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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여행은 없어요… 코로나 끝나면 당장 출발!"

이런 2막

“언젠가 생을 마감하는데…” 충만한 삶의 의미 깨닫자

729일간 신발 10켤레 닳도록 49개국 세계일주 여행

실크로드 횡단도 준비 “시니어들 가능성 보여줄 것”

한국일보

세계여행을 다녀온 안정훈씨가 자신이 쓴 책 ‘철부지 시니어 729일간 내 맘대로 지구 한 바퀴’를 들고 웃고 있다. 안씨는 “여생을 여행작가로 살고 싶다”고 했다. 고영권 기자

지하철을 공짜로 탄다는 ‘지공선사(地空禪師)’가 된 3년 전 어느 날, 안정훈(68)씨는 문득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이란 “내가 사형수인데 무기수라고 착각했던 것”이라 했다. 언젠가 생을 마감해야 하는데도, 영원히 살 것처럼 굴면서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보내지 못 했다는 뼈저린 자각이었다.


‘나홀로 세계일주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최근 한국일보와 만난 안씨의 말은 간단 명쾌했다. 그래서 떠났고, 마지막 기회니 지금 돌아가면 다시는 못 나온다는 절박함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은 무려 729일간 계속됐다.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중남미 49개국을 방문했다. 비행기를 28번 탔고, 걸어 다니는 동안 닳아서 버린 신발만 10켤레였다. 아무리 굳은 결심이었다 해도 왜 괴롭지 않았겠는가. 그런 그를 버티게 해준 건 여행 도중 우연히 미얀마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벽에 붙어있던 글귀 하나였다. ‘나는 비록 천천히 걷지만 절대 되돌아 가지 않는다.’(에이브러햄 링컨)


엄청난 대장정이었음에도, 안씨는 준비된 여행객이 아니었다. 그 나이대 어르신들이 다 그렇듯 외국어에 서툴렀고, 모바일 같은 기기에도 어두웠다. 홀로 배낭여행이 과연 될까 싶었지만 “최소 경비와 시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외국어는 ‘눈치’와 ‘보디랭귀지(몸짓)’로 해결했다. 온라인으로 접근 가능한 정보는 현지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얻었다. 안씨는 “남들보다 시간이 더 걸려서 그렇지 갈만한 곳은 모두 다 갈 수 있었다”며 웃었다.

공군 준장으로 살았던 전반전

한국일보

안정훈씨가 네팔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봉우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라온북 제공

안씨 인생의 전반전은 직업군인의 삶이었다. 1976년 공군 소위(학사장교)로 임관한 그는 군 복무 초기 경북 팔공산과 경기 수리산, 강릉 지역 등 부대에서 관제사 업무를 맡았다. 영공을 침범하는 적 전투기를 요격하는 우리 전투기를 돕는 게 임무였다.


7년 차 무렵부턴 주특기를 정훈장교로 바꿨다. 하늘에서 싸우는 공군에서 정훈 장교는 진급에 별로 유리하지 않다는 것쯤이야 주변에서 굳이 일러주지 않아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마음의 소리를 따랐다. 안씨는 “정신교육 교관으로 근무해보니 의외로 적성에도 맞고 보람도 컸다”며 “대학 시절 학보사에서 활동할 정도로 글 쓰기도 좋아했다”고 말했다.


즐기는 자 이길 수 없다 했던가. 안씨는 능력을 인정받아 2004년 ‘별’(준장)을 달았다. 공군 정훈병과에서 장군 진급자가 나온 건 30년 만의 일이었고, 이른바 ‘성골’로 분류되는 공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란 점에서도 화제가 됐다. 안씨는 2006년 전역했다.


‘장군님’ 출신임에도 안씨는 자신의 이력을 굳이 먼저 밝히는 법이 없다. 군인 출신이라 하는 순간, 사람들이 가지는 선입견이 싫었다. 안씨는 “과거는 과거로만 남기고 싶다”며 “계급장을 뗀 지금 더 짜릿하고 즐거운 일을 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여행의 원칙은 ‘무계획’

한국일보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 사막에서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한 안정훈(오른쪽 두번째)씨. 라온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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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의 시작은 우발적이었다. 전역 후 작은 사업을 하던 안씨는 고교 동창들과 중국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배치 문제가 터지면서 여행이 취소됐다. 어렵사리 낸 3주간의 휴가를 어쩔까 하다 혼자라도 다른 곳을 가보기로 했다.


학창시절 영화 ‘닥터 지바고’의 무대인 시베리아를 보고 싶다는 이유로 첫 목적지로 러시아를 택했다. 첫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예약한 숙소를 찾아 헤매느라 꼬박 하루를 보내기도 했지만, 현지인들 도움으로 어찌저찌 여행을 이어갔다.


“나이 먹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하는 회의감이 밀려올 때도 있었지만, 되레 그게 재미있었다. 갖은 고생을 해가며 시베리아 여행을 끝내자 바로 회사 사장직을 내려놨다. 발걸음을 북유럽으로 옮겼다. 그 뒤 아프리카 북부, 중남미, 아시아, 오세아니아를 거쳐 2018년말 한국으로 돌아왔다. 여행 경비는 매달 나오는 연금의 일부로 충당했다. 전체 비용을 정확히 계산해보진 않았지만 “젊은 여행자가 쓰는 경비의 1.5배 정도”가 들었다는 게 그의 추정이다.


가족들이 걱정할 법도 한데 의외로 아내와 두 딸은 한 목소리로 그의 모험을 지지했다. 안씨는 “한국에선 항상 근엄한 표정만 짓던 내가 해외에선 춤 추고 망가지면서 시종일관 웃는 걸 보고 가족들이 더 신나게 응원해줬다”며 “단 한번도 ‘언제 돌아올 거냐’ 묻지도 않더라”며 웃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그가 여행을 하면서 세운 원칙은 ‘무계획’이었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은 무계획”이라는 영화 ‘기생충’의 대사를 몸소 실천한 것이었다. 안씨는 “미리 촘촘하게 일정을 세워버리면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하루하루가 고통스럽다”면서 “계획이 없으니 현지에서 차를 놓쳐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으리으리한 유적지 같은 명소보다는 현지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더 집중했다. 안씨는 “유물을 보는 건 과거를 배우겠다는 의미인데, 그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고 했다.


안씨는 가장 인상적이었던 여행지로 △페루의 오아시스 마을 ‘와카치나’ △브라질ㆍ아르헨티나 국경에 있는 이구아수폭포 △네팔의 히말라야 △쿠바 등을 꼽았다. 힘들었던 곳으로는 “영어조차 안 통하는” 발칸반도 국가들이었다. 안씨는 “여행을 하다 나그네의 쓸쓸함을 느낄 때면 슬픈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감정을 해소하곤 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꿈은 여행 크리에이터”

한국일보

여행을 하며 훨씬 밝아진 안정훈씨를 보고 가족들은 그의 모험을 응원했다. 라온북 제공

세계일주 경험은 안씨의 삶을 바꿔 놓았다. 우선 건강을 되찾았다. 전역 후 사업을 하다 보니 술자리가 잦았다. 비만에 당뇨가 있었다. 안씨는 “여행 중엔 길을 헤매는 게 일상이다 보니 자연스레 많이 걸으면서 몸무게가 15㎏이나 빠졌다”고 말했다. 혈당도 뚝 떨어져 정상 범위로 들어왔다.


여생을 ‘여행 크리에이터’로 살겠노라 결심한 것도 큰 변화다. 자기 경험을 밑천 삼아 홀로 떠나길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해 주겠다는 포부를 세웠다. 실제 그는 2년에 걸친 여행 이야기를 책(‘철부지 시니어 729일간 내 맘대로 지구 한 바퀴’ㆍ라온북)으로 만들어 내놨다.


멋있고 낭만적 풍경을 묘사하는 여느 여행에세이와 달리,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과 소회를 소개하는데 상당량을 할애했다. 안씨는 “은퇴를 준비 중인 40, 50대를 위해 쓴 책”이라며 “기회가 되면 강연도 다니면서 소통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두 번째 도전을 앞두고 있다. 마음 맞는 사람 3명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자동차 횡단’이다. 안씨는 “저까지 4명 나이를 합치면 260살인데, 시니어들도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두 번째 여행 또한 책으로 낼 생각이다. 아쉽게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도 연기된 상태지만, 상황이 나아지면 당장 출발할 태세다.


여행사 패키지 상품 따윈 잊고, 혼자 하는 여행을 강력하게 추천하는 안씨의 외침은 단 하나였다. “나쁜 여행은 없다! 용기를 갖고 떠나라!”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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