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 칼날 피해 대놓고 불법 음반 냈던 정태춘 "내 가사는 현실이죠"
18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포크의 전설 정태춘(오른쪽부터)이 아내이자 음악 동지 박은옥과 함께 겪은 40여년 음악 인생을 대표곡 28곡과 함께 담아냈다. 사진은 다큐 속 자료 화면.[사진 NEW] |
시대를 노래한 ‘음유시인’ 정태춘(68)이 엄혹한 시절 미군기지가 있던 경기도 평택에서 나지 않았다면, 중학교 현악반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배우지 않았다면, 사회의 아픔에 몸서리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정태춘일 수 있을까. 또 만약에, 정태춘이 포크음악을 만나지 못했다면.
“포크가 말할 수 있는 길을 터줬어요. 처음에 노래 만들 땐 내가 살고 있던 시골 주변 이야기를 많이 했죠. 사랑‧이별 이런 게 전혀 아닌, 내 이야기를 한 것도 포크여서 가능했어요. 반주에 구애받지 않고, 내 기타 하나만 들고 노래할 수 있었으니까요. 포크의 바다에서 나는 이야기해왔다고 생각해요."
40여년 음악인생을 되짚은 다큐멘터리 ‘아치의 노래, 정태춘’(감독 고영재)의 주인공 정태춘의 말이다. 이번 다큐는 그가 아내이자 음악적 동지 박은옥(65)의 데뷔 40년(2019년)에 맞춰 2018년부터 3년간 촬영한 것이다.
‘우리 학교’(2007) ‘워낭소리’(2009) 등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고영재(53) 프로듀서가 자신의 제작사 인디플러그를 통해 직접 연출까지 맡아 이번에 감독 데뷔했다. 정태춘과 고 감독은 2006년 한미 FTA 스크린쿼터 운동 때 처음 만나 형‧동생으로 지낸 16년지기다. 오는 18일 개봉을 앞두고 두 사람을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문화예술기획 봄’ 사무실에서 만났다.
시대 호흡한 대표곡 28곡 "싱어롱 요청 많아"
대학시절 민중가요집에 실린 ‘떠나가는 배’로 정태춘을 처음 알았다는 고 감독은 이번 다큐에 대해 “거창하게 연대기를 훑기보다 스토리가 있는 콘서트로 봐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음악을 즐기면서 거기 따라오는 이야기들을 같이 봐주면 좋겠다”면서다.
다큐엔 1978년 자작곡 ‘시인의 마을’ ‘촛불’로 데뷔해 ‘MBC 10대 신인 가수상’을 받은 정태춘의 신인 시절부터 청계피복노조의 일일 찻집 참여를 계기로 정치폭력 희생자를 위한 모금공연,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 등 대형집회에 섰던 시절들이 영상 및 신문 자료, 카세트테이프 녹음 기록 등을 토대로 담겼다. 또 대중가요 사전심의 검열제도에 맞서 7집 ‘아, 대한민국…’을 대놓고 불법 음반으로 발매했던 1990년대와 이후 유행 가요에 밀려나 외면당한 시기 등을 대표곡 28곡과 함께 되짚었다.
다큐에는 정태춘이 10대 가수상, 가요 사전심의 철폐운동, 은퇴 선언을 거듭하며 겪은 부침과 사회적 영향도 담아냈다. [사진 NEW] |
Q : ‘떼창’을 자극할 만큼 선곡이 풍성한데.
정태춘: “유명인의 음악영화를 더러 봤을 때 기대한 만큼 노래가 길게 안 나오더라. 고 감독은 좀 무리한 거 아닌가, 할 정도로 넣었는데(웃음) 저는 좋았다. 몇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나갔다.”
고영재: “실제 특별 시사회로 ‘싱어롱(따라부르기) 상영’ 요청이 많다.”
Q : 다큐 속 28곡은 어떻게 골랐나.
고영재: “영화다 보니 내러티브, 시각화가 중요해서 노래가 좋아도 아깝게 빠진 곡도 있다. ‘우리들의 죽음’처럼 저에게 영향이 컸던 곡이나 대중적으로 알려진 곡도 넣었다. (박)은옥 누나 말처럼 ‘저 들에 불을 놓아’는 대추리(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이 있었던 곳) 흑백사진과 형(정태춘)이 끌려가는 모습이 나오니 달리 들리더라. 1집부터 음반마다 한 곡씩은 넣었다.”
가난한 맞벌이가정 남매 죽음…가사 검열 반기
7집에 실린 ‘우리들의 죽음’은 가난한 맞벌이 부모가 일 나간 새 잠긴 지하셋방에서 불이 나 어린 남매가 질식사한 비극적 사건을 담은 곡이다. 고 감독은 이 곡을 부른 정태춘‧박은옥 공연 실황을 거의 자르지 않고 다큐에 담았다. 영화 속 독립된 소공연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강렬하다. 정태춘은 “노래마다 화자를 자유롭게 했는데 ‘우리들의 죽음’은 당시 신문기사를 한 글자도 다르지 않게 옮겨 리얼리티를 살리려 했다”고 말했다.
정태춘은 "포크가 내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길을 터줬다"고 했다. [사진 NEW] |
이런 현실을 노래한 가사를 사전심의해 고치라, 자르라 하는 검열제도에 그는 반기를 들었다. “내가 ‘시인의 마을’로 1978년 첫 데뷔할 때 곡당 3000원씩 비용을 부담하고 정부기관 사전심의를 넣었어요. OK를 안 해줘서 레코드사 사장님이 고쳐서 첫 앨범이 나왔는데, 검열 기관에선 ‘정태춘씨, 대중음악이 이런 얘기 해야합니까? 건전한 얘기하면 안 됩니까?’ 그러더라고요. 나는 우리가 구사하는 수많은 어휘를 갖고 풍부한 이야기와 감정과 상상력을 표현하고 싶은데 답답했어요.”
Q : 스스로 ‘노래로 사회적 일기를 쓴다. 메신저(messenger)’라 했다.
정태춘: “밥 딜런, 비틀스의 노래를 들을 때 툭 치고들어오는 단어가 있다. 그런 것도 메신저 일부다. 내 의식, 정서를 툭 열어준다. 그만큼 내 ‘뚜껑’이 열린다.”
Q : 노래로 부르지 않았다면 잊혔을 법한 시대 풍경을 담은 가사가 많다.
정태춘: “내 가사가 사실적이다, 스케치한다고 한다. 거기 집중한다. 관념적 단어보다 구체적 현실 모습을 가사 속에 끌어낸다. 어떤 사람에게는 불편할지 모른다.”
5월 9일 상암산로 문화예술기획 봄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가수 정태춘씨. 권혁재 기자 |
고영재 "타협하며 사는 우리 돌아보게 해"
‘당신에게 노래란 뭘까’란 질문에 정태춘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나는 당대 사회하고 좀 부적응했던 사람이에요. 불편한 게 너무 많은 세상을 살았죠. 그게 내 적응력이 부족해서인가, 고민하며 나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하고요. 이렇게 발전해가고 부유해지고 즐길 거리가 많아지는 분위기 속에서 여전히 불편한 사람은 왜 그럴까, 생각하는 거죠. 결국은 그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더 편안하고 자유롭게 노래하고 싶어요.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다, 이런 욕심이 있죠.”
고 감독은 지금 정태춘 다큐를 내놓는 의미를 이렇게 밝혔다. “정태춘 음악은 어느 순간 적당히 타협하면서 사는 내 모습을 뒤돌아보게 하죠. 지금 사회의 말들이 날카롭고 알맹이 없고 험해지는데, 그런 분위기에서 이 영화가, 정태춘 음악이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원정기자na.won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