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데쳐서 초고추장에 푹? 브로콜리가 슬퍼해요
이용재의 세심한 맛
브로콜리는 현대인의 건강 식탁 필수품이 됐다. 부드러운 송이와 아삭한 줄기를 잘 손질하면 다양한 식재료와 두루 어울린다. 게티이미지뱅크 |
‘인생 브로콜리’는 7, 8년 전 전남 강진에서 먹었다. 해외에서 살다가 몇십 년 만에 고국을 찾은 이와 일대를 돌다가 한정식 골목에서 저녁상을 받았다. 맹세코 허투루 자리만 채우는 반찬 하나 없이 모든 게 맛있는 가운데 브로콜리는 조금 과장을 보태 압도적이었다. 향이 살아 있는 가운데 대가리는 부드럽고 대는 딱 기분 좋을 만큼만 아삭했다. 음식과 요리에 엄청나게 해박한 지인은 쪄서 이런 질감을 끌어낸 것 같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런 브로콜리를 마음에 품은 채 집에서 먹을라치면 이상하게도 별 의욕이 돋지 않는다. 찌든 데치든 굽든 그저 ‘풀을 먹어야지’라는 심경으로 브로콜리를 우적우적 씹는 나를 발견하고 서글퍼진다. 왜 그럴까. 흔해져 동네 마트에서 그냥 집어올 수 있게 된 만큼이나 질이 떨어지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브로콜리의 대가리는 이루고 있는 작은 봉오리 하나하나가 꽃과 유사한 형태를 이루는 위화(僞花)인데, 일단 전체가 진한 청록색으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야 싱싱하다. 막상 찾아보면 이런 브로콜리가 별로 없고 점점이 노란색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맛의 정점을 넘어섰다는 의미이다.
또한 브로콜리는 적당히 커야 한다. 또 마트를 들먹여서 좀 미안하지만 그런 판매처에서 두 개씩 비닐에 포장해 파는 것들은 대체로 작다. 손질을 해보면 바로 느낌이 오는데, 가지의 질긴 껍질까지 다 벗겨내고 나면 의외로 먹을 게 많지 않은 채소가 브로콜리이다. 그래서 ‘두 개씩 묶어서 괜찮은 가격에 파네’라며 사오면 데칠 물을 불에 올리고 손질하는 동안 또 서글퍼진다. 이렇게 먹을 게 없다니. 마지막으로 브로콜리는 단단해야 한다. 대가리도 그렇지만 특히 가지가 단단해야 싱싱해 익혀도 아삭함을 잃지 않는다. 이런 브로콜리를 찾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있다면 식탁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먹기는 먹어야 한다. 한식의 만능 양념 가운데 하나인 초고추장이 있으니 브로콜리도 혜택을 볼 수 있지만 그렇게 먹다 보면 스며드는 회의를 떨칠 수가 없어진다. 혹시 이것도 초고추장 맛으로 먹는 것은 아닐까? 초고추장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송골송골 맺혀 있는 꽃봉오리만큼이나 브로콜리는 여러 식재료와 두루 짝을 이뤄 식재료로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능력자이다.
세 단계 손질법
나무를 닮은 브로콜리는 밑에서 위로 올라오는 가지를 하나씩 따낸다는 기분으로 썰어야 손질이 쉽다. 게티이미지뱅크 |
짝을 찾아주려면 일단 손질부터 잘 해야 한다. 좌우대칭형이기는 하지만 배추나 무와는 확연하게 다른 형국이므로 경험이 전혀 없다면 처음에는 손질의 길이 잘 안 보여 막막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부담을 느끼지 말고 세 단계로 나눠 기억하자. 일단 브로콜리는 나무를 닮아서 굵은 밑동이 가는 가지로 갈라지니 이 점에서 손질을 시작한다. 둘째, 밑에서 위로 올라오며 가는 가지를 하나씩 따낸다는 기분으로 썰어낸다. 큰 송이를 작은 송이(floret)로 나눠주는 것이다. 셋째, 송이를 잘라낸 그대로 먹어도 좋지만 크기를 최대한 맞춰줘야 균일하게 익는다.
그리고 덤으로 가지를 잊지 않는다. 껍질이 두껍고 질겨 연필 깎듯 돌려 썰어 벗겨내고 나면 족히 삼분의 일은 부피가 줄어들지만 워낙 아삭한데다가 오이에 비해 맛도 진해 먹는 즐거움이 또 다르다. 대개 껍질을 벗긴 뒤 가로로 사등분, 세로로 이등분으로 썰면 어른 새끼손가락 크기로 여덟 조각을 얻을 수 있다. 손질이 끝난 브로콜리는 받아 놓은 물에 담가 씻은 뒤 흐르는 물에 헹궈 체에 담아 받쳐 놓는다.
찌기, 데치기, 굽기
브로콜리에 설탕을 살짝 뿌리고 오븐에 구우면 맛과 향이 한층 더 강해진다. 게티이미지뱅크 |
브로콜리를 생으로도 먹을 수 있을까? 물론 있다. 다만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뻣뻣하여 씹어 넘기면 목이 메는 가운데 자잘한 봉오리가 식도를 까슬까슬하게 긁고 내려가 자칫 잘못하면 사레라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 따라서 아삭함을 잃지 않되 숨을 살짝 죽을 정도로 잘 익히는 게 중요하다. 나에게 인생 브로콜리를 선사했던 찜은 기본적으로 난이도가 별로 높지 않다. 물을 끓이면 올라오는 뜨거운 수증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식재료를 익히는 습식 조리법이기 때문인데, 다만 수증기가 뜨거우니 화상을 입지 않도록 조리 전반에 걸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찜기는 크게 대나무로 만든 재래식과 스테인리스 스틸 바구니형이 있는데, 안전에 초점을 맞춘다면 의외로 전자가 더 낫다. 무엇보다 바구니형은 끓는 물이 끓는 냄비의 내부에 넣는 방식이므로 손이 수증기에 더 잘 노출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야말로 바구니처럼 생겨 바닥이 넓지도 고르지도 않으니 식재료가 수직으로 쌓인다는 점도 좀 못마땅하다. 따라서 공간을 좀 더 차지한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대나무 찜기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여담이지만 모두가 사랑하는 만두도 훨씬 더 잘 찔 수 있다. 바구니형에 겹쳐 담아 쪄 서로 달라 붙은 만두를 떼어내다 피가 찢어지면 마음도 찢어진다).
브로콜리를 쪄서 먹을 때는 스테인리스 스틸바구니(왼쪽)나 대나무 찜기(오른쪽)를 사용하되 수증기가 물로 변해 고이지 않도록 구멍을 내줘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
다만 찜기가 안정적으로 올라 앉을 수 있는 크기와 구조(손잡이가 너무 윗쪽에 달리면 크기가 맞아도 찜기가 자리를 못 잡는다)의 냄비를 갖췄는지 구매 전에 확인해야 한다. 시판 대나무 찜기의 테두리 안쪽 지름이 24㎝이니 냄비는 그보다 1~2㎝ 작아야 한다. 찜기의 바닥에 종이 호일을 깔고 수증기가 물로 변해 고이지 않도록 칼이나 젓가락 끝으로 구멍을 송송 뚫는다. 손질한 브로콜리를 한 켜로 고르게 담고 소금을 솔솔 뿌려 냄비에 올린다. 찜을 위한 물은 펄펄 끓일 필요가 없고 끓을락말락 하면서 김이 올라오는 시점만 유지해준다. 칼끝으로 가지를 찔렀을 때 저항을 느끼면서 날이 들어간다면 익은 것이다. 모든 조리가 그렇지만 찜도 재료가 품고 있는 열로 불에서 내린 뒤에도 익으므로, 아삭함이 중요한 브로콜리라면 ‘좀 덜 익혔나?’ 싶은 시점에서 내리는 것도 요령이다.
찜이 천천히 브로콜리를 익힌다면 데침은 속전속결이다. 끓는 물에 담그면 1분만에도 익으니 역시 과조리를 막기 위해 모든 준비를 미리 마친다. 그래 봐야 브로콜리 손질 외에 물이 담긴 대접과 건질 체 정도를 준비하는 수준이다. 데치기에는 오랫동안 두 가지의 믿음이 함께 딸려 다녔다. 첫 번째는 아주 짠 끓는 물에 데쳐 재료를 익히는 동시에 간도 한다는 믿음이다. 보통의 파스타처럼 10분안팎으로 삶아야 먹을 수 있는 식재료라면 당연히 먹히지만 1,2분 데치는 채소라면 효과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소금을 습관처럼 넣는다고 해도 전혀 상관 없지만 큰 효과를 기대하지는 말자.
두 번째 믿음은 ‘얼음물 충격요법’이다. 모든 채소는 차디찬 얼음물을 준비해 놓았다가 데치자마자 담그면 바로 조리를 멈출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프랑스가 중심인 서양 요리의 세계에서 의식처럼 신봉되어 왔다. 하지만 ‘모더니스트 퀴진(Modernist Cuisine)’등 요리의 세계를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시도를 통해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굳이 차디찬 얼음물은 아니어도 상관없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넓은 샐러드볼 등에 수돗물을 넉넉히 담아 놓고, 브로콜리는 건지기 쉽도록 아예 체에 받친 채로 뜨거운 물에 담근다. 가벼워 물 위로 떠오른다면 국자나 주걱 등으로 가볍게 눌러준다. 타이머로 철저히 시간을 지켜 데친 뒤 받아 놓은 물에 충분히 담가 두었다가 건져 종이행주 등으로 물기를 걷어낸다. 채소 탈수기를 쓸 수 있다면 더 좋다.
마지막으로 오븐구이 또한 고려해볼 수 있다. 손질한 브로콜리를 제과제빵팬에 한 켜로 여유 있게 담아 올리브기름, 소금, 후추, 그리고 캐러멜화를 도와주는 설탕 약간을 뿌려 250℃로 예열한 오븐에 10~15분 굽는다. 오븐구이는 찜이나 데침보다 훨씬 더 부드럽게 익히는 대신 캐러멜화 덕분에 맛과 향이 한층 더 강해진다. 특히 배추의 일가(브라시카 속) 특유의 쌉쌀함이 제법 두드러져 갑자기 쌀쌀해지는 요즘 날씨에 어울리는 맛을 내준다.
마늘, 베이컨 등과 찰떡궁합
손질한 브로콜리를 베이컨과 마늘 등과 함께 볶아 버무리면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
익힌 브로콜리를 갓 삶아낸 파스타에 마늘, 치즈 등과 함께 버무리면 요리의 색감과 풍미가 산다. 게티이미지뱅크 |
찌든 데치든 굽든, 이제 브로콜리가 익었으니 초고추장 너머 맛의 세계를 살펴보자. 브로콜리는 많은 식재료와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데 멀리 나가 열심히 찾을 필요가 없어 가산점을 번다. 우리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마늘과 아주 좋은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만 단맛을 끌어낸 익힌 마늘이 잘 어울리므로 생마늘을 향한 평소의 사랑은 잠깐 접어두기를 권한다. 논스틱 팬에 올리브기름을 자작하게 담아 약한 불에 올리고 강판에 갈거나 곱게 다진 마늘을 올린다. 기름이 차가울 때 마늘을 올려야 타서 쓴맛이 나거나 끈적거리지 않으므로 팬보다 미리 준비한다. 약한불을 유지하며 마늘을 기름에 데친다는 기분으로 뒤적이며 반투명해질 때까지 익힌다. 익혀 놓은 브로콜리에 버무리면 끝인데, 만약 따뜻한 걸 먹고 싶다면 브로콜리를 1분정도 전자레인지에 데우거나 갓 삶아낸 파스타에 다 같이 버무린다.
여기가 출발점이고 이제 맛을 쌓아갈 수 있다. 올리브기름도 맛있지만 동물성지방을 즐긴다면 종류 불문 맛을 북돋워준다고 ’최고의 채소’라는 별명이 붙은 베이컨과 마늘을 함께 볶아 버무려도 좋다. 식물성이든 동물성이든 지방이 느끼하다면 레몬즙으로 균형을 잡아주면 되고 땅콩이나 호두를 더하면 고소함이 확 피어 오른다. 맛있음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고 마무리하지만, 이미 우리 모두가 고기의 곁들이로서 브로콜리가 어떤 채소인지 잘 알고 있다.
간편하게 끓여 먹기 좋은 냉동 브로콜리
익혀 냉동해둔 브로콜리는 쌀쌀한 날에 수프로 활용해도 좋다. 게티이미지뱅크 |
손질과 조리가 내키지 않는 이들을 위해 냉동 브로콜리의 세계가 존재한다. 흔해서 쉽게 살 수 있는데, 품질이 썩 좋지 않은 건 넘어갈 수 있지만 한 덩어리로 냉동해서 파는 제품은 용서가 안 된다. 채소와 브로콜리를 아무리 사랑해도 한 번에 먹기는 어려울 만큼 많을 뿐만 아니라 표면적이 적으므로 해동도 개별냉동 제품보다 훨씬 비효율적이다. 이런 제품은 애써 다진 우리의 ‘채소 열심히 먹기’ 결심을 찰나에 꺾어버리므로 멀리하고, 무엇보다 개별 냉동이 되었는지 구매 전에 반드시 확인하자.
익혀 냉동한 브로콜리는 날것을 사서 직접 데치거나 찌는 것만큼 신선하거나 아삭하지는 않지만, 그 모든 노력을 감안하면 채소 먹기의 의무만을 억지로 이행하는 수준 이상으로는 먹을만하다. 도저히 못마땅함을 가셔내지 못하겠다면 수프를 끓이는 길도 있다. 닭육수에 해동시킨 브로콜리를 더해 한소끔 끓인 뒤 블렌더(도깨비 방망이)로 균일하게 갈고 크림을 더해 한 소끔 더 끓인다. 레스토랑이라면 매끈해지도록 한 번 체로 거르지만 가정에서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거르든 안 거르든 이 계절에 딱 맞는 국물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이용재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