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향단이는 여성 알바 노동자다
창작 판소리 '몽중인-나는 춘향이 아니랴,' 공연 장면. 두산아트센터 제공 |
춘향이 변사또 수청을 거부해 옥에 갇혔다. 몸져누운 월매 대신 관아로 달려간 향단은 춘향을 이 꼴로 만든 몽룡 탓, 그네 탓을 하다 문득 암담해진다. 주인에 매인 몸종 신세. 주인 없으면 몸종 인생도 끝. “이제 나는 어쩌지?” 복잡한 심정으로 잠이 든 향단은 꿈을 타고 2020년 서울로 훌쩍 건너간다. 어리둥절하지만 다시 돌아가봐야 답 없기는 매한가지. 향단은 어디 한번 꿈속에서 살아보기로 한다.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에서 16일 개막한 창작 판소리 ‘몽중인-나는 춘향이 아니라,’는 늘 춘향의 뒤에만 서 있던 향단을 주인공으로 불러낸다. 현대로 온 향단이 겪는 사건, 향단의 눈으로 바라본 주변 인물을 통해 궁극적으로 조선이 아니라 지금 시대를 생각케 한다.
구성, 극작, 작창, 소리를 도맡은 이승희는 최근 주목받는 젊은 소리꾼이다. 창작단체 입과손스튜디오 멤버로 ‘판소리 동화시리즈 안데르센’ 등을 선보였고, 현대무용가 안은미의 ‘심포카 바리’ 시리즈, 고선웅 연출의 뮤지컬 ‘아리랑’, 이날치의 음악감독 장영규가 꾸린 국악그룹 비빙 등에서도 등장했다.
두산아트센터의 창작 지원 프로그램 ‘DAC 아티스트’의 지원으로 무대에 오른 이번 공연은 2018년 ‘동초제 춘향가-몽중인’을 잇는 두 번째 작품이다. 이승희는 “그 작품을 준비하다가 춘향가에 향단과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향단을 중심으로 극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창작 판소리 '몽중인-나는 춘향이 아니랴,' 공연 장면. 두산아트센터 제공 |
향단의 삶이 2020년 서울에선 좀 달라졌을까. 신분제 대신 ‘먹고사니즘’이 향단을 옭아맨다. 21세기 향단은 저임금 여성 알바 노동자다. 새벽엔 사무실 청소하고, 낮엔 카페, 밤엔 페스트푸드점에서 일한다. 쉴 틈 없이 일한다. 변사또처럼 희롱을 일삼는 카페 매니저도 있다. 춘향 뒤에서 땀 뻘뻘 흘리며 그네를 밀어주고 온종일 춘향을 뒤치다꺼리했던 그때가 차라리 나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날 향단은 주변을 돌아본다. 모두가 지친 얼굴이었다. 그리고 결심한다. 꿈에서 깨어나기로,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기로. 이승희는 “향단의 처지가 우리 모두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향단이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면 어떨지 담아보고 싶었다”고 했다.
작품 자체는 처연한 느낌인데, 극의 분위기는 아주 신명난다. 고수 이향하, 베이스 장혁조의 밀고 당기는 가락과 리듬에 맞춰, 익살스러운 사설이 펼쳐진다. 카페 손님의 복잡한 주문 사항을 마치 랩을 하듯 판소리로 쏟아내는 장면은 그야말로 골계미의 정수다. 가늘고 풍성한 고음은 서정적이고, 재치 있는 너름새도 맛깔스럽다.
이 작품은 소설로도 만날 수 있다. 이승희의 구성안을 토대로 이연주 작가가 판소리계 소설을 썼고, 다시 그 소설을 차용해 이승희가 판소리 사설을 완성했다. 이연주 작가는 연극 ‘인정투쟁; 예술가 편’ ‘이게 마지막이야’ 등 노동, 인권 문제를 다룬 작품을 선보여 왔다. 소설과 판소리를 비교해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공연 제목 ‘몽중인-나는 춘향이 아니라,’는 쉼표로 끝난다. 쉼표 이후의 문장을 채우는 건 관객의 몫이다. 이승희는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향단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길 바란다”고 말했다. 25일까지 무료 공연.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