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 “영혼이 시키는 일, 누가 뭐라든 그냥 하면 된다”
남녀 역할에 구분이 없어지는 세상이다. 능력을 평가할 때 더는 성(性)을 문제 삼지 않는 시대다. 그런데도 바둑에서는 여자가 좀처럼 남자를 이기지 못했다. 1988년 첫 메이저 세계대회인 후지쓰배가 시작한 이후 34년간 여자기사는 세계대회 결승에 오르지 못했다.
지난 8일 폐막한 2022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에서 그 금기가 깨졌다. 한국 여자기사 1위 최정(26) 9단이 한·중·일 최고수를 연달아 격파하고 여자기사 최초로 메이저 세계대회 결승에 진출했다. 세계 첫 여성 챔피언 등극에는 실패했지만, 그가 일으킨 반상의 여풍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를 9일 서울 한국기원에서 만났다.
최정 9단은 반상의 싸움꾼이다. 그의 바둑은 살벌하다. 하지만 원래 성격은 쾌활하고 명랑하다. 방탄소년단의 열렬한 팬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Q : 결승 진출을 축하한다. 소감은.
A : “세계 대회 우승을 꿈꿔왔는데, 이왕이면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간 삼성화재배에선 성적이 안 좋았다. 올해 3년 만에 본선 32강에 진출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예선에서 떨어졌다. 그래서 더 기쁘다.”
Q : 박정상 코치는 최정 9단이 국가대표 훈련을 열심히 했다고 하던데.
A : “거의 매일 한국기원에 나와 훈련했다. 8강에 중국 선수가 딱 한 명 올랐는데, 내가 그 선수랑 대결했다. 그것도 한 번도 대결한 적 없는 양딩신 9단이다. 양딩신 9단과 대국했던 선수들과 코치진이 상대 장단점을 알려줬다. 세게 나가면 움츠린다고 해서 계속 세게 부딪혔다. 그게 통한 것 같다.”
Q : 32강전에서 4강전까지 상대 대마를 잡고 이겼다. 결승 2국에서도 신진서 9단의 하변 돌을 잡았다. 바둑은 결국 집이 많은 사람이 이긴다. 인공지능도 전투보다 실리를 강조하지 않나.
A : “무조건 인공지능을 따라가선 내 장점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을 활용하되 내가 제일 잘 두는 전투 바둑을 두려고 했다. 인공지능 공부도 열심히 한다. 그 덕분에 포석이 좋아졌다.”
Q : 변상일 9단과의 4강전에서 대회 최고 묘수가 등장했다. 흑 93으로 우변 백에 치중한 수. 이 한 수로 최정 9단의 우변 흑이 선수로 살아 변상일 9단의 우중앙 대마를 공격할 수 있었다. 떨리지 않았나.
A : “떨리는 상황이었다. 전에는 느슨하게 두다가 많이 졌다. 절대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다. 상대가 누구여도, 바둑이 유리해도, 치열하게 두자고 다짐했다. 비록 신진서 9단에겐 안 통했지만.”
최정 9단(사진 왼쪽 가장 앞)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전국소년체전에서 출전해 대국 중인 모습. [사진 한국기원] |
Q : 어려서 바둑을 시작했다.
A : “일곱 살 때 처음 뒀다. 아빠가 가르쳐줬다. 6개월만 배워보라고 해서 바둑학원에 다녔다. 그때부터 난전을 즐겼다. 아빠를 6개월 만에 이겼다.”
Q : 스승이 유창혁 9단이다.
A : “어릴 땐 광주에 살았다. 본격적으로 바둑 공부를 하려면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유창혁 사범님께 배우고 싶다고 결심했다. 전투 바둑 하면 유창혁 사범님이니까. 지금 경기도 분당에 사는 것도 유창혁 사범님 바둑 학원이 분당에 있어서다. 열 살 때 올라왔다.”
Q : 온종일 바둑만 둔다고 들었다. 그래도 놀 때는 뭐 하고 노나.
A : “운동을 좋아한다. 공 가지고 노는 건 다 좋아한다. 농구를 제일 좋아한다. 체력 유지하려고 PT도 한다. 족구는, 음… 소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Q : 가무에도 소질이 있다는 소문인데.
A : “노래방에 잘 간다. 3년 전에 3개월 정도 매일 노래방에 간 적도 있다. 방탄소년단을 제일 좋아한다. 거의 모든 앨범을 갖고 있고, 거의 모든 노래를 부를 줄 안다. 안무도 많이 안다. 방탄소년단을 꼭 만나고 싶다.”
Q : 신진서 9단과의 결승 2국 때 살짝 미소 짓는 장면이 중계 화면에 잡혔다.
A : “그 순간,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진짜 꿈꿨던 무대인데, 세계 최강 선수들이랑 둘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가.”
Q : 삼성화재배 결승 진출은 역사적 사건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바둑을 못 둔다는 통념을 깬 거다. 동의하나.
A : “어릴 때부터 여자가 남자보다 왜 바둑을 못 둘까 하는 질문을 정말 많이 들었다. 이유를 계속 찾았는데, 찾을수록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편견을 갖게 되고, 내가 원하는 곳에 닿을 가능성이 점점 낮아진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제는 내가 원하는 목표에 집중하려고 한다.”
Q : 원하는 목표는.
A : “세계대회 우승이다. 목표를 달성하고 나서 그 이유를 말하겠다.”
Q : 후배 여자기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A : “바둑이든 뭐든, 영혼이 시키는 일이면 누가 뭐라고 하든지 그냥 했으면 좋겠다. 여자기사라고 다를 것 없다. 그냥 자신을 믿으면 좋겠다.”
최정은 한국 여자 바둑의 거의 모든 기록을 보유한 절대 강자다. 2013년 12월부터 108개월째 국내 여자 1위다. 2018년 1월 입신(入神)이라는 9단이 됐는데, 국내 여자기사 최연소(21세 3개월)이자 최단기간(7년8개월) 기록이다. 지난해 여자 바둑리그 전적은 18전 18승. 그런 천하의 최정도 국내 (남녀) 통합 순위는 27위(11월 기준)다.
최정은 국내 최고 인기 기사다. 바둑 전문 채널 두 곳이 허구한 날 최정 대국을 튼다. 한국기원에 따르면 최정 바둑 시청률이 제일 높다. 인공지능이 바둑판을 점령한 지금도, 최정은 ‘기자(棋者)는 절야(絶也)’라는 통쾌한 격언을 실천하는 몇 안 남은 프로기사다. 삼성화재배 4강전이 끝난 뒤 그는 울먹이며 이런 소감을 남겼다. “내 생각에 따라 나의 한계도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