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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이름, 두 가지 죽음... ‘일본의 똥개’라 불린 양칠성의 삶

연합군 포로들 감시 역할… 한국 동료들 “일본 장교 충견” 평가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부대서 폭파 전문가로 활약한 듯


처형 26년 만에 ‘독립 영웅’ 추서 “한국과 가교역 인물로 평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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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칠성(왼쪽)과 일본인 동료들. 한인니문화연구원 제공

#2013년 10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인도네시아를 국빈 방문했다. 자카르타 국립영웅묘지 참배를 앞두고 헌화를 하나 더 준비하자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거기 양칠성 묘가 있다”고 한 것이다. 직접 본 사람은 없었다. “인도네시아 독립 영웅이니까 당연히 있겠지” “책에서 봤다니까” “그 넓은 묘지에서 어디쯤이야?” 말만 넘실대자 실제 갔다는 한인을 수소문했다. “거기 없다니까요, 제 눈으로 봤다니까요.” 거푸 부인한 뒤에야 양칠성 헌화 계획은 취소됐다. 양칠성은 170㎞나 떨어진 가루트 관립영웅묘지에 1975년부터 잠들어 있다.


#지난해 한 TV프로그램은 ‘인도네시아 교과서에 양칠성 이야기가 실렸다’고 소개했다. 이후 그 프로그램을 요약한 인터넷기사가 재생산되고, 다시 이를 인용한 글들이 등장했다. 자카르타 현지에서 최근 만난 학자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안 실렸다”(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장) “확인된 바 없다. 실렸다면 당장 발췌했을 것”(김문환 칼럼니스트) “아직 없다. 인도네시아인들은 모르는 역사라 알리려고 8월 세미나를 준비했다”(에바 라티파 국립인도네시아대 인문대학 한국학과장).


양칠성에 얽힌 정보는 이처럼 사실이 아니거나 모호한 게 많다. 이유는 지나친 미화와 적당한 무관심 사이 어디쯤에 있다. 불편한 건 덥석 덜어내고 입맛에 맞는 건 꾹꾹 눌러 담는 식이다. 영웅이라는 고정된 틀에 욱여 넣고 정답을 강요하다 보니 진짜 양칠성은 희미해졌다. 팩트와 스토리가 들러붙어 어떤 내용은 확인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 그를 알수록 고민에 빠진다.


1975년 3인의 일본인 독립 영웅을 안장하던 행사에 참석한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 게이센여학원대 명예교수 부부가, 유족이 없고 일본 이름치곤 이상한 한 사람을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양칠성의 마른 뼈는 새살을 얻는다. 국가보훈처의 현장 조사, 김문환 칼럼니스트 등 인도네시아 한인들의 오랜 연구, 현지 역사단체들의 생존자 증언 수집이 고인과의 간격을 좁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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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칠성의 인도네시아 이름 ‘코마루딘’이 새겨진 가루트 관립영웅묘지 입구. 한인니문화연구원 제공

◇3개의 이름, 2개의 죽음


그는 이름이 세 개다. 생몰(1919~1949년)과 역사로 추정컨대,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20년은 한국이름 양칠성( 七星)으로, 6년은 일본이름 야나가와 시치세이( 川七星)로, 4년은 인도네시아이름 코마루딘(Komarudin)으로 각각 살았다. 코마루딘은 ‘인도네시아를 비추는 달’이라는 뜻이란다.


양칠성은 1942년 포로감시원으로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배속됐다. 제 발로 갔는지, 끌려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동남아 일대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기 위해 포로감시원을 공개 모집했는데, 실상은 반강제로 끌고 갔다는 증언도 많다.


자바 섬 각지에 흩어진 포로감시원은 1,400명. 그들은 크게 두 부류의 삶을 남겼다. 1944년 12월 이억관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고려독립청년당원들, 이듬해 1월 일본군과 일본인 군속 12명을 사살한 뒤 자결한 손양섭 노병한 민영학은 항일운동을 몸소 실천했다. 김만수 등은 일본군의 눈을 피해 포로들을 따뜻하게 대한 공로로 훗날 네덜란드 정부에서 표창을 받았다.


반면 일본군 명령대로 포로들을 적극 학대한 포로감시원들도 존재했다.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일제 항복 후 일본군 전투병력이 철수 귀환하는 과정에서도 한국인 포로감시원은 전원 억류돼 대면조사로 죄질을 분류하는 전범 색출 조사를 받았다. 4명이 총살됐고, 61명은 10년 이상 중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양칠성 역시 이 부류에 가까웠다. 한국 동료들 사이에서 ‘일본의 주구’ ‘똥개’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정도다. “골수 친일, 일본 장교의 충견”이라는 증언(김동해)도 있다. 그런 평판이 멸시인지, 질시인지는 확실치 않다. 양칠성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뛰어든 이유로 일본군 상관 아오키(靑木)와 하세가와(長谷川)의 권유(?)가 거론되는 걸 감안하면 일본군과 친했던 건 분명해 보인다. 3명은 함께 처형되고 함께 영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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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름과 대한민국이라는 국적이 뚜렷하게 새겨진 인도네시아 가루트시 관립영웅묘지의 양칠성 묘비. 인도네시아 언론 ‘드틱뉴스’ 캡처

양칠성은 한국인 동료 8명과 함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인 부대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수는 더 많았을 수도 있다. 전범 색출 조사로 귀국이 늦어지자 어떤 이는 네덜란드 식민 상황에 다시 내몰린 인도네시아인들의 처지가 딱해 보여서, 어떤 이는 전범으로 몰리느니 차라리 용병이 되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양칠성의 경우는 전범 처형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일본군 상사의 설득을 받아들였다는 설과 현지 아내와 아들을 위해 투쟁에 나섰다는 설이 공존한다. 양칠성의 며느리와 손자들은 현재 자카르타 인근에 살고 있다. 그들과 어렵게 연락이 닿은 김성월(53) 작가는 “아버지를 일본인으로 알고 자란 양칠성의 아들은 어머니가 죽기 직전에야 진실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1945년 가을부터 양칠성은 200~300명 규모의 ‘파팍 왕자 부대(Pasukan Pangeran Papak)’에서 활약했다. 반둥과 족자카르타를 잇는 철도와 도로를 공격하고, 다량의 무기를 탈취했다. 네덜란드 군의 포위를 저지하기 위해 치마눅(cimanuk) 다리를 파괴했을 정도로 폭파 전문가였다는 얘기도 있다.


네덜란드 군은 1948년 11월 기습적인 소탕작전을 벌여 양칠성과 아오키, 하세가와, 부대장 친척 주아나(juana)를 붙잡는다. 전투 중 밀림에서 전사한 같은 한국인 부대원 국재만, 정수호는 끝내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고 잊혀졌다.


이듬해 8월 10일(5월 말 설도 있다) 양칠성은 일본인 동료 두 명과 함께 가루트시장에 끌려 나왔다. 공개 총살 직전 최후의 순간도 두 개의 버전이 존재한다. 하나는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하나는 과장돼 보이는 신화로 기억된다.


#아오키의 선창으로 기미가요를 제창한 뒤 만세를 삼창했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 현장을 목격한 일부는 그냥 “만세”라고도 했다.


#“메르데카(merdekaㆍ자유 또는 독립), 메르데카!” “나는 죽어서도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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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정부 관계자들이 1975년 11월 양칠성을 비롯한 외국인 독립 영웅 3명의 유골함을 가루트 관립영웅묘지에 이장하고 있다. 한인니문화연구원 제공

◇죽어서 3번 소환되다


1975년 다후란, 스코토 등 옛 동료들이 인도네시아 정부에 공식 청원하면서 양칠성은 처형 26년 만에 ‘외국인 독립 영웅’으로 추서된다. 광복 50주년인 1995년에는 한국 시민단체 등의 노력으로 묘비명이 ‘KOMARUDIN, YANG CHIL-SUNG, 양칠성 대한민국’으로 바뀐다. 3ㆍ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는 그의 이름이 붙은 도로가 생길 예정이다. 그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자카르타에서 활동하며 양칠성 관련 글을 써온 배동선(56) 작가는 “살아남는 것만도 벅찼을 시기에 후세의 평가를 염두에 두고 행동하지 않은 것도, 조국을 위해 일하지 않은 것도 분명하지만 피로써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잇는 다리가 되었다는 점은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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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 양칠성 연보 및 묘 위치. 그래픽=송정근 기자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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