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60년대 서울에 이런 멋쟁이들이…누구의 사진일까
패션 브랜드 빈폴과 협업한 고 한영수 사진가
6.25 전쟁 이후 서울의 모습 생생히 기록
풍부한 미학과 놀라운 기획력의 구도와 앵글
외국에서 먼저 알아본 한국 대표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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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벽돌 건물 구멍 사이로 중절모에 양복을 잘 차려입은 남자와 무릎 아래 길이 투피스를 입은 여성이 바쁘게 걸어가고 있다. 모래사장에 꽂아놓은 우산 위에 중절모를 올려둔 주인은 삼각팬티 차림으로 지금 막 물놀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수영모를 쓴 엄마는 아이를 안고 조용히 물놀이를 즐긴다. 두툼하게 옷을 입은 젊은이들은 스케이트를 타느라 한창이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트래디셔널 캐주얼 브랜드 ‘빈폴’이 지난달 새로 출시한 티셔츠 프린트 속 사진 풍경들이다. 모두 흑백사진들로 시공간을 가늠할 수 없는 따뜻하면서도 기묘한 분위기다.
요즘 젊은 층을 겨냥하는 패션 상품들은 유행처럼 ‘협업’을 마케팅 전략으로 내세우고 있다. 개성과 취향이 분명한 젊은 세대의 눈에 지루한 올드 브랜드로 보이지 않으려면 그들이 열광하는 젊은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은 필수조건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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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번 ‘빈폴’의 협업은 낯설다. 고 한영수 작가가 1950~60년대 촬영한 낡은 흑백사진을 활용했다. 이는 최근 몇 년 간 문화 전반을 장악한 ‘뉴트로’와도 결이 다르다. 뉴트로는 할머니의 옷장 속에서, 엄마의 찬장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젊은 세대가 경험했던 기억을 현대로 소환하는 작업이다. 즉 ‘언젠가 본 것 같은, 그래서 낯설지만 친숙한 것’이 콘셉트다.
고 한영수 작가의 사진은 6.25 전쟁이 끝난 50~60년대 서울의 풍경이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낯설고 또 낯선 풍경이다. 빈폴은 왜 한영수의 이런 사진을 협업 대상으로 선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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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로고를 한글 디자인으로 바꾸고 지속가능한 브랜딩을 강화한 빈폴은 1970년대를 키워드로 문화 전반의 모든 이미지를 검색했다. 빈폴 사업부 R&D 팀의 이정림씨는 “그렇게 찾아낸 감도 높은 사진 10장 중 9장이 한영수 작가의 사진이었다”며 “옛날 사진인데 전혀 촌스럽지 않고, 오히려 고급스러운 미감과 클래식이라고 할 만한 가치를 느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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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수는 1933년에 태어나 99년 작고한 한국의 1세대 광고사진가다. 개성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또 기계 만지는 걸 좋아했다. 학교 미술 선생님이 부모를 찾아와 전문적인 회화수업을 권유했지만, 집안 장손에게 ‘환쟁이’의 길은 언감생심. 그는 가업인 전자제품 무역업을 물려받고 취미로 사진을 시작한다. 군복무 시절 6.25 전쟁을 직접 겪은 한영수는 제대 후 한국 사진사 초기의 중요한 리얼리즘 사진단체인 ‘신선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진에 심취한다. 70년대 들어서 백화점 홍보 카탈로그를 찍은 인연으로 이후 광고사진가로 큰 성공을 거둔다. 삼성전자, 쥬단학화장품 등 90년대 중반까지 그의 손을 거쳐 간 광고는 셀 수 없이 많다. 제약회사 ‘종근당’의 상징인 커다란 구릿빛 종이 화면을 가득 채운 사진도 한영수의 작품이다.
99년 작고한 한영수의 흑백사진 필름을 정리하고 세상에 그의 다큐멘터리 사진들을 소개한 사람은 딸이자 한영수문화재단의 대표인 한선정씨다. 서울에서 사진을 전공한 후 헝가리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지금까지 혼자서 『서울 모던 타임즈』(2014), 『한영수 : 꿈결 같은 시절(2015)』, 『시간 속의 강』(2017) 세 권의 사진집을 출판했다.
뉴욕 ICP 마나 컨템포러리 갤러리에서 한국 사진가로는 처음으로 한영수 개인전이 열렸던 것도 한 대표의 노력의 결실이다. 월간 사진은 “당시 뉴욕의 사진 관계자들은 한영수의 작품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시무어, 마크 리부 등 매그넘 작가들의 작품을 연상시킨다며 놀라워했다”고 전했다. 현재 한영수의 사진은 LA의 유명 현대미술관 라크마에도 영구소장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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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먼저 알아본 한영수의 사진은 무엇이 다를까. 일단 ‘이게 50~60년대 서울의 풍경이 맞아’ 라는 얘기가 절로 나올 만큼 한영수의 사진 속 풍경들은 활기차다. 전후 시대 풍경이라면 참혹하게 무너진 피폐한 일상과 곤궁한 표정의 사람들이 떠오르지만, 한영수의 사진 속 사람들은 그 예상을 빗나간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뛰어다니고, 어른들은 무표정하긴 하지만 바쁘게 움직이며 제 할 일에 열심이다.
한 대표는 “아버지의 사진은 전후의 어렵고 힘든 시절이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서 새롭게 인생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즐겁게 뛰어 노는 아이들, 잘 차려 입은 멋쟁이들, 자신의 생업에 열심인 길거리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또 다른 생명력을 발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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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광모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시절’(1998)은 한영수가 살아생전 엮었던 사진집 『삶』을 한 장 한 장 뜯어서 풍경을 재현한 영화라고 한다. 흑백을 컬러로만 바꿨다 할 만큼 한영수의 사진으로 시대 고증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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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 호텔 앞 커플, 양품점 마네킹을 바라보는 어린 소녀, 모피 코트를 입은 여인, 잡화점 앞의 남녀. 외국인들이 한영수의 대표작으로 꼽는 사진 속 멋쟁이들은 또 어떤가. 50~60년대 한국에 이런 멋쟁이들이 존재했단 말야, 저절로 감탄이 쏟아진다. 심지어 잡화점 앞 남녀는 담배를 피우는(당시에!) 여성, 무심한 남성의 모습으로 우리의 선입견도 여지없이 깨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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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수의 사진이 귀하고 또 고마운 건 바로 이런 시선 때문이다. 6.25 전쟁이라는 끔찍한 사건으로 모든 삶이 무너졌지만 사람들은, 젊은이들은 다시 한 번 힘을 낸다. 그들이 한껏 멋을 부리고 사랑을 하며 자신들의 청춘을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를 남겨준 것이다. 심지어 당시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놀라운 구도와 앵글로 서울 멋쟁이들의 모습을 세련되게 담아냈다. 사보이 호텔 건물 구멍 사이로 보이는 커플의 모습은 손에 든 한약재 꾸러미만 아니라면 유럽의 어느 도시 풍경이라 해도 믿을 만큼 미학적이고 모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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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사진박물관학자 낀체쉬 까로이는 한영수의 사진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영수 사진은 사각 프레임 안 어느 한 부분도 빈 곳이 없다. 계속 사진에 시선을 머물게 해서 구석구석 모든 사람들의 행동을, 거리의 낡은 간판까지도 둘러보게 만든다.” 한영수는 35mm 라이카 카메라를 즐겨 사용했는데 당시엔 보는 화각과 찍히는 화각이 달랐다. 하지만 그는 정확하게 사람들의 움직임을 잡아냈다. 남다른 시각으로 무수히 많이 연습한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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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폴 팀이 아쉬워하는 부분도 바로 이 점이다. 티셔츠에 사진이 프린트됐을 때 사람들이 좀 더 놀랄 만큼 세련된 서울 멋쟁이 사진들을 선택하고 싶었지만 ‘초상권’이 조심스러워 포기하고, 한강에서 수영과 스케이트를 즐기는 도시 풍경만 옮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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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 속에서 선택한 총 10컷의 사진은 현재 빈폴 티셔츠와 스카프에 프린트돼 있다. 빈폴 팀의 노력도 눈여겨 볼만하다. 단순히 아티스트의 사진을 제품에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티셔츠 뒤에 한영수 작가의 사진 연대기를 따로 프린트했다. 지금까지 쏟아진 수많은 협업 프로젝트 중 이렇게 아티스트의 일생과 작품에 존중과 가치를 표한 브랜드는 없었다.
한선정 대표는 “원로 작가의 사진인 데다 흑백사진이고 배경은 50~60년대. 젊은이들을 타깃으로 하는 현대 패션 브랜드가 이런 사진들을 선택해서 협업한 것은 국내에선 첫 시도여서 모든 게 쉽진 않았을 것”이라며 “그래도 최선을 다해 작가의 작품을 존중하고 새로운 기획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현재 위축돼 있는 다큐 사진가들에게 큰 용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한영수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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