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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만든 키스신, 포옹장면에 장안이 들썩였다

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63>

50~60년대 통속물의 대가 한형모 감독


※ 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며 영화보다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에서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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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한형모 감독. '자유부인' 등 통속물의 대가로 평가 받는 그는 촬영감독 이력을 바탕으로 기술력이 빼어난 영화들을 선보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형모(1917~1999) 감독은 예술성을 추구하는 작가주의 감독은 아니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김기영과 유현목, 신상옥과 같은 감독들이 사회를 다루는 정치적인 관점이나 영화의 형식미를 중시한 작가였다면, 그는 ‘예술가가 아닌 비즈네스맨 타잎‘(영화잡지 영화세계 1955년 12월)으로 영화의 오락성에 복무하는 철저한 상업영화 감독이었다.


‘자유부인’(1956)으로 대표되는 그의 영화에는 당대부터 ‘대중에 영합’하는 ‘저속’한 작품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는 비평의 시선을 개의치 않았다. 스스로 대중영화 감독이라 칭했고 선정적인 요소를 부각시키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통속물로 일관했지만 장르의 개척과 기술 혁신으로 영화산업의 대중적 저변을 넓혔고, 이후 찾아올 중흥기의 기반을 다졌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결코 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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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모 감독의 데뷔작 '성벽을 뚫고'의 포스터.

친일영화로 이력 시작 오명도

만주신경미술학교에서 공부한 한 감독은 백화점 간판 그리는 일을 생계 삼았다. 뒷날 ‘순애보’(1957)에서 그림 소품을 손수 그릴 정도로 미술에 재간이 있었던 그는 형의 친구로 ‘수업료’(1940)를 찍던 최인규 감독을 찾아갔고, ‘집 없는 천사’(1941)의 미술감독이 그의 첫 영화 경력이 되었다. 그 후 최 감독의 알선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호영화사에서 실무를 익힌 한 감독은 2년 뒤 촬영 부문의 기능시험에 합격해 합격자에게 주어지는, 영화 한 편은 찍을 분량의 공짜 필름을 들고 돌아온다. 이 무렵 최 감독은 더는 친일영화를 작업하지 않겠다며 영화에서 손을 놓고 있었지만, 한 감독의 설득으로 다시 연출에 복귀한다. 한 감독은 그 밑에서 참전 선동영화인 ‘태양의 아이들’(1944), ‘사랑과 맹서’(1945)의 촬영감독을 맡았다.


해방 이후에도 두 사람의 협업은 계속된다. 최 감독은 ‘자유만세’(1946)와 ‘죄 없는 죄인’(1948)으로 친일 전력을 세탁하며 민족영화 감독으로 변신했고, 한 감독의 카메라가 뒤를 따랐다. 유학파 출신으로 영화 기술에 능통했던 그는 당대에 한국영화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꼽혔고 안진상 감독의 ‘여명’(1948), 윤용규 감독의 ‘마음의 고향’(1949)에서도 촬영감독으로 일하게 된다.


한 감독의 연출 데뷔작은 여수순천반란사건을 배경으로 한 ‘성벽을 뚫고’(1949)였다. 홍개명 감독의 ‘전우’(1949)와 더불어 국책 반공 영화의 효시로 꼽히는 이 영화는 ‘조국을 지키는 청년의 애국심을 그린 일종의 전쟁 영화’(조선일보 1949년 12월 29일자)로 대학 동기동창이자 처남과 매부 지간인 두 사람이 이념의 차이로 갈라져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관객의 흥미를 잡아당긴 건 ‘전반에 나온 남녀 주인공의 러부씬(러브신)’이었다고 한다. ‘성벽을 뚫고’는 ‘종래에 못 보던 기술적인 우수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중략) 선명한 화면과 대담한 캐머러(카메라) 워크 그리고 편집의 묘미와 우수한 녹음’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수많은 관객이 밀어닥쳐 호평을 받았다.’(대한신문 1965년 6월 25일자)


이어서 해군홍보영화를 준비하던 한 감독은 6ㆍ25 전쟁이 터지자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 소속으로 들어가 우방국에 제공할 선전영화를 만들 목적으로 전투 상황을 카메라로 찍게 된다. 난리 통에 국내에는 필름을 현상할 곳이 없어 일본에서 후반작업을 마치고 기자 시사회를 가진 ‘정의의 진격 - 1부’(1951)는 일본 배급업자들의 이목을 끌어 배급권이 팔린다.


기술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있었던 한 감독은 판권료 대신 16㎜ 현상기와 녹음기, 프린트기 등 20만달러어치 영화 기자재를 받아갔다고 한다. 정훈국을 나온 뒤에도 한 감독은 외신특파원 자격으로 전황을 촬영하며 ‘정의의 진격 – 2부’(1952)를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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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유부인'은 파격적인 묘사로 동명 원작 소설과 더불어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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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투성이인 영화 '자유부인' 포스터. 당시 시대상을 보여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자유부인’ 등으로 시대 변화 담아

본격적인 한 감독의 상업영화 행보는 두 번째 극영화 ‘운명의 손’(1954)부터였다. 술집여성으로 위장한 북한 간첩 마가렛이 방첩대 대위와 사랑에 빠지면서 고뇌에 빠진다는, 일면 후대의 ‘쉬리’(1999)까지 연상케 하는 내용의 이 영화는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이 비슷한 시기에 대대적인 관객몰이를 하면서 5만명 가량의 관객이 드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멜로와 활극, 첩보물이 한데 결합된 ‘신형식 영화’, 한국영화사상 첫 장르 퓨전이라는 점에서도 획기적이었고, 남녀 간의 ‘침이 꼴깍 넘어가는’ 키스신을 보여주는 최초의 한국 영화라는 점에서 대서특필되며 화제를 모았다.


극 중 마가렛이 “저를 선생님 손으로 보내주세요”란 말과 함께 키스하는 이 5초 남짓한 장면 때문에 배우 윤인자는 이혼 직전으로 치닫는 부부 생활의 위기를 겪었다. 남편이 영화사 사무실까지 쳐들어와 한 바탕 소동을 벌인 끝에 해당 촬영은 남편의 입회 하에, 입술에 셀로판지를 붙이고 진행되었다고 한다. 중년 부인들은 키스를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해 하며 문제의 장면을 보고자 극장을 찾았고, ‘앞으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연남녀배우들의 키스장면이 빈번해질 것이 기대된다’(한국일보 1954년 12월 26일자)는 언론 기사처럼 이후의 한국영화에서는 키스신의 출현 비중이 늘어나게 된다.


소설가 정비석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자유부인’(1956)으로 한 감독은 경력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전후 한국사회에 불어 닥친 ‘계 바람’, ‘땐스 바람’의 도시풍속도를 그렸던 소설이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던 것처럼, 영화 또한 정숙해야 할 대학 교수의 부인이 자유연애에 눈을 뜨고 젊은 남성과 바람이 난다는 내용과 애정 표현의 수위로 다시 한 번 논란에 불을 당겼다.


특히 주인공 오선영과 대학생의 키스 장면, 한 사장과의 포옹 장면이 문교부 검열에서 문제가 되었다. 3주간이나 개봉이 지연되었고 장면 네 개를 잘라내고 나서야 상영허가를 받고 극장에 걸 수 있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수도극장에 걸린 ‘자유부인’은 10만8,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대박을 터뜨리며 그 해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한다. “무든지 최고급품으로 주십시오, 최고급입니까?”라는 대사의 ‘최고급’ 운운은 세간의 유행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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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모 감독의 영화 '사랑하는 까닭에'. 한국일보 자료사진

트래킹 숏 최초 사용

‘자유부인’은 한국 영화에서 제대로 된 트래킹 숏(레일 위에 카메라가 움직이며 찍는 장면)과 크레인 숏을 사용한 최초의 영화이기도 했다. 한형모는 카메라 수리를 위해 청계천을 드나들다 안면을 트게 된 기술자를 제작사 삼성영화사의 동업자로 끌어들였다. 필요한 이동차와 레일 이동대, 크레인의 도면을 그려 기술자에게 주었는데, 미군 부대에서 불하받은 헬리콥터 바퀴를 부품으로 조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 일주일 만에 촬영 보조 도구들을 완성했다고 한다. 덕분에 외출하는 장면에서 오선영이 느끼는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역동적인 이동촬영으로 표현해낼 수 있었다.


뒤쳐져있었던 한국 영화기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가난한 애인들’(1959)을 작업할 때 독일 광학회사와 제휴해 한국형 시네마스코프 ‘북삼 스코프’를 개발하고, 1965년 35㎜ 필름을 가로로 자르는 이탈리아식 테크노스코프와 달리 세로로 나누는 한국식 테크노스코프를 개발하는 것까지 이어진다.


이후 한 감독은 ‘상업작가로는 제 일인자의 위치에 놓일 사람’(경향신문, 1957년 12월 29일자)으로 우뚝 섰다. ‘자유부인’으로 현대극을 개척한 그는 ‘청춘 쌍곡선’(1956)으로 한국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을 확립했고, 김래성 작가의 탐정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마인’(1957)으로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스릴러를 개척했다. ‘워커힐에서 만납시다’(1966), 가수 이미자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극화한 마지막 영화 ‘엘레지의 여왕’(1967)에서는 음악영화에까지 도전하는 등 다방면에서 한국 영화 장르의 저변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쉬지 않고 이어나갔다.


1950년대는 한국 근현대사의 전환점이었다.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는 가운데, 자유연애의 풍조를 비롯한 서구적 가치관과 문물이 미국을 통해 들어오면서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그러한 시대의 흐름을 한 감독은 민감하게 읽고 반응했다. ‘자유부인’의 여자 교수, ‘순애보’의 스튜어디스, ‘남성 대 여성’(1959)의 여자 의사, ‘여사장’(1959)의 출판사 사장 등 도회적인 배경 속에서 자유분방하고 욕망에 충실한 여성상을 즐겨 다루었던 그의 영화들은 한국사회의 모더니티를 장르 속에 반영해나가는 작업이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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