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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대테러전문가에서 맥주 양조자로…영화같은 이 남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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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에서 국산 재료를 활용한 맥주를 만들고 당당하게 ‘코리안 에일(Korean Ale)’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어요.”


충북 제천시에 위치한 수제맥주양조장 ‘뱅크크릭’ 홍성태(54) 대표의 말이다. 2015년 양조장을 차리고 홍 대표가 다음해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영국에서 홉 묘목을 사오는 일이었다. 뽕나무과 여러해살이 덩굴식물인 홉(hop)은 맥주 양조의 주원료다. 맥주를 마실 때 나는 특유의 쌉쌀한 향기와 쓴 맛은 바로 홉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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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서도 1960년대~80년대 말까지는 홍천·대관령 등지에서 홉 농사를 지었어요. 오비·크라운 등의 회사들이 농사를 위탁한 거죠. 그래서 당시 국내 맥주는 100% 국내산 홉을 사용했는데, 대기업들이 원가를 낮추기 위해 홉을 수입하면서 국내 홉 농사는 자취를 감췄죠.”


홍 대표는 13종의 홉을 2년간 키워 생산속도와 효율성 데이터를 만들었다. 이렇게 키운 홉으로 2016년 첫 번째 맥주 ‘솔티’를 만들고 레이블에 ‘코리안 에일’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


올해 그는 좀 더 완벽한 ‘코리안 에일’을 위한 또 다른 도전에 성공했다. 국내산 몰트(맥아)를 50% 넣은 맥주를 만든 것. 몰트는 맥주의 독특한 색과 풍미를 만들어내는 주원료다. 보리에 수분을 주고 싹을 틔운 다음 건조·분쇄한 것을 말하는데, 엿이나 식혜를 만들 때 쓰는 엿질금 상태를 일컫기도 한다.


역시나 국내엔 몰트를 만드는 공장이 없다. 60~80년대에도 보리를 배에 싣고 일본에 가서 몰트를 만들어왔단다. 설비비용이 많이 들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외국은 이미 자동화된 상태. 맥주용으로 품질개량을 하면서 특화된 보리 품종도 다양하지만, 우리는 식량용 보리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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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홍 대표는 미니사이즈 몰트제조기를 직접 만들고, 해남·군산·제주의 계약농가에서 수확한 보리를 이용해 최근 국산 몰트 50%를 넣은 맥주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물론 최종 목표는 100%까지 국산 몰트 양을 늘리는 것이다.


홍 대표의 이런 용감한 도전은 그가 40대 중반까지 농부도, 양조자도 아닌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대학 전공은 무기재료였지만 일찌감치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집중했던 그는 나우누리, 한솔텔레콤을 거쳤다. IMF 때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후 홍콩·바레인 등에서 일했다. 뉴욕에 본사를 둔 미국 회사에선 통신관련 대테러 전문 컨설턴트로 근무했다. CIA, FBI 출신들이 근무하는 회사로 홍 대표의 업무는 중동 지역을 돌면서 도청·감청·폭발물탐지 등의 무선기술 컨설팅을 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때 술과의 인연이 시작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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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 공항 면세점의 술을 싼 것부터 비싼 것까지 다 먹어봤죠. IT 업계에선 40대 후반이면 슬슬 은퇴를 고민할 때인데, 제2의 인생을 좋아하는 맥주·위스키를 만들면서 살아보자 생각했죠.”


필리핀에서 장비 판매 이권을 두고 벌이는 협상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낀 그는 모든 것을 스톱하고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100권이 넘는 맥주 관련 책을 보고, 미국·일본·슬로베니아·벨기에의 유명 양조장들을 방문해 본격적으로 맥주 양조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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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유명 맥주 양조장의 대표 상품들에 꼭 하나씩 들어있는 게 벨기에식 맥주였어요. 맥주는 벨기에구나, 그렇다면 직접 날아가 배우자 한 거죠.”


덕분에 뱅크크릭의 술들은 모두 벨기에 스타일이 됐고, 2019년 3월 벨기에 국왕이 국빈방문 했을 때는 문재인 대통령이 대접하는 청와대 만찬상에 홍 대표가 만든 ‘솔티8’과 ‘솔티 브라운’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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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대표의 맥주들은 그의 ‘반전인생’만큼이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일단 양조장·맥주 이름이 지어진 사연이 예사롭지 않다. 양조장 이름 ‘뱅크크릭’은 뱅크(bank·둑)와 크릭(crick·개울)을 합친 말로 이를 한자로 쓰면 제천(堤川)이 된다.


대표상품인 ‘솔티(SOLTI)8’는 솔티(salty·짠)와 전혀 상관이 없다. ‘소나무(솔) 언덕(티)’이라는 양조장이 있는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8은 알코올 도수인데 여기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제천에서 만든 맥주임을 드러내고 싶었는데, 마침 구한말 의병이 가장 먼저 봉기한 곳이 제천이라는 자료를 읽고 아이디어를 떠올렸죠. 당시 격문의 첫 문장이 ‘팔도에 고하노라’ 였다고 해요.”


레이블 상단에는 격문의 첫 문장을, 하단에는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죽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어느 의병의 외침’이라는 글귀를 적었다. 맥주 맛은 쓰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던 슬픔을 쓰디 쓴 맛으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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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본격 판매를 시작한 ‘배론트리펠’도 스토리가 길다. 수도원 맥주의 역사가 깊고 유명한 벨기에에선 수도원 수사들이 직접 만든 맥주에는 ‘트라피스트’, 수도사가 아닌 이들이 수도원 스타일로 만든 맥주에는 ‘애비에일’을 붙인다. 둘 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수도원 맥주다. 배론트리펠은 수도원 스타일의 맥주로, 트리펠은 3번 발효시켰다는 의미이며 제조시간만 45일이 걸린다. 홍 대표가 수도원 맥주를 만든 건 제천의 가톨릭 성지 ‘배론성지’를 방문한 관광객들에게 맥주를 팔아 그 수익금으로 장애인 복지시설과 퇴임 수녀님들의 보금자리를 돕기 위해서다.


“해마다 성금을 냈는데, 그보다는 근본적인 재원을 마련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획했고, 교구 주교님께 허락을 받기까지 2년이나 걸렸죠.”


올해 12월 원주~제천 간 복선전철이 개통되면 청량리에서 제천까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56분. 내년 말에는 강원도 횡성의 풍수원 성당에서 제천의 배론성지까지 250km 거리의 순례자의 길이 생긴다고 하니 홍 대표의 계획에 더 큰 힘이 실릴 것 같다. 참고로 ‘배론’ 역시 배의 밑바닥이라는 순 우리말의 마을 이름이다.


“가장 마지막의 목표는 국산 재료로 코리안 위스키를 만들어서 늙은 친구들과 한 잔 하는 겁니다. 남자들의 로망이죠. 하하.”


글=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우상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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