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가 탈의실 촬영… 청춘 앗아가는 직장 성폭력
고용절벽의 비극, 20대 산재 리포트
죽음으로 내몬 동료의 성폭력
27세 김모씨 뇌출혈로 사망… 근로복지공단 1차 심사서 산재 승인
‘직장 성희롱’ 산재 신청 살펴보니 40%가 사회초년생인 20대 청년
성희롱 관련 산업재해 신청자 연령대별 비율. 그래픽=김경진기자 |
젊은 죽음은 이유 불문 비극이다. 이 가운데 가장 슬픈 죽음은 벼랑 끝 일터에서 허무하게 맞은 최후일 것이다. 20대가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직장을 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아서다. 어렵게 직장을 얻는다고 해도 젊은이들은 또 다른 고비에 직면한다. 특유의 서열문화 속에서 갑질이나 책임 전가, 만연한 성폭력, 충분한 교육 없이 급히 떠안게 되는 위험한 업무, 안전 조치 없이 내몰리는 현장 등. 한국일보는 최근 2년(2017~2018년)간 전국 일터에서 산업재해(산재)로 숨지거나 장애진단을 받은 20대들의 안타까운 사례들을 고용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확보하고, 그 외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추가로 취재했다. 일터에서 희생된 10대들의 사연을 보도한 ‘면허 없어도 돼… 배달소년 죽음 내몬 어른들’ 기사(2018년 11월 22일자 1면)에 이어 ‘젊은 죽음’을 추적하는 일환이다. 이 사례의 희생자들은 우리 사회의 어떤 부조리에 걸려 넘어져 미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스러졌을까. 28일은 특성화고 졸업 후 막 사회에 뛰어들어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워가며 일하다 생일을 하루 앞두고 숨진 지하철 2호선 구의역 김군(당시 19세)의 사망 3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2017년 10월 26일. 서울의 한 제조업 회사 서비스센터에서 고객 응대를 했던 김유리(가명ㆍ당시 27세)씨는 그날이 유독 이상하게 느껴졌다. 느닷없이 아침부터 본사 본부장이란 사람이 지점을 찾았다. 나이가 비슷해 평소 친하게 지냈던 직원 이재민(가명ㆍ31)씨는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은 터였다. 심각한 표정의 본부장은 이윽고 김유리씨와 본사에서 파견 나온 정미희(가명) 주임을 조용히 불렀다. 영문을 모르고 따라간 자리에서 본부장은 “이재민씨가 버스 정류소에서 휴대폰으로 불법 촬영을 하다 걸려 경찰 조사를 받았는데, 휴대폰에서 김유리씨 영상이 나왔다”라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는 김유리씨가 새로 지점을 옮겨 일한 지 사흘 뒤인 9월 30일과 10월 17일 두 차례에 걸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여자 탈의실에 침입했다. 그리고 휴대폰을 휴지 케이스에 숨겨두는 수법으로 김씨와 인턴 직원을 촬영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심한 충격을 받은 김씨는 이날 정 주임과 술을 마시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다음 날 입사 이래 처음으로 결근했다. 얼마 전부터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발음이 새는 증상을 보였던 그는 주말 동안 가족에게 “머리가 심하게 아프다”며 통증을 호소했다. 월요일에 다시 출근한 김씨는 이날 본사에 있던 정 주임에게 전화를 걸어 안면 마비 증상을 호소했고 정 주임은 병원에 다녀오라고 했다. 하지만 업무를 대체할 이가 없어 결국 병원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10월 31일 새벽. 심한 구토와 함께 전신 마비 증상이 찾아와 응급실로 실려 갔다. 뇌출혈이었다. 혼수상태에 빠진 김씨는 입원 100여일 뒤인 2018년 2월 숨을 거뒀다.
[저작권 한국일보]성희롱 관련 산업재해 신청 및 승인건수/ 강준구 기자/2019-05-26(한국일보) |
20대 사회초년생 노리는 검은 손
직장 내 검은 손길에 찬란한 젊음이 스러져가고 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20대 청년들을 향한 직장 상사와 동료들의 성폭력은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는 것을 넘어, 김유리씨의 사연처럼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심각하다. 한국일보가 근로복지공단에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확인한 결과 지난 2년(2017~2018년)간 20대 청년 최소 2명이 성폭력 범죄에 의한 산업재해로 사망했다. 김유리씨 외에 한 명은 직장 내 성폭력에 따른 자살이었다.
산재 승인일자 기준으로 20대 산재 사망자는 2017년 56명, 2018년 70명이었다. 국회 조배숙(민주평화당) 의원실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6년(2013~2018년 9월)간 직장 내 성희롱으로 산재를 신청한 32건 중 40.6%(13건)가 사회 초년생에 해당하는 20대 청년들에게 집중됐다. 재해경위에 ‘성희롱’이 포함된 사건에 한정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성폭력 산재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직장 내 관계 형성에 미숙한 젊은이들에게 위계와 친분을 가장해 찾아오는 부적절한 욕망이 산업재해의 한 귀퉁이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불법 촬영 충격으로 사망한 고 김유리씨의 경우는 상상하지 못한 동료 직원으로부터 입은 피해라 그 충격이 더했다. 김씨 사례를 담당한 노무사 장현철(가명)씨에 따르면 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 새 지점으로 온 김씨에게 두 살 위인 가해자 이씨는 말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친근한 동료였다. 경찰 조사에서 이씨가 탈의실 불법 촬영을 한 것으로 밝혀진 날 직전에도 김씨는 회식 자리에서 이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서 불법 촬영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충격이 컸다. 사망 이후 산재 처리 과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사측은 불법 촬영 부분을 언급하지 않는 조건으로 산재를 진행하겠다고 버텼다. 노무사 장씨는 “김유리씨가 사건 전에 전조 증상이 있어 재심사까지도 각오했지만 예상외로 1차에서 (산재)승인이 났다”라며 “근로복지공단에서도 불법 촬영에 따른 충격이라는 촉발 요인을 엄중하게 보고 산재로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해자 이씨는 정신감정서를 제출했다는 이유로 법정에서 벌금 50만원 처벌을 받았을 뿐이다. 그의 휴대폰에는 김씨의 영상 외 7건의 불법 촬영 영상이 더 있었다.
게티이미지뱅크 |
[저작권 한국일보]산업재해 인정 성폭력 피해 사례들/김경진기자 |
직장 내 성폭력 가해자 대부분이 상사
20대 청년을 향한 직장 내 성폭력은 주로 위계 관계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조배숙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지난 6년간 직장 내 성희롱으로 산재를 인정받은 20대 사례 13건 중 단 한 건(외부인)을 제외하고 가해자는 모두 직장 상사인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 직장 상사와 단둘이 있는 상황 또는 회식 자리처럼 사무실 외 공간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등 위계 관계에 의한 피해가 상당수다.
2015년 신입사원이었던 성연희(가명ㆍ28)씨는 외근 등 가해자와 둘만 있는 상황에서 선임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가해자는 위계를 이용해 성씨와 일부러 둘만 있는 시간을 자주 만들었고 손과 팔, 어깨 등 신체를 접촉했다. 극심한 불안과 우울감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수면제까지 복용해야 했던 성씨는 불안장애 판정을 받았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던 이미정(가명ㆍ35)씨는 20대이던 2012년 상사와 함께 이탈리아로 해외교육 출장을 갔다가 성추행을 당해 우울증 진단을 받았고, 장희원(가명ㆍ32)씨도 2015년 직장 상사와 택시로 귀가하던 중 성추행을 당하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를 받아야 했다. 남성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백화점 내 주차 안내 업무를 하던 정재윤(가명ㆍ24)씨는 입사하자마자 피해를 입었다. 자신에게 일을 가르쳐 주던 50대 남성 상사가 정씨의 신체 중요 부위를 만지는 등 성추행을 해 적응장애 진단을 받았다. 에어컨 설치 작업을 하던 고진우(가명ㆍ27)씨 역시 입사 일주일 만에 팀장이 두 달간 신체 중요 부위를 접촉하는 일이 잦아 적응장애 판정을 받고 팀장을 고소하기도 했다.
사회 초년생들에게 벌어진 끔찍한 상황은 짙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2011년부터 한국정보화진흥원 산하 손말이음센터에서 수화통역사로 일하게 된 황소라(31)씨에게 2014년 12월 24일은 잊고 싶은 기억이다. 수화 전공자인 황씨는 영상 통화로 청각ㆍ언어장애인들과 수화를 한 뒤 이를 비장애인들에게 전하는 중계 업무를 했다. 장애인들을 위한 서비스였지만 이날 걸려온 전화 속 인물은 장애인이 아니었다. 추후 건설업 일용직으로 알려진 30대 남성은 전화로 황씨를 확인한 뒤 중요 부위를 드러낸 채 음란 행위를 시작했다. 가해자는 큰 충격을 받은 황씨를 비롯해 다른 여성들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그 다음 달에도 전화를 걸어온 남성은 남성 직원과 통화가 연결되면 전화를 황급히 끊었고, 황씨 등 여성들이 받으면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음란행위를 했다.
황씨는 하룻밤 새 열 번이 넘는 음란전화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발신자의 전화번호 추적이 어려워 가해자 특정에 애를 먹었고, 급기야 회사에서는 “신고를 위해 음란행위 하는 장면을 캡쳐(동영상을 사진으로 촬영)하라”는 황당한 지시를 내렸다. 황씨는 “괴로움을 참으면서 캡쳐해야 하는 상황에 상처가 더 커졌다”라고 말했다. 결국 심각한 스트레스로 괴로워하던 황씨는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고 우울증, 급성 및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업무와 연관 있다는 결론으로 지난해 4월 산재를 인정받았다.
피해자 대부분은 적응ㆍ불안장애 등에 시달렸고 심한 경우 발작과 틱증상(자각하지 못한 채 갑작스레 근육이 움직이는 병증), 공황장애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지난해 성추행(어깨를 쓰다듬는 행위 등) 피해로 산재를 인정받은 22세 여성은 과호흡을 동반한 발작과 목의 틱증상, 우울증 등 복합적인 증상이 나타났고 결국 전환장애(심리적인 원인으로 운동이나 감각기관에 이상증세가 나타나는 병증)를 판정받았다. 2016년 산재를 인정받은 28세 여성은 어지럼증과 이명에 시달렸고 길에서 쓰러져 발목 인대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2015년 산재를 인정받은 여성은 직장 본부장으로부터 술자리에서 “더 붙는 옷을 입어라. 나한테 잘 보여야 진급할 수 있다”는 성희롱 발언을 들었다. 술자리를 황급히 마무리하기 위해 본부장의 대리기사를 불러놓고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그는 본부장으로부터 기습적으로 목에 스킨십을 당했다. 이후 본부장과 회사에서 마주치면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불안 증세와 함께 얼굴 알레르기, 탈모 증상까지 떠안았다.
[저작권 한국일보]성희롱 관련 산업재해 신청자들의 증상/김경진기자 |
성폭력 빈번하지만 신청 적은 산재
직장 내 성폭력 피해가 심각하지만 산재 신청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산재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사건을 수면 위로 드러내야 하는데 사회 경험이 적은 20대들로서는 압박감이 더 클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4년(2015년~2018년 9월)간 전국 지방노동청에 신고된 직장 내 성희롱 피해 신고 건수는 2,775건이다. 하지만 같은 기간 성희롱 등 성폭력에 따른 산재 신청 건수는 1% 수준인 28건에 그친다. 지난 6년간 산재 승인율이 93.7%(전체 32건 중 30건 승인)로 인정 확률이 높긴 하지만 사건 외부화에 따른 두려움이 신청 단계에서부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다. 실제 황소라씨의 사업장의 경우 다른 동료 여자 통역사들도 피해를 입었지만 산재를 신청한 건 황씨가 유일하다. 황씨 또래의 젊은 직원 대부분은 모욕감과 트라우마에 회사를 그만뒀고, 당시 이야기를 다시 상기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 산재 신청을 하지 않았다.
노무사 모임인 노벗(노동자의 벗)의 박성우 회장은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상당수는 이를 산재로 인식하면서도, 자신의 피해 상황과 질환과의 인과 관계 입증이 어렵다고 생각해 실제 신청하는 경우는 드물다”라고 말했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성폭력 관련 산재는 가해자를 지목하고 또 가해 행위를 입증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상기해야 하는 등 심리적 부담이 상당할 수밖에 없다”라며 “기본적으로 사건 외부화에 따른 2차 피해가 두려운데 사회 초년생인 20대들에게는 더더욱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위계 관계에 의한 성폭력 범죄가 근절되어야 하는 게 근본적인 해법이지만, 범죄 발생 후 2차 피해를 강하게 컨트롤하는 제도를 갖춰 성폭력 산재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라고 전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