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재의 세심한 맛] 새콤달콤 제주 감귤 품종 94%는 일본에서 왔다
겨울이 제철인 귤은 저렴하면서도 새콤달콤함의 균형이 잘 맞아 즐겨 먹을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
백화점에서 샤인머스캣을 샀다. 한 송이에 6만1,335원. 대폭 할인이 들어가 2만5,445원이었지만 싸다고는 할 수 없다. 게다가 맛이 썩 좋지 않았다. 샤인머스캣이라는 품종 전체가 망가졌다는 방증이랄까. 신맛 없이 균형이 깨진 단맛만 넘치고 껍질에는 향도 쌉쌀함도 없으며, 과육은 느글느글할 정도로 무르다. 물론 돈이 넘쳐나서 사먹은 건 아니다. 인기를 누리며 흔해진 사이 품질도 덩달아 낮아졌으니 백화점처럼 비싼 창구에서 사 먹어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직업 정신에서 시도해봤다. 백화점을 돌며 가장 비싼 샤인머스캣을 골라 먹어봤지만 쌓인 편견을 해소해줄 만한 건 찾지 못했다.
이 겨울, 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집 앞 마트에서 대강 골라 한 봉지를 사오며 새삼 귤의 존재에 감사했다. 1㎏에 5,000원 안팎으로 싼 데다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새콤달콤함의 균형이 잘 맞아 맛도 제법 좋다. 사시사철을 통틀어 봐도, 눈치라고는 없는 단맛이 줄줄 넘쳐나는 과일 세계에서 드물게 제 몫을 단단히 한다. 어찌 보면 샤인머스캣과 귤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는 있다. 포도는 포도이고 귤은 귤 아닌가. 하지만 지갑을 여는 입장에서는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그게 그것처럼 되어 버린다. 귤은 맛의 표정이 다채롭지만 샤인머스캣은 단조롭다. 게다가 굳이 무게 대비 가격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귤이 엄청나게 더 싸다. 대폭 할인이 들어간 샤인머스캣 한 송이 가격으로 귤은 10㎏ 넘게 살 수 있다. 이래저래 귤의 압승이다.
웬만한 겨울철 귤은 어디서 어떤 걸 집어와도 먹을 만하다. 이런 귤이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진 건 아니다. 실제로 경험도 해봤다. 미국에서 첫 겨울, 한국 식품점에서 귤처럼 생긴 과일을 발견하고는 얼씨구나 좋다고 집어 들었다. 겨울엔 역시 귤이지. 똑같이 예쁘고 맨들맨들하게 생겼건만 내가 사온 과일은 귤이 아니었다. 어째 껍질이 과육에 찰싹 달라붙어 잘 벗겨지지 않는 것부터 미심쩍다 싶더라니, 입에 넣어보니 찌푸린 얼굴을 다시 펼 수 없을 정도로 신맛이 강했다. 게다가 씨는 또 어찌나 많은지. 구겨진 표정을 채 펴지도 못한 채 연신 씨를 뱉어 내면서 왠지 속았다는 기분에 억울했다. 알고 보니 그건 만다린이었다.
흔히 즐겨 먹는 귤은 만다린 품종에 포멜로 품종이 12~28%가량 섞여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
제주 귤, 109년전 일본에서 건너와
귤부터 각종 오렌지, 그레이프프루트(자몽)에 이르는 시트러스류(citrus, 귤속)의 가계도는 매우 복잡하다. 월간 내셔널지오그래픽 2017년 2월호 기사에 의하면 다섯 종류가 시트러스 대부분의 조상으로 꼽힌다. 만다린과 포멜로(pomelo), 시트론, 금귤(쿰쾃), 그리고 파페다(papeda)다. 만다린은 내가 귤이라 믿고 먹었다가 실망했던 바로 그 과일이며, 포멜로는 오렌지와 그레이프프루트의 조상으로 꽤 두껍고 폭신폭신한 속껍질이 특징이다(중국에서는 포멜로의 속껍질을 조려 먹기도 한다). 나머지 셋은 모두 과육이 부실한데, 쿰쾃은 씁쓸함이 적당히 살아 있는 껍질을 먹을 수 있는 반면(요즘 시금치와 샐러드를 만들면 아주 잘 어울린다) 시트론과 파페다는 겉껍질로 향만 즐긴다.
오렌지의 조상인 포멜로는 속껍질이 두껍고 폭신폭신하며 대체로 달다. 게티이미지뱅크 |
유자 등 시트론은 향이 좋지만 과육이 부실해 주로 껍질만 요리에 활용한다. 게티이미지뱅크 |
다섯 종류 가운데 만다린과 포멜로, 시트론을 각 꼭지점으로 삼아 정삼각형을 그리면 시트러스류 가계도의 윤곽이 잡힌다. 일단 오렌지는 만다린과 포멜로의 교잡종이므로, 이를 바탕으로 시트러스류의 족보를 자세히 밝히려는 연구가 벌어졌다. 미국 에너지부 조인트게놈연구소의 앨버트 우 박사팀이 세계 각국의 연구진과 게놈 해독 및 비교 분석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일단 대상은 만다린 네 종류, 포멜로와 오렌지 각각 두 종류를 대상으로 한 결과가 학술지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 2014년 7월호에 게재됐다. 일단 만다린과 포멜로의 게놈을 비교해보니 160만~320만년 전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음이 밝혀졌다.
2014년 발표 후 3년 7개월 만인 2018년 2월, 후속 연구결과가 네이처에 실렸다. 게놈 서열이 이미 알려진 감귤류 28종류에 30종류의 새로운 해독 결과가 가세해 감귤류의 가계도가 분명해졌다. 기원지로 추정되는 중국 남서부의 윈난성과 인도 북동부 히말라야 일대를 중심에 두고 동쪽으로 만다린, 남쪽으로 포멜로, 서쪽으로 시트론이 진화했다. 첫 연구 대상이었던 만다린 네 종류의 분석 결과 이미 포멜로의 유전자가 섞여 있음이 확인돼, 중국에서 28종의 만다린을 수집해 연구에 포함시켰다. 그 결과 5종이 순종 만다린이었다. 이를 ‘유형 1’이라 분류한다. 그리고 포멜로의 유전자가 1~10% 섞여 있는 ‘유형 2’, 마지막으로 12~28%가 섞여 있는 만다린인 ‘유형 3’이 있다. 우리가 즐겨 먹는 귤은 바로 유형 3이다.
제주도에서 재배하는 유형 3의 귤은 일제 강점기에 도입돼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재배됐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귤은 있었다. 고려시대 문종 6년(1052)의 문헌에, 제주 감귤을 왕가 공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공물제도가 폐지되자 제주의 감귤나무는 버려졌다. 당시의 품종은 동종귤, 금귤, 병귤 등인데 현재는 상업적 가치가 없어 재배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신품종의 귤이 1911년 처음으로 국내에 발을 들였다. 천주교 서흥성당(현 면형의 집)에 거주하던 엄다께 신부가 일본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준 제주벚나무에 대한 답례였다. 14그루를 심었는데 현재까지도 한 그루가 남아 있으며 귤도 수확한다. 중국 동남부 윈저우(溫州)에서 비롯돼 온주귤이라 불리는 한편, 일본을 통해 사츠마(薩摩) 오렌지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퍼졌다.
일본 청견의 교배종인 한라봉은 1990년대 국내에 들어왔다. 게티이미지뱅크 |
한라봉, 천혜향은 일본의 청견이 조상
이렇게 귤 가계도 1부를 살폈다. 그렇다, 귤의 족보가 워낙 복잡하면서도 방대하기에 이만큼을 살펴도 고작 1부에 지나지 않는다. 가계도 2부는 귤 교배종으로 이뤄져 있다. 1부의 기본 귤이 잔뜩 쌓아 놓고 손 가는 대로 부담 없이 까먹을 수 있는 과일이라면, 2부의 교배종은 각각의 상품 가치가 좀 더 높은 고급화 품종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20세기에 원예학자들이 체계적인 교배를 통해 개발한 품종이라 족보가 좀 더 분명하고 소화하기도 쉽다.
노지 귤의 제철이 10월에서 이듬해 1월, 타이벡 감귤이 2월까지라면 2부의 교배종은 그 끝을 물고 이듬해 제철까지 이어진다. 한라봉부터 황금향까지, 이어달리기를 하듯 꼬리를 물고 등장한다. 이들은 완전히 익도록 오래 뒀다가 늦게 수확하는 감귤류, 즉 만감류라 일컫는다. 전부 7종을 꼽을 수 있는데 일본에서 개발된 청견(清見, 키요미, 1~3월 수확)이 나머지의 조상격이다. 1949년 온주밀감의 일종인 궁천조생과 트로비타 오렌지를 교배해 개발한 품종이다. 유형 3의 만다린으로 포멜로의 기여도가 38%로 가장 높다.
청견의 자손 가운데 맏이는 한라봉(1~4월 수확)이다. 1962년 일본에서 청견과 온주밀감의 일종인 폰캉을 교배해 개발한 데코폰이 1990년대 국내 도입되며 한라봉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볼록 솟은 꼭지 모양이 한라산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둘째는 천혜향(1~4월)으로, 청견과 앙코르 만다린을 교배한 얻은 1세대를 머코트 만다린에 한 번 더 교배시켜 개발한 품종이다. 역시 일본에서 개발됐고 원래 이름은 세토카이다. 뻥튀겨 놓은 귤마냥 넙적하고 겉과 속껍질이 모두 얇으면서도 즙이 많고 한국 이름처럼 향도 좋다. 천혜향은 만감류 가운데 가장 맛있다. 그 밖에 진지향(2~5월 수확), 한라향(4~10월 수확), 레드향(1~3월), 황금향(7~12월)이 있는데 앞의 둘은 각각 청견과 흥진조생 및 길포폰캉을, 뒤의 둘은 한라봉에 서지향과 천혜향을 교배한 품종이다.
일본 청견의 교배종인 천혜향은 향이 좋고 속껍질이 얇으면서도 즙이 많다. 게티이미지뱅크 |
비단 만감류뿐만 아니라, 감귤류까지 통틀어 제주 재배 품종의 94%가 일본 개발 품종이다. 이런 현실에 정서적인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는데, 그보다 현실의 부담이 훨씬 더 크다. 한라봉이나 천혜향 등은 오래 전에 출시됐으므로 괜찮지만 신품종을 둘러싼 현실은 냉엄하기 때문이다. 국제식물신품종보호동맹(UPOV) 협약에 따라 2012년부터 품종보호제도가 시행됐다. UPOV에 따르면 개발한 지 25년이 지나지 않은 신품종은 보호작물로 지정할 수 있다. 재배국이 개발국에 로열티를 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2018년 만감류 신품종인 미하야와 아스미를 놓고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두 품종은 일본의 국립연구개발법인이 내놓은 신품종으로, 국내에서는 2014년부터 생산이 이뤄졌다. 일본에서는 2018년 1월 신품종으로 출원해 2039년까지 보호를 받는 처지가 돼버렸는데, 정작 국내에서는 정식으로 묘목을 수입한 근거가 없었다. 당시 매체의 표현을 빌자면 도용된 묘목으로 재배를 한 셈이다. 따라서 로열티를 지불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농협에서는 계통출하(협동조합의 계통조직을 통한 출하)를 금지시켰다. 현재로서는 로열티 지불 없이 이들 품종 판매나 묘목 분양 등은 불가능하다. 농촌진흥청에서 2014년 이후 매년 220억원 이상을 투입해 신품종을 개발·보급 중이다. 그러나 현재 감귤 종자 자급률은 2.5%로 2014년에 비해 1.5%포인트 증가하는 데 그쳤다. 물론 품종 개발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청견이 32년, 한라봉은 40년 이상 걸렸다.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