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흰 우유만 왜 8년 유예?" 시작은 됐는데 아직 알쏭달쏭 소비기한

38년 쓴 유통기한 버리고 소비기한 도입 첫해

버려지는 식품 줄이고 국제 식품 규격에 부합

대기업들은 소비기한 보수적으로 설정 분위기

한국일보

지난 1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 진열된 음료에 소비기한이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새해가 밝으며 '소비기한(use-by date)'이 적힌 식품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습니다. 계묘년은 38년간 식품에 표시된 '유통기한(sell-by date)'이 소비기한으로 바뀌는 첫해인데, 올 1년은 생산업체의 포장재 교체 부담을 감안해 둘이 병행 사용됩니다.


수십 년간 유통기한을 철석같이 믿으며 먹고 마시다 소비기한이 튀어나오니 헷갈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소비자는 물론 판매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비기한의 핵심 내용과 의문점 등을 짚어봤습니다.


식품 포장지의 다양한 날짜 표시
한국일보

식품 표기에 소비기한이 도입된 지난 1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 뉴시스

7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식품의 날짜 표시에는 제조일자, 유통기한, 품질유지기한, 소비기한이 있는데 제품의 특성에 맞춰 표시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제조일자는 장기간 보관해도 부패나 변질 우려가 낮은 식품에 적용됩니다. 소금, 설탕, 소주, 빙과류가 대표적입니다.


품질유지기한은 고유의 품질이 유지되는 기간입니다. 장기 보관하는 당류, 장류, 절임류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급격한 품질 변화나 변질의 우려가 없어 품질유지기한을 초과해도 섭취가 가능합니다.


이외 대부분의 식품에는 그동안 유통기한이 표시됐습니다. 제조일로부터 소비자에게 유통‧판매가 허용되는 기간입니다. 유통기한은 식품의 품질 변화 시점보다 60~70% 앞선 기간으로 설정됩니다. 가령 100일 뒤 품질이 변한다면 제조 후 60~70일이 유통기한이 되는 겁니다.


올해 도입된 소비기한은 보관 방법을 준수하면 섭취해도 안전에 이상이 없는 기한입니다. 품질 변화 시점보다 80~90% 앞선 시점이라 유통기한보다는 깁니다.


왜 하필 올해부터 소비기한 도입했나
한국일보

지난 1일 서울 한 대형마트에 진열된 햄에 소비기한이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모든 정책이 그렇듯 소비기한도 하루아침에 뚝딱 나온 것은 아닙니다. 2010년대 초부터 학계와 산업계에서 도입을 건의했으니 약 10년 만에 현실화가 됐습니다. 논의 초기에는 유통기한이란 장벽에 막혀 버려지는 식품을 줄여야 한다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먹는 식품인 만큼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컸습니다.


소비기한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2017년입니다. 식약처는 도입 방향을 정하기 위한 연구용역을 진행했습니다.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을 병용할지, 아니면 하나로 통일할지가 관건이었는데, 소비자 혼란을 막기 위해 소비기한만 쓰기로 결론을 내리고 2018년부터 소비자단체, 산업계, 학계 등의 의견을 수렴했습니다. 그 결과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이 2021년 8월 국회에서 개정됐고, 준비기간을 거쳐 이달부터 시행된 겁니다.


유통기한을 버리고 소비기한을 선택한 배경에는 '코덱스 국제식품규격(Codex Alimentarius)'도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통용될 수 있는 기준과 규격 등을 규정한 식품 법령입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보건기구(WHO)가 함께 운영하는 코덱스 국제식품규격위원회가 관장합니다.


유통기한은 2018년 7월 코덱스 규격에서 삭제됐습니다. 국제 기준이 소비기한으로 통일된 셈이죠. 한데 우리는 4년 넘게 더 엄격한 유통기한을 계속 사용했습니다.


현재 영국 일본 호주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소비기한을 쓰고 있습니다. 선진국 중 예외가 있다면 미국 정도입니다. 미국은 체계가 조금 달라 제조업체가 유통기한과 소비기한 중 하나를 선택한다고 합니다.


종류별 가이드라인에도 보수적인 소비기한 설정
한국일보

식품유형별 소비기한 참고 값. 그래픽=강준구 기자

식약처 고시인 '식품공전'은 식품의 규격, 용기와 포장 기준 등을 규정해 식품업계의 바이블로 통합니다. 여기에는 200여 식품 유형에 2,000여 품목이 들어 있는데, 식약처는 소비기한 도입과 함께 제조·유통 업체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주요 품목의 참고 값을 만들어 제공하고 있습니다. 소비기한 설정을 위한 실험에도 비용이 많이 들어가 영세업체들에는 부담이기 때문입니다.


업체들은 별도 실험 없이 제조‧판매하는 식품의 특성, 포장재질, 유통 환경 등을 고려해 가장 유사한 품목의 참고 값을 준용할 수 있습니다. 참고 값 이하로 자사 제품의 소비기한을 설정하면 되는 겁니다.


식약처는 지난달 32개 식품 유형의 180개 품목 소비기한 참고 값을 공개했습니다. 기간 설정 실험을 진행 중인 250개 품목에 대해서도 이달 말 결과를 내놓을 예정입니다.


현재까지 완료된 참고 값 가운데 초콜릿가공품 3개 품목의 평균 소비기한은 유통기한(30일)보다 21일 긴 51일입니다. 캔디류(15일→23일), 김치(30일→35일) 등 소비기한이 늘어난 식품이 있는 반면에 전란액(달걀의 흰자나 노른자로 만든 액, 3일로 동일), 즉석조리식품(6개 품목, 5~7일→5~8일), 두부(10개 품목, 10~30일→10~35일)처럼 둘이 같거나 큰 차이가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한국일보

지난 2일 서울 용산구 이마트 용산점에 진열된 두부. 유통기한(왼쪽)과 소비기한(오른쪽)에 차이가 없다. 류호 기자

만약 두부 제조사가 소비기한 참고 값 중 최소치를 택하면 유통기한 최소치와 같아집니다. 이렇게 되면 소비자는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제조사, 특히 대기업들이 소비기한을 최대한 보수적으로 설정하려는 의도도 엿보입니다.


과거에는 소비기한이 기업에만 이득이 될 것이라는 반대 논리가 강했지만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사회 분위기가 바뀌긴 했습니다. ESG 경영이 대세가 됐고, 식품 사고 한 건이 기업을 뿌리째 흔들 수 있다는 학습효과도 누적됐습니다. 제품 가짓수가 많은 일부 대기업들은 식약처의 참고 값과 무관하게 자체적으로 엄격히 소비기한 설정 실험을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흰 우유만 2031년에 적용하는 이유
한국일보

지난 1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흰 우유가 진열되고 있다. 변질이 쉬운 냉장 유통 우유는 2030년까지 기존처럼 유통기한이 표시된다. 뉴스1

올해는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의 혼용이 가능하지만 내년부터는 유통기한을 표시하던 전 제품에 소비기한 표기가 의무화됩니다. 다만 한 가지 식품만 예외입니다. 많은 가정에서 유통기한을 넘기기 쉬운 식품 중 하나인 냉장 보관 흰 우유입니다. 법령에는 8년의 범위에서 소비기한 도입을 유예하는 내용이 있는데, 보관 온도에 매우 민감한 흰 우유의 특성을 반영한 것입니다.


낙농업계는 냉장 유통 환경이 불완전한 현실에서 우유 변질 가능성, 그로 인한 업계 피해와 소비자 건강 문제 등을 우려해 소비기한 도입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다 절충점을 찾은 게 8년간의 준비기간입니다. 초안은 5년 유예였는데, 2026년 1월부터 수입 우유의 관세가 없어져 낙농업계가 힘들 수 있다는 점이 감안돼 8년으로 정해졌습니다.


식약처 관계자는 "그 정도 기간이면 흰 우유도 소비기한 적용이 가능할 것으로 봤다"며 "도입 첫해인 만큼 부족한 점을 계속 보완하며 제도를 정착시키겠다"고 밝혔습니다.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오늘의 실시간
BEST
hankookilbo
채널명
한국일보
소개글
60년 전통의 종합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