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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리부터 뜯는 전어구이, 가을을 통째로 맛보다

백합죽·풀치조림도 전통의 별미

초보는 낙지젓, 고수는 밴댕이젓

젊은층에겐 뽕잎 넣은 찐빵 인기



[일일오끼] 전북 부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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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이어트 중이시라면 서해안행을 권하지 못하겠다. 아무리 먹방 여행이 대세라 해도, 안 될 소리다. 온갖 갯것에 살이 차오르는 계절 아니던가. 서해로 들 땐 마음을 비워야 한다. 벨트는 풀고, 몸무게 걱정은 내일로 미뤄야 한다.


변산반도를 품은 전북 부안은 서해안에서도 알아주는 맛의 고장이다. 이 땅엔 진정 밥도둑이 천지로 널려 있다. 9월부터는 전어가 제철을 맞는다. 전어 굽는 냄새가 식당마다 코를 자극한다. 염전을 가까이 둔 곰소항에는 젓갈 반찬이 열 개씩 깔리는 식당이 허다하다. 속이 허할 땐 백합죽, 입맛이 없을 땐 생선조림, 디저트는 뽕잎 넣은 찐빵으로 해야 직성이 풀린다. 부안에 다녀왔다. 정신없이 숟가락질하다 돌아왔다.


고소하고 진한 가을 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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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의 가을은 전어의 통통한 뱃살을 타고 온다. 전어 굽는 고소한 향으로부터 가을이 무르익는다. 부안 최대 어항 격포항도 요즘 절반 이상이 전어 배다.


전어는 ‘가을’이라는 단서를 붙일 때 완전해진다. 여름 전어는 살이 물러 맛이 덜하다. 찬바람 불어 월동 준비하는 계절에야 비로소 통통하게 살이 오른다. 9, 10월이 제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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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어잡이는 피 말리는 속도전이다. 어판장이 설 여유도 없다. 고깃배가 부두에 닿기 무섭게 격포항에 줄지어 선 활어차에 전어가 실려 나간다. 성질 급한 전어 때문이다. 아무리 가을 전어라도 활어 상태여야 제값을 받는다.


부안 사람은 전어 횟집 몇 개쯤은 줄줄이 꿰고 산단다. 궁항 인근의 ‘신용횟집’처럼 직접 고깃배를 부리는 횟집일수록 대접받는다. 싱싱한 전어를 맛볼 수 있어서다. 메뉴판도 보지 않고 전어회 정식(4인분 10만원)을 주문했다. 마침 아침에 들어온 전어가 있다고 했다. 어느새 전어구이·회무침·전어회가 상을 가득 채웠다.


28년 경력의 김부월(64) 사장이 말했다. “가을 전어는 딴 거 없어. 싱싱한 놈 잡어다 천일염 솔솔 뿌려서 구우면 돼야. 고수들은 통째로 씹어 먹지.”


전어에도 먹는 순서가 있다. 무조건 전어구이를 마지막에 먹는다. 워낙 향이 진하고 맛이 깊어 구이부터 먹으면 다른 음식에 손을 못 댄단다. 머리부터 꼭꼭 씹었다. 고소한 뒷맛이 계속 입맛을 당겼다. 가을을 통째로 씹는 맛이었다.


사라진 백합, 살아남은 백합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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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은 삼면이 바다다. 곳곳이 항구요, 해수욕장이다. 갯벌도 발달했다. 부안과 고창 사이의 줄포만 갯벌은 2010년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자연 생태계의 보고다. 남서쪽 해안의 모항 해변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갯벌체험장(어른 1만원, 어린이 8000원)이다. 갯벌에 나가 갈퀴로 1시간만 긁으면 소쿠리 한가득 모시조개가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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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이 많다 보니, 조개를 다루는 식당도 흔하다. 백합죽 요리는 워낙 유명하다. 백합은 껍질이 매끈한 데다 해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속살이 뽀얗다. 맛도 일품이다. 조개의 여왕이라 불리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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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의 계화도 갯벌이 바로 백합의 주산지다. 아니 주산지였다. 1990년대 시작된 새만금 방조제 사업으로 인해, 2010년께 기어이 백합이 종적을 감췄다. 이제 부안 사람은 강화도나 고창에서 캔 백합을 먹는다. 그걸로도 모자라 중국산 백합을 수입한다.


백합은 사라졌지만, 백합죽은 사라지지 않았다. 원조집으로 통하는 행안면 ‘계화회관’. 계화도 출신의 이화자(76) 할머니가 39년째 백합죽(1만원)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잘게 다진 백합으로 쑨 죽 한 그릇. 참기름 간에 김과 깻가루 고명이 전부지만, 깊은 맛이 우러났다. 최국서(79) 할아버지는 아내의 솜씨가 여전히 신기한 모양이었다. “안사람은 슥 잡아만 봐도 상한 놈을 찾아. 반평생 백합만 만졌거든.”


곰삭힌 세월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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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은 짭조름한 감칠맛으로 기억되는 고장이다. 명품으로 인정받는 곰소염전 천일염(타 지역 천일염보다 2~3배 비싸다)이 부안의 온갖 음식에 배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젓갈 음식이다.


곰소항 앞에 대규모 젓갈 단지가 조성돼 있다. 젓갈 집만 30여 개에 이른다. 덕분에 곰소항은 김장을 앞둔 살림꾼에게 꼭 가봐야 할 성지로 통한다. 새우젓·가리비젓 등 가게마다 20~30가지 젓갈을 판다. 500g에 1만5000원 선이다. 시식은 기본. ‘명품종가집젓갈’처럼 막걸리를 공짜로 퍼주는 젓갈 집도 더러 있다. 막걸리와 젓갈의 찰떡궁합 앞에 장사가 없다는 걸 젓갈 집 아낙네들은 알고 있다. 장사 수완이 정겹다.


곰소항 주변으로 젓갈 전문 식당이 줄지어 있다. 20년 전통의 ‘자매식당’도 그중 하나다. 백반(1만2000원) 하나면 젓갈 열 가지가 먹음직스럽게 담겨 나온다. 바지락젓·창난젓·꼴뚜기젓 등 골라 먹는 재미가 크다.


김영환(60) 사장은 “젓갈 초보자는 청어알젓, ‘막걸리파’는 청양고추를 크게 썰어 넣은 밴댕이젓을 공략한다”고 말한다. 맛과 향은 달라도 하나같은 밥도둑이다.


곰소항의 대표 젓갈 중엔 갈치속젓도 있다. 갈치의 싱싱한 내장과 아가미를 모아 담근다. 숙성 기간은 대략 1년에서 2년 6개월. 따뜻한 흰 밥에 갈치속젓을 쓱쓱 비비자, 자연히 침이 고였다. 짭조름하고 깊은 향이었다.


풀치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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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치속젓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갈치속젓은 풀치(어린 갈치)가 주재료다. 잔가시 많은 갈치는 웬만큼 살이 차지 않으면 먹지 않던 생선이다. 해방 이후 궁핍하던 시절 곰소 포구에선 이마저도 귀했다. 내장은 젓갈로 담고, 남은 몸통은 코다리처럼 말려서 먹었다.


부안에서 풀치는 단순히 어린 갈치가 아니다. 지푸라기로 하나하나 엮어 말린 갈치를 뜻한다. 그 시절 추억의 먹거리요, 척박했던 삶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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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곰소항에는 햇볕에 몸을 말리는 풀치의 모습이 흔하다. 멀리서 덕장을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꼭 풀처럼 보인다고 하여 풀치라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요즘처럼 해가 좋을 때는 하루에서 이틀 정도 말리면 먹기 좋은 상태가 된다. 7~8마리씩 줄줄이 매달아 파는데 한 줄에 5000~6000원을 받는다.


곰소항 인근 식당 ‘개미궁’에 들러 풀치 백반(2인분 2만원)을 시켰다. 큼지막한 무가 깔린 빨간 조림이 나왔다. 풀치는 조림으로 먹는 게 일반적이란다. 생긴 건 일반 갈치조림과 다르지 않다. “다들 ‘갈치잖아’ 하며 실망하다, 맛을 보고 놀란다. 식감이 전혀 다르다”라고 김경숙 사장(59)이 말했다. 해풍을 맞으며 꼬박 이틀을 말린 풀치. 과연 쫄깃쫄깃했다.


뽕잎 청국장과 오디 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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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도 부안의 특산물이다. 변산면 마포리 누에마을은 양잠 역사가 150년을 헤아린다. 지금도 뽕나무밭이 38㏊(약 11만5000평)에 이른다. 여기서 매년 5000만 마리의 누에가 나온다. 한국의 인구수에 버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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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나무 열매 오디로 만든 와인과 연보랏빛 막걸리, 오디잼·뽕잎차·누에환 등 별별 뽕 관련 상품을 부안에서 만날 수 있다. 누에마을에서 직접 운영하는 식당 ‘슬로푸드 유유’. 이곳의 대표 메뉴는 참뽕치유 한상차림(1만2000원)이다. 뽕잎 넣은 청국장, 뽕잎 장아찌, 뽕잎 물 재운 고등어구이, 뽕잎 차 등이 깔린다. 조미료 대신 뽕잎 가루로 간을 한다. 모든 음식이 담백하고, 부담이 적었다.


부안에도 전국구 인스타그램 맛집이 있다. 곰소염전 앞 ‘슬지제빵소’다. 생크림찐빵(1개 3500원)은 주말 하루 500개 가까이 팔린다. 오색 찐빵(5개 6000원)은 뽕잎·오디·단호박·흑미 등을 이용해 빵마다 색도 향도 다르다. 오디를 앙증맞게 올린 음료수 ‘오디봉봉’(6000원)도 인증 사진을 부른다. 읍내 ‘슬지네찐빵’의 네 자녀가 이태 전 문을 열었다. 김슬지(35) 대표는 말한다. “90%는 외지인 손님이에요. 저희도 미처 몰랐어요. 부안에서 나고 자란 열매가 이렇게 맛있고 예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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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글·사진 백종현 기자 baek.jo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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