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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한국일보

여성 혐오·가정 폭력 ·아동 학대… 호러로 풍자한 아르헨티나의 민낯

한 남성이 23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저임금 반대 현수막이 걸린 상점 앞을 지나가고 있다. 유엔은 8일 코로나 유행의 영향으로 아르헨티나 경제의 8.2~10% 하락과 연말 40%에 이를 수 있는 빈곤율 증가를 경고하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EPA 연합뉴스

남아메리카 대륙 남동부에 위치한 연방 공화국. ‘아르헨티나’라는 나라를 떠올릴 때 우리가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는 것들은 얼마나 될까? 열정의 상징 탱고의 원산지이자 압도적인 이과수 폭포가 쏟아지는 곳. 디에고 마라도나와 리오넬 메시의 고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창조한 마술적 리얼리즘의 탄생지. 가장 가깝게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세 명의 청춘 스타가 자유와 낭만을 찾아 떠난 여행지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오늘날의 아르헨티나를 살아가는 현대 작가들은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소설가이자 언론인인 마리아나 엔리케스는 독특한 호러 소설의 무대로 아르헨티나를 적극 활용한다.


최근 출간된 소설집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엔리케스의 작품이다. 첫 장편 ‘내려가는 것이 최악이다’(1995) 이후 공포소설의 규범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현대 아르헨티나 사회 이면에 도사린 어둠을 그리는 작품을 꾸준히 써내 ‘라틴아메리카 고딕 리얼리즘의 여왕’이 된 작가의 대표작이다. 지금까지 스페인어 문학 전통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호러 문학 장르의 지표를 제시하면서도, 라틴아메리카의 환상문학을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린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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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르헨티나를 배경으로 하는 열두 편의 단편에는 목이 잘린 시체, 사람의 손톱과 진열장에 장식된 폐가, 아기만 살해하는 연쇄 살인마, 가죽 공장이 배출한 오염수로 인해 끔찍한 기형아들이 태어나는 슬럼가, 고양이를 잡아먹는 감금된 소년, 스스로 불길 속에 몸을 던지는 여자들 등, 기묘하고도 섬뜩한 묵시록 속 장면이 시종일관 펼쳐진다.


그러나 이 같은 호러의 이미지에 교묘히 섞여 있는 것은 현대 아르헨티나의 각종 궁핍한 현실이다. 한때는 부유했지만 군사 독재와 경제 불황 시기를 겪은 아르헨티나는 이후 빈민이 증가하고 불안정한 치안으로 불신이 만연해졌으며 약자에 대한 폭력과 납치가 횡행했다. 여기에 심각한 환경오염까지 겹쳤다. 이 같은 현실에 전통 미신과 주술의식이 지배하는 남미 대륙 특유의 정서가 얹혀지면서 엔리케스만의 독특한 호러 세계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그 중에서도 특히 아르헨티나 문학이 그간 외면해 왔던 가정 내 성폭력, 아동 및 여성 학대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표제작인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실제 2011년 아르헨티나에서 한 남성 의사가 병적인 질투심으로 대학생이었던 열한 살 연하의 여자친구의 몸에 알코올을 붓고 불을 지른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소설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스스로 불태우는 집단행동을 통해,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항한다. 작가는 만연한 여성 혐오 범죄에 더욱 극악한 방식으로 대응함으로써 사회에 만연한 여성들의 공포를 전복시킨다.


“얘야, 불을 지르는 건 남자들이란다. 그들은 예전부터 우리 여자들을 불태웠지.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를 거란다. 그렇지만 우리는 절대 죽지 않아. 이제는 우리 몸의 상처를 당당하게 보여줄 거라고.”

마리아나 엔리케스. 현대문학 제공 ©Nora Lezano

뿐만 아니라 소설에는 유독 어린아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납치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리의 아이가 사교 집단의 제물로 바쳐지거나, 새로 이사한 곳의 옆집에서 쇠사슬에 묶인 아이의 환영을 보기도 한다. 열두 살짜리 아이들은 트럭 운전사를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고, 그 돈으로 마약을 하다가 마약 중독자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짜 공포는 실제로도 언제든 범죄의 타깃이 될 수 있는 거리의 아이들이 차고 넘치는 현실이다. 작가는 아이들을 구해내지 못하는 소설 속 어른들의 절망감으로 우리가 진짜 경계해야 할 공포를 말한다.


“내가 왜 그 아이를 데리고 있지 않았던 걸까? 그 불쌍한 것을 엄마에게서 떼어낼 방법을 왜 생각하지 않았던 거지? 아니면 왜 아이를 씻겨주지도 못했던 걸까? (…) 아니야. 길바닥에 살았지. 이젠 죽었으니까. 그것도 목이 잘린 채!”


먼 남미의 풍경이지만 이 묵시록이 크게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래서 유난히 친숙한 공포로 다가오는 까닭은, 우리 역시 그 묵시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7시간 넘게 여행가방에 갇혀 있다 숨진 천안의 A군, 쇠사슬에 묶여 있다 가파른 지붕을 넘어 목숨 건 탈출을 감행한 창녕의 B양. 호러소설보다 끔찍한 현실은 멀리 있지 않으니까.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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