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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단 12명 위해 공장 전체 멈췄다···이상한 분유회사, 이런 게 애국

"나라가 못 하니 우리가 한다"

손해 보며 희귀질환용 분유 제작

창업부터 돈보다 국민·국가 우선

애국 묻는 시대, 진짜 애국 보여줘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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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아주 이상한 분유회사가 하나 있다. 집에서 만드는 수제품도 아니고, 매일 하루 6만5000캔씩 생산하는 조제분유 전문 대형공장을 1년에 두 번 세우고는 한국에서 딱 12명만 먹는 MF분유 등 총 12종의 특수분유 1만 4000캔만 만든다. 이 12종 분유를 먹는 사람은 전국을 다 합해봐야 이 공장 직원 수(440명)보다 적은 400명 남짓이다 보니 종류별로 적으면 한 달에 60통, 많아야 900통 정도만 소비된다. 그런데도 이 분유를 만드는 날이면 미리 공장을 세워 모든 생산설비를 해체하고 8시간 정밀 세척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각각의 특수분유로 바꿔 만들 때마다 거의 1시간씩 클리닝하는 번거로움을 무릅써야 한다. 게다가 세척 과정마다 손실이 발생하는데, 가령 300캔을 만들려면 무려 50캔 분량의 분유가 버려진다. 이쯤 되면 가히 '황제 생산'이라 할만하다. 그렇다고 '황제 가격'을 받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공장에서 생산하는 일반 분유보다 싼값에 내보낸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의료용 특수분유를 생산하는 매일유업 평택 공장 얘기다. 1~2년도 아니고 벌써 20년째, 이 회사는 대체 누구를 위해, 아니 무엇을 위해 이 일을 계속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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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경기 일대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지난 5일, 이런 궁금증을 안고 매일유업 7개 공장 중 가장 규모가 큰 평택공장을 찾았다. 원래 매년 7월 말쯤 그해 하반기에 필요한 특수분유 생산을 한다기에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12종 제품 중 하나의 재고가 예상보다 빨리 떨어져 급하게 생산일정을 앞당겼다는 얘기를 듣고 부랴부랴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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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가운에 캡까지 쓰고 정밀 반도체 생산설비 수준의 3단계 오염 차단 과정을 거쳐 공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 평소 분유 생산을 위해 쉬지 않고 돌아가는 2개 라인 중 하나는 완전히 멈춰 있었고, 분리된 다른 라인에선 세척 작업이 한창이었다. 한 종 생산을 마치고 또 다른 종류의 특수분유 생산을 준비 중이었다. 김용진 공장장은 "각각의 특수분유마다 수십 개의 서로 다른 특정 성분을 넣고 빼는 까다로운 공정인 데다 혹시라도 섞이면 치명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오염을 방지하려고 아예 일반분유는 생산하지 않는다"며 "세척에 공을 들이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말했다.


이렇게까지 엄격한 생산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이 제품을 먹는 소비자가 '선천성대사이상'이라는, 이름도 낯선 아주 희귀한 유전질환 환자들이기 때문이다. 막 태어났을 땐 눈에 띄는 기형이나 이상증세는 없다. 하지만 단백질 속 수없이 많은 아미노산 중 어떤 특정한 아미노산을 분해하는 효소가 없이 태어난 탓에 고기든 콩이든 쌀이든 소량이라도 단백질을 먹으면 아미노산 부산물이 체내에 쌓여 뇌 손상을 입을 만큼 치명적인 질병이다.


소아과 전문의인 정지아 매일아시아모유연구소장은 "분명 건강하게 태어났는데, 세상에 나와 먹은 거라곤 모유(또는 분유)밖에 없는데 어느 순간 뇌가 망가져 죽을 때까지 지적 장애를 안고 살아가거나 심하면 아예 얼마 살지 못하고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거꾸로 말하면 유아기 때는 물론 평생 특정 아미노산을 뺀 식이조절을 해야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지금은 신생아 때 혈액검사로 미리 확인할 수 있지만 비교적 최근까지도 상당수 환자가 원인도 모른 채 그저 모유(분유) 먹은 죄로 평생 지적 장애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런 대사이상질환 가운데 그나마 페닐알라닌이라는 아미노산 분해 효소가 없는 페닐케톤뇨증(PKU) 환자가 국내에 84명으로 가장 많고, 메티오닌이나 루신 분해 효소가 없는 호모시트틴뇨증(MF) 환자나 로이신대사이상(LF) 환자는 각각 열 명 안팎에 불과하다.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땅콩만 피하면 되지만 이 환자들은 먹을 수 있는 게 별로 많지 않다. 특히 유아기 때는 문제가 되는 아미노산을 제거한 의료용 특수분유가 사실상 생명줄이나 마찬가지다.


환자 입장에선 대체 불가한 필수품이지만 제조자 입장에선 정부 보조금을 받는다 해도 수지타산 안 맞는 손해 보는 장사일 뿐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미드존슨이나 애보트, 네슬레, 그리고 독일의 코미드아메드 등 극소수 대형 업체만 의료용 특수분유를 내놓는 데는 다 이런 배경이 있다.


이쯤 되면 차라리 수입하는 게 나아 보이지만 문제는 가격과 공급 안정성이다. 워낙 수요자가 적고 크게 늘어날 가능성도 없는 시장 특성상 비싼 값을 붙일 수밖에 없다. 우리 정부는 만 19세 미만 대사이상 환자들에게 무료로 특수분유를 공급하는데, 매일유업이 없었다면 전적으로 값비싼 수입품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또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일본의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 규제처럼 외국 제조사가 덜컥 생산을 중단하기라도 하면 속수무책으로 환자들의 생명줄이 끊기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매일유업 덕분에 환자와 우리 정부 모두 이런 고민에서 해방된 셈이다. 그렇다면 매일유업은 대체 이 손해 보는 장사를 왜, 그리고 20년이나 지속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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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2006년 작고한 창업주 김복용(1920~2006) 회장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에게 특수분유 생산은 단순한 장사가 아니라 나라를 살리고 국민을 위하는 애국의 길이었다. 그는 "정부가 못 하니까 우리가 해야 한다"며 1999년 당시 10만 명당 3명에 불과한 희귀질환 유아를 위한 특수분유 개발을 지시했다. 또 "이 사업만큼은 비용에 문제가 있어도 중단하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간 크고 작은 경영상 위기에도 불구하고 생산 중단을 고려하기는커녕 이 회사 MIC중앙연구소 담당 연구원들이 매년 PKU 환아 모임에 직접 참석해 이들이 원하는 제품을 추가로 만들 정도로 공을 들이고 있다. 특히 신입 연구원은 반드시 모임에 참석한다. "직접 만나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권정일 모유연구팀장)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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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게 김복용 회장의 철학이 회사에 여전히 살아있어 가능한 일이다. 그는 살아생전 "장사와 사업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며 "장사는 이기적이지만 사업이란 이윤의 창출과 함께 온 국민, 나아가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공익적인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워낙 스스로를 낮추는 성격 탓에 이런 김 회장의 신념은 일반 국민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 시절 한국을 지탱한 거물 이병철이나 정주영 못지않게 국가에 기여한 애국적인 기업가라는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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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광복 직후 단신 월남해 서울 방산시장과 남대문시장 좌판부터 시작해 사업을 키운 입지전적 인물이다. 제분공장을 하던 51세에 이득룡 농림부 차관의 간곡한 설득에 그 자신은 물론 한국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농축산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종합낙농개발사업을 담당한 이득룡 전 차관은 "담보나 채무상환 능력이 전혀 없는 농민을 상대로 하기에 처음부터 실패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사업이었다"며 "김 회장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돼 집요하게 설득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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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차관 말처럼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다. 미국·캐나다·뉴질랜드 등에서 젖소 사오는 것부터 난관의 시작이었다. 한 번은 어렵게 가격 흥정을 하고 나니 850두 가운데 절반이 병든 소였다. 억지로 떠넘기려는 걸 당시 검수 책임자가 "병든 소를 그대로 받아 간다면 우리나라 낙농 발전사에 큰 반역자가 된다. 나는 조국의 역적이 될 수 없다"며 막아낸 일화도 있다.


한국으로 가져오는 건 더 어려웠다. 20일 넘게 적도를 가로지르는 '지옥의 항해'라 배에 같이 탄 검수요원들이 젖소와 함께 사경을 헤매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박춘병 수의사는 당시 이렇게 적었다. "배 멀미로 실신해 쓰러졌다가 바닷물 먹고 위 세척 후 깨어났다. 소들만 무사해 준다면 부산까지 계속 배 멀미를 해도 좋다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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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젖소뿐 아니라 우리가 거저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의 풍요로운 한국은 이런 선택과 도전으로 만들어졌다. 국민을 제대로 살게 해주겠다는 정부의 큰 그림을 수행한 공직자들, 그리고 장사치가 아니라 사업가의 길을 택한 이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여전히 이런 게 바로 애국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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