 것 같다. ‘논다’고 하면 곧바로 여행 실컷 해서 좋겠다는 반응인 것처럼, 은퇴는 걱정하면서도 은퇴 이후의 실제 생활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는 것 같다.
무엇보다 은퇴 자산 규모에 대한 궁금증이 가장 컸다. 이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직장인 지인들은 평소 하고 싶던 것(책을 원 없이 읽고 싶다)을 하기 위해서라는 은퇴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좀 먼 지인들은 경쟁에서 도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조금 놀다가 재취업할 거라 생각하더니, 요즘 외부적으로 나오는 글이나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조금씩 이해하는 것 같다.
Q : 요즘 일과가 궁금하다
A : 매우 게으른 생활을 즐기고 있다. 오전 8시 넘어 일어나 10시까지 식사하고, 신문보고, SNS를 하고, 블로그 글쓰기 등으로 소일을 한다. 대략 11시쯤 집 바깥의 일과를 시작한다. 낮에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본다. 요즘은 세계사(중세 유럽사회)를 공부하고 있다.
약속이 있어서 시내에서 지인들 만날 때도 있고 집에서 청소, 요리 등의 가사를 하며 온종일 머물 때도 있다. 아내와 점심이나 저녁에 술자리를 갖는다. 거의 매일 1회 이상 즐기는데 주로 집이나 집 근처 식당에서 한다. 자정 이후 잠자리에 들며, TV는 거의 보지 않는다. 처음에는 게으른 일상에 대해 자책했으나 요즘은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기 은퇴는 돈 주고 몇 년의 시간을 산 것인 만큼 정당하게 게으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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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은퇴 후 느낀 가장 큰 상실감은? 혹은 후회되는 점은 없나?
A : 가끔은 더 높은 자리, 예를 들어 임원 같은 사회적 권위 등에 대해 아쉬움도 느껴진다. 농담 삼아 “월급쟁이 30년 해봐야 누구 하나 주례 요청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실제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나니 노후를 지낼 약간의 돈 이외에는 남는 명예가 없는 것 같아 허무하기도 했다. 그래도 후회보다는 나는 매우 팔자가 좋았고, 어려운 시대를 운 좋게 잘 빠져나왔다는 생각을 한다. 좋은 회사 만나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고마움과 안도감이 훨씬 크다.
Q : 반대로 가장 좋은 점은?
A : 나는 남과 좀 다르다는 마음속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고, 박헌정이 박헌정인 것만큼만 다르다고 할까. 그렇게 내 마음대로 ‘다름’을 느끼고 표현하며 살 수 있는 것이 가장 좋다.
가장 좋아하는 말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서로 조화를 이루지만 모두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조직생활을 할 때 획일적인 시각과 행동이 가장 싫었다. 물론 그런 조직의 엄격한 부분을 누구보다도 잘 맞춰나갔지만, 본성과 달랐기에 더 큰 스트레스가 있었던 것 같다.
Q : 은퇴 후 잘 놀기 위한 나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A : 발견해야 한다. 주변에 지나치던 사소한 것들을 잘 찾아내는 것이 잘 놀기 위한 비타민이라 생각한다. 가령, 지방에 사는 지인을 찾아가 소주를 마시는 것, 자전거 타고 동네의 맛집이나 시장을 찾아다니는 것, 세미나 찾아가기 등이 전부 발견의 과정이나 결과다. 길 가다가 신기한 게 있으면 발 멈추고 한참을 쳐다본다. 요즘 사람들에겐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노는 방법을 잘 모르겠을 때 책을 보면 노는 방법에 대한 힌트가 생긴다. 가령 유럽 역사에 대한 책을 읽다가 호감이나 의문이 생기면 유럽에 직접 가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회사에 다닐 때도 회사에서는 철저히 회사 인간으로 살되, 나만의 A 드라이브를 가져야 한다.
Q : 앞으로는 어떻게 놀 작정인가?
A : 모든 경험의 출발점은 ‘지역’이라 생각한다. 지금보다 장소의 이동을 많이 할 계획이다. 우선 내년 중에 지방 도시로 이주할 가능성이 높고, 이후에도 해외 도시나 국내 도시에서 한 달 정도씩 옮겨가며 생활해보고 싶다.
그 지방에 대해 한 달 정도 살면 여행자로서의 풋 된 감정과 거주자들의 일상성 사이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달 살기를 통해 그 공간을 나만의 콘텐츠로 확보하고 싶다. 아마도 올해 봄부터 전주 생활을 시작할 것 같다.
Q :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가 있다면?
A : 기본적으로는 목표를 설정해서 얽매이고 싶지는 않다. 희망 사항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읽고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쉽지 않겠지만 ‘놀기’에 대해 좀 더 체계적으로 생각을 정리해서 책을 펴내고 싶다. 조기 은퇴를 비롯한 모든 은퇴자가 노는 게 떳떳지 못한 일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
Q : 이번 [톡톡 더,오래]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할 계획인가?
A : 자발적 은퇴 후 최근 2~3년간 성공적으로 놀았던 성과(?)라고 할까, 그런 것을 간단히 소개할 예정이다. 내가 쓴 글 가운데 가장 많은 독자께서 관심을 보이고 궁금해했던 한 달 살기에 관해 얘기할 예정이다. ‘해외 한 달 살기’ 경험을 자세히 소개하고 참가자들께 권해볼 생각이다.
그는 오는 17일 열리는 [톡톡 더,오래]에서 ‘은퇴 부부의 해외 한 달 살기’를 주제로 강연한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일보 [더,오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지명 기자 seo.jimy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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