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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에도 꺾이지 않는 ‘잡초’ 서봉수

[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중앙일보

서봉수

20세의 약관이었고 무명이었던 서봉수(사진) 2단은 1972년 바둑의 대명사라 할 조남철 9단을 격파하고 ‘명인’을 탈취한다. 주최사인 한국일보는 일본 유학파가 아닌 ‘순국산’이 처음 타이틀을 차지한 이 사건을 1면에 대서특필했다.


서봉수는 명인이 되어서도 버스표 두 장과 자장면값만 가지고 다녔다. 한번은 버스표를 잃어버렸는데 수줍은 성격에 빌릴 생각을 못 하고 한국기원이 있던 종로 관철동에서 대방동 집까지 걸어갔다.


1992년 응씨배 준결승전. 서봉수 9단의 상대는 조치훈 9단. 조치훈이 누구인가. 서봉수가 일찍이 “나보다 상수”라며 허리를 굽혔던 인물이다. 체면을 무릅쓰고 바둑에 대한 의문점을 적어 보내며 고견을 구한 일도 있었다. 그렇다고 응씨배를 포기할 건가. 응씨배는 최고의 대회이고 상금도 40만 달러나 됐다. 조훈현 9단의 우승 장면을 지켜보며 더욱 간절히 염원해온 대회였다. 대국 전날 그는 격심한 배앓이에 시달렸다. 그리고 이튿날 서봉수는 자신의 승부 인생에서 최고의 명국을 만들어내며 조치훈을 이겼다. 결승에서는 온갖 희비 속에서 일본의 오타케 히데오 9단을 3대2로 꺾었다.


1997년 44세의 서봉수 9단은 진로배 두 번째 주자로 나선다. 진로배는 농심배의 전신으로 한·중·일 3국이 각 5명씩 출전한다. 이창호 9단이 뒤를 받치고 있으니 서봉수에게 기대한 것은 1, 2승 정도였다. 그런데 서봉수가 창하오, 왕리청, 요다 노리모토에 이어 마지막 마샤오춘까지 당대의 고수들을 모조리 꺾고 9연승하며 우승까지 결정한 것이다.


서봉수는 어려서 공부하기, 학교가기 등을 싫어했다. 졸업장도 간신히 받았다. 어느 날 동네 기원에서 바둑을 배워 자장면 내기하며 실력을 키웠고 프로가 되었다. ‘실전’이 그의 스승이었다. 그걸 바탕으로 불세출의 천재 조훈현 9단과 싸우며 15년 ‘조서 시대’를 만들어냈다. 야전사령관이라 불린 서봉수의 승부인생을 돌아보면 ‘생존’이라는 두 글자가 떠오른다. 잡초의 파괴력과 생명력이 만들어낸 생존.


추석 연휴 기간에 서봉수는 ‘열혈도전’이란 이름으로 다시 사각의 링에 스스로를 던졌다. 박정환 9단, 변상일 9단, 강동윤 9단, 신민준 9단, 김지석 9단, 5명의 젊은 정상 기사들과 치수 고치기를 벌인 것이다. 첫 대국은 호선. 지면 정선. 또 지면 두 점. 거기서 또 지면 석 점.


올해 칠순이 된 서봉수 9단이 위험한 도전에 나선 것이다. 최강 신진서 9단이 빠졌지만 상대는 막강하다. 더구나 노장에겐 초읽기라는 저승사자도 있다. 제한시간 30분에 초읽기 1분 5회라면 준 속기인데 과연 서봉수가 버텨낼 수 있을까.


많은 기사들이서 9단이 호선과 정선에서는 버티기 힘들 것으로 봤다. 두 점이라면 서 9단 우세. 그러나 위험한 우세라고 했다. 해설을 맡은 유창혁 9단은 “연속해서 두기 때문에 멘탈이 무너질 수 있다”고 말했다.


결과도 예상대로 흘러갔다. 호선(김지석) 패배. 정선(신민준) 패배. 두 점(강동윤) 승리. 정선(변상일) 패배. 이리하여 마지막 날 박정환과 두 점이 됐고 서봉수는 여기서 졌다. 울고 싶은 패배였다.


서봉수 아니면 다른 누구도 이런 대결은 하지 않을 것이다. 서봉수는 왜 이토록 상처받는 이벤트에 스스로를 던졌을까. 서봉수는 꾸미지 못한다. 그냥 현실을 인정한다. “나는 이제 늙었고 하수다”고 말한다. 그는 국가대표실을 찾아가 젊은 강자들에게 바둑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젊어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바둑에 대해서는 조금 아는 편이지만 그것도 갈수록 어렵다는 생각뿐이다. 세상 사람들도 대개는 잘 모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묻는다면 세상이 나아지지 않을까.”


아직도 야생에서 사는 듯한 서봉수, 그가 위험한 도전에 나선 것도 질문을 던지는 한 방편이었을까.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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