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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혁명의 추억을 내다 파는 쿠바의 딱한 기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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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테마여행 1탄 ‘쿠바 속으로’가 성공리에 마무리됐습니다. 중앙일보 독자 15명이 함께한 쿠바 여행기를 테마에 따라 소개합니다. 세 번째 순서는 쿠바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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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어디에서나 체 게바라는 임하셨다. 익히 들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엽서·접시·티셔츠·책·포스터·시가박스·열쇠고리 등등 게바라 얼굴로 도배된 기념품 가게의 풍경은 진즉에 각오한 바였다. 아바나 혁명광장의 내무부 건물 외벽에 거대한 게바라 얼굴이 걸려 있는 것도 사진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네 이발소와 과일가게도 게바라를 모시고 있을 줄은 몰랐다. 게바라가 그려진 쿠바인 화폐가 외국인 관광객에게 팔리는 현실도 어처구니없었다(쿠바는 내국인과 외국인 화폐가 따로 있다). 게바라는 외국인에게 돌하르방처럼 흔한 기념품이었고, 쿠바인에게는 꽃보다 뻔한 인테리어 장식이었다. 체 게바라 테마파크. 쿠바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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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중부의 내륙도시 산타 끌라라는 관광객에게 ‘체 게바라 도시’로 통한다. 체 게바라 기념관 안 추모관에 그가 잠들어 있다. 아시다시피 체 게바라(1928∼1967)는 원래 쿠바 사람이 아니다(아르헨티나 출신으로 혁명 이후 쿠바 국적을 획득했다). 평생 쿠바를 위해 살았던 것도 아니다. 게바라가 쿠바에서 활동한 기간은 8년 정도다. 멕시코에서 들어간 1956년 12월부터 콩고로 넘어간 1965년 4월까지가 쿠바 체류 기간이다. 1959년 쿠바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혁명 수출을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북한을 방문한 적도 있다). 1966년 11월 게바라는 볼리비아에 숨어들었고 이듬해 10월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총살됐다. 그의 시신은 30년간 볼리비아에 숨겨졌다가 1997년 쿠바로 옮겨졌다. 산타 끌라라의 체 게바라 기념관은 그래서 성지 순례의 종점 같은 곳이다. 게바라의 파란만장한 대장정이 여기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자못 엄숙한 분위기가 여느 관광지와 달랐다. 하나 아무것도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 게바라가 누워 있는 추모관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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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끌라라는 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전장이기도 하다. 철길 건널목에 승전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1958년 12월 30일 게바라는 게릴라 120여 명을 이끌고 정부군 400여 명과 바로 이 지점에서 전투를 벌였다. 혁명군은 정부군의 장갑열차 22량을 불도저를 이용해 탈선시켰고, 화염병을 던져 정부군을 공격했다. 그날의 승리가 치명타가 됐다. 이틀 뒤 독재자 바티스타가 아바나를 탈출했고, 다시 사흘 뒤 게바라가 아바나에 입성했다. 몇만 명도 아니고 몇천 명도 아니고 몇백 명을 물리쳤더니 혁명이 끝났더라는 역사는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하나 산타 끌라라의 공기는 여느 되바라진 관광지와 분명 밀도가 달랐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항상 불가능에 대한 꿈을 가지자.’


스무 살 적 노트 구석에 받아적었던 게바라의 문장이다. 한 시절 뭇 청춘이 게바라의 삶을 동경했다.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남미 청년의 짧은 인생을 생각하며 청춘들은 밤늦도록 소주잔을 비웠다. 불굴의 의지? 뜨거운 열정? 글쎄다. 시가 문 모습이 그저 멋있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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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CUC)은 쿠바 화폐 단위다. 정확히는 외국인용 화폐 단위다. 1쿡이 1달러와 같다. 쿠바인의 화폐 단위는 쿡의 약 25분의 1 가치인 쿱(CUP)이다. 체 게바라가 그려진 3쿱 지폐는 외국인에게 1쿡으로 판매된다. 거래가 아니라 판매다. 복잡한 쿠바 화폐 얘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쿠바에서 가장 자주 들은 단어 중 하나가 “원 쿡(One CUC)”이었다.

쿠바에서 인상적인 대상은 자연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국의 관광객을 바라보는 쿠바인의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들을 카메라에 담으려면 1쿡이 필요했다. 1쿡만 건네면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잡았다. 작정하고 꾸미고 나온 모델 할머니도 많았다. 1쿡만 있으면 금지된 장소에서도 촬영이 가능했다. 현장 직원이 먼저 제안했다. 관광객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을 데리고 들어가 사진을 찍게 해주거나, 그들이 대신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산타 끌라라의 체 게바라 추모관에서만 1쿡의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아바나 시내의 작은 공원에 존 레넌 동상이 있다. 누가 가져갔는지 안경이 없는데 관광객이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쿠바인이 나타나 안경을 끼워준다. 1쿡을 노린 틈새 서비스다. 문득 존 레넌의 안경을 쿠바인이 치웠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카메라에 담은 쿠바인 대부분도 실은 1쿡 모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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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는 외국인 두 명이 먹여 살린다는 우스개가 있다. 헤밍웨이와 게바라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얄궂게도 두 외국인 모두 이름에 ‘진실’을 담고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와 에르네스또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는 언어만 다를 뿐 이름이 같다. 헤밍웨이의 모히또와, 게바라 그려진 티셔츠에 현재 쿠바의 진실이 있다고 쓰면 너무 처량한 것일까.

올드카 투어에서도 진실의 일단이 얼비친다. 경적 울리며 아바나 시내를 질주하는 올드카는 미국 신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쿠바혁명 이후 미국인 부르주아가 미처 챙겨 가지 못한 적산(敵産)이다. 미국 자본주의가 흘렸거나 빠뜨린 1950년대 미제 자동차가 외국인을 싣고 아바나 혁명광장을 달리는 장면은 가히 쿠바적이라고밖에 묘사할 수 없다. 올드카를 바라보는 마음은 무겁지만, 올드카에 올라타면 희한하게도 기분이 좋아진다. 올드카 투어는 외국인 관광객이 제일 선호하는 투어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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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서 그렇게 많은 게바라 사진을 봤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장의 사진은 보지 못했다. 두 눈 부릅뜬 채 누운 서른아홉 살의 전사. 총살당한 직후 게바라의 사진이다. 혁명의 추억을 내다 파는 처지다 보니 슬픈 결말은 감추고 싶었나 보다.

기념품으로라도 소비되는 게바라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것인지 모르겠다. 20년쯤 전 러시아에서 나는 반쯤 허물어진 레닌 동상을 향해 오줌 누는 시늉을 하는 아이들을 목격했었다. 기억은 때로 아프다. 아니 잔인하다.


쿠바=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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