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얼죽아? 얼어 죽진 않으니 걱정 그만
작년 아메리카노 판매량 82%가 '아이스'
차가운 음료라도 신체에 큰 영향은 없어
철분결핍성 빈혈 땐 얼음 과다섭취 설도
불면·위통 유발 카페인 과잉은 유의해야
아이스커피. 게티이미지뱅크 |
서울 광화문에서 일하는 직장인 김재준씨는 오늘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한결같은 출근길 습관이죠.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 줄임말) 한 모금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머리가 급속 동결되는 듯이 찌릿해져요. 그제야 비로소 온몸에 피가 돌고 세포가 깨어나는 느낌이 든답니다.”
재준씨는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이른바 ‘얼죽아’를 자처합니다. 장갑 낀 두 손에 아이스 커피를 든 채 거센 눈발을 헤치며 출근한 적도 많다는군요. 재준씨 얘기에 얼죽아들은 이렇게 맞장구를 칠 겁니다.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 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아아 사 먹지.” 최근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 지수도 소셜미디어에 아이스 커피를 들고 있는 사진을 올렸는데, 기온이 무려 영하 11도였어요.
얼죽아 건강에 무해
한국인의 얼죽아 사랑은 유명합니다. AFP통신은 얼죽아를 한국어 발음 그대로 ‘Eoljuka’라고 소개하면서 “한국의 비공식 국가 음료”라고 촌평하기도 했죠. 날씨가 추워져도 얼죽아 열풍은 식을 줄 모릅니다. 심지어 한 커피 브랜드에선 한파가 몰아친 지난해 12월 16~22일 아이스 아메리카노 전국 판매량이 전년 대비 34% 증가했다고 합니다. 다른 커피 브랜드에서도 지난해 1년간 전국 가맹점에서 아메리카노 1억7,000만 잔이 팔렸는데 그중 82%, 그러니까 약 1억4,000만 잔이 아이스였다는군요.
그런데 문득 궁금증이 샘솟습니다.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고 김치라면도 김치 반찬 없이는 못 먹는 한국인이라지만, 한강도 꽁꽁 어는 강추위에 아이스커피를 입에 달고 살아도 괜찮은 걸까. 겨울만이라도 얼죽아를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혹시 자주 배탈이 나는 건 커피를 차게 마시기 때문인 걸까.
커피는 일단 제외하고 온도부터 따져 보면, ‘아이스’는 신체에 크게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고 합니다. 차가운 액체는 몸에 들어가면 온도가 올라가기 때문이죠. 날씨가 춥다고 사이다나 주스를 데워 마시지 않듯, 커피를 차갑게 즐기는 게 문제가 될 이유는 없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은 카페와 사무실처럼 따뜻한 실내에서 마시기도 하고요. 짧은 시간에 찬 음료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이켰다면 모를까. 얼어 죽을 일은 없으니 괜한 걱정은 내려놓으셔도 되겠습니다.
물론 평소 위장이 약한 분들은 소화불량이나 위장장애를 겪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치게 우려할 일은 아닙니다. 강재헌 강북삼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찬 음료를 먹고 탈이 났던 분들은 경험적으로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안 마시지 않을까요.”
얼죽아가 철분 부족 증상?
전국 대부분 지역이 영하권 날씨를 보인 지난해 11월 24일 서울 용산구 한 거리에서 시민들이 아이스커피를 들고 걸어가고 있다. 뉴시스 |
일각에선 아이스커피를 마시면서 얼음까지 씹어 먹는다면 철분 결핍성 빈혈을 의심해 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차가운 얼음을 씹으면 뇌에 산소를 공급하는 혈류가 증가해 빈혈 환자의 인지 능력이 향상된다는 겁니다. 인간을 포함해 모든 척추동물은 차가운 물속에 오래 있을 경우 심장박동을 늦추고 심장과 뇌 등 꼭 필요한 장기 위주로 혈액을 보내는 ‘잠수반사’를 보이는데요. 그와 비슷한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201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에 따르면 빈혈이 없는 피실험자들(84명)에게선 섭식장애의 일종인 ‘얼음과식증(Pagophagiaㆍ강박적으로 얼음을 과다 섭취하는 증상)’ 발생 비율이 4%에 불과했으나 철분 결핍성 빈혈이 있는 피실험자들(10명)에게선 56%로 매우 높았습니다. 또 빈혈 환자에게 얼음을 씹게 했더니 주의력과 집중력이 개선된 반면, 미지근한 물을 마신 빈혈 환자들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음과식증과 철분 결핍성 빈혈 사이의 연관성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영양 결핍, 스트레스, 불안, 강박장애가 또 다른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하고요. 아직은 ‘가설’인 셈입니다. 어쩌면 사시사철 아이스 커피를 마시는데도 건강한 한국의 수많은 얼죽아들이 이 가설을 반증하는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강재헌 교수도 “임상적으로 연관성을 확인하기 어렵다”고 설명합니다. 여성보다 철분 결핍성 빈혈 환자가 훨씬 적은 남성들도 대다수가 아이스커피를 즐긴다는 겁니다. 강 교수는 “직장인들이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커피까지 즐기기엔 시간이 빠듯한 탓에 사무실에 복귀하는 길에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아이스 커피를 선호하는 게 아닐까”라며 “한국에선 커피가 풍미를 즐기는 기호식품이 아니라 콜라 같은 음료로 인식되는 것 같다”고 해석을 보탭니다.
커피 섭취량은 하루 5잔 미만
얼죽아들이 유의해야 할 건 따로 있습니다. 바로 커피 과다 섭취입니다. 카페인 성분이 불면과 위통, 신경과민, 부정맥, 혈압 상승 등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식품산업통계정보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은 405잔으로 전 세계 평균 152잔보다 2배 이상 많았습니다. “내 몸엔 피 대신 커피가 흐르고 있다”는 직장인들의 푸념이 농담만은 아닌 셈입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카페인 일일 섭취량을 최대 400㎎ 이하로 권고합니다. 커피 브랜드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략 5잔 정도입니다. 이 또한 개인차가 있으니 절대 기준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약간 싱거운 결론일지 모르지만, 차가운 커피든 뜨거운 커피든 각자 자신에게 알맞게 적당히 즐기는 게 유일한 정답이란 얘기죠.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