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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민정 “집 팔아 전지훈련… 피겨하는 동안 엄마는 아플 수도 없었다”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39>전 피겨 국가대표 곽민정


“피겨 선수로 뛰고 해설위원도 해봤으니

코치ㆍ심판으로도 올림픽에 서는 게 꿈”

한국일보

전 여자 피겨 국가대표 선수인 곽민정 코치를 6일 경기 안양종합운동장 빙상장에서 만났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총점 147.95’

점수가 발표되고 동메달이 확정되자, ‘키스 앤드 크라이존(kiss and cry zone)’의 선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꺼억, 꺼억’ 우는 소리가 중계 카메라에도 잡혔다. 우리나라 피겨 여자 싱글 역사상 첫 아시안게임 메달이었다. 2011년 2월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에서 이 역사를 쓴 건 나이 열일곱의 소녀 곽민정. 그보다 1년 전 김연아 선수와 함께 밴쿠버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유일한 후배였다(김연아는 아시안게임에 출전하지 않았다).


경기 전에도 그는 그만 울고 말았다. 쇼트 프로그램에서 3위를 기록한 성적을 프리에서도 지킬 수 있을지 중압감이 그를 짓누른 것이다. 그러나 빙판에서 이름이 호명되고 라흐마니노프의 ‘카프리스 보헤미안’이 흐르자, 그의 몸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움직였다. 트리플 러츠-더블 토-더블 룹의 3연속 콤비네이션 점프로 시작해, 일곱 번째 점프인 더블 악셀-더블 토 콤비네이션까지 큰 실수 없이 연기를 마쳤다. “메달에 대한 갈망이 너무나 컸어요. 그게 병적으로 다가와서 시합 전에 울고 만 거죠. 하지만 준비를 워낙 많이 했었기 때문에 경기 때는 몸이 알아서 움직였어요.”


자신을 만든 타이틀을 목에 걸기까지, 그도 처음부터 클린(실수 없는 연기)을 한 건 아니었다. 한 때는 ‘연습용 선수’라는 조롱 섞인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연습할 때는 기술이 뛰어나서 다들 제가 1등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경기 때는 넘어져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어요. 멘탈(정신력)이 약했죠.” 그래서 그는 연습 때도 실제 경기 의상을 입고, 경기 상황을 가정해 임했다. 몸이 멘탈을 이기도록 훈련한 거다.


선수 생활 최고의 전성기였던 2011년 시즌을 마친 그에게 세상은 당연하게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출전을 기대했다. 그런데 그는 빙판에서 시나브로 사라져갔다. 뒤늦게 은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학에 들어가서야 찾아온 체형 변화가 그를 옥죄었던 거다. 식단 관리도, 훈련도 예전과 똑같았는데, 몸은 크게 달라졌다. 거기다 발목 인대가 끊어져 1년을 쉬어야 했다. “하루 하루가 지옥이었다”고 그는 돌이켰다.


그렇게 부상으로 빙판을 떠나야 하나. 아니었다. 그렇게 시시하게 은퇴할 수는 없었다. 재활 치료 후 그는 다시 빙판에 섰다. 물론 예전의 실력과는 천지 차이였다. 그래도 그는 뛰었다. 그런 뒤 2014년 국내 피겨 랭킹대회를 끝으로 은퇴를 결정했다. “그래서 선수 생활에 후회는 있어도 미련은 없어요.” 빙판에 예의를 지킨 거다.


은퇴 후 그는 피겨 해설위원(KBS)으로, 그리고 꿈나무들을 키우는 코치로 살고 있다. 앞으로는 코치와 국제심판으로 올림픽 무대에 서는 게 목표다. 6일 경기 안양종합경기장 빙상장에서 곽민정(25) 코치를 만났다.

8세에 스케이트 처음 신어 5년 뒤 국가대표

한국일보

올림픽에도, 아시안게임에도 나가고 은퇴한 뒤엔 해설위원과 코치로 인생 2막을 살고 있는데 그는 아직 스물다섯 밖에 되지 않았다. 서재훈 기자

-요즘은 하루 일과가 어때요?


“새벽 6시에는 일어나요. 아침 일찍 선수반 수업이 있거든요. 그 다음엔 방학특강으로 하는 학생들 초보자 수업이 있고요.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쉰 뒤에 밤에 또 선수반 수업이 있죠. 밤 11시쯤 끝나요. 주말에도 수업이 있으니까 일주일 내내 스케이트를 신지 않는 날이 없어요.”


-선수 시절부터 그런 생활을 했겠지요.


“그때는 좀더 빡빡했죠. 스케이트 타고, 지상훈련하고, 병원 가고, 트레이닝하고, 점프 훈련하고.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어요. 지금은 휴식 시간이라도 있는데 그때는 없었죠. (미소)”


-언제 처음 스케이트를 신었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우연히 타게 됐죠. 제가 오늘 오전에 했던 그 수업 같은 방학특강을 들었거든요. 엄마가 ‘방학 때 피겨나 한 번 해볼래? 재미있지 않을까’ 해서 과천빙상장에 간 거죠. 그러니까 저는 좀 늦게 시작한 편이에요. 보통 잘 타는 선수들은 예닐곱 살에 (스케이트를) 신거든요.”


-그때 느낌 기억 나나요?


“느낌은 잘 생각나지 않는데, 남들보다 잘 탔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서 당시 코치 선생님한테 스카우트 된 거죠. 하하. 개인 레슨 받아보지 않겠느냐고 하셨어요. 그때는 정말 걸음마 수준이었으니까 쉬웠고 잘했으니까 재미있기도 했죠.”


-힘들지는 않았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동계전국체전에 나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피겨에 ‘올인’한 상태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 첫 출전에서 4등을 했죠. 올인하면 메달을 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5학년 때부터는 아예 훈련 패턴을 바꿨죠. 학교는 사이사이 잠깐씩 가고 하루에 8, 9시간씩 스케이트를 탔어요.”


그는 이듬해 전국체전에서는 1위를 했다.


-재미도 있었나요?


“올인하고 나서는 재미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졌죠. 대신 성취감 같은 게 있었죠. 내가 목표한 걸 해내는 데서 오는 성취감.”


-재능이 있다는 걸 느꼈나요?


“시작은 재능으로 했지만 곧 한계에 부닥쳤어요. 어느 정도 기술을 배우고 단계가 올라가니까 재능으로 타는 건 끝나더라고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 같은 선수는) 그냥 없어지겠더라고요. 중학교 1, 2학년 때 트리플 점프를 (할 수 있는 실력을) 만들었는데 이런 고난도 기술은 너무 어려워서 재능만 갖고는 못해요. 노력이 반드시 동반돼야 하죠. 국가대표에 선발될 때쯤 연습량을 엄청나게 늘렸어요. 눈 떠서 밤 12시에 눈 감을 때까지 모두 피겨에 관한 스케줄만 있었죠.”


-피겨는 연기를 하니 일반 스포츠보다 더 복합적인 능력을 요구하죠.


“다른 종목 선수들에게 미안한데, 어릴 때부터 제가 엄마한테 했던 말이 있어요. 많은 종목 중에 피겨가 가장 힘들고 피겨 선수 중에 내가 제일 힘들다고. 하하. 피겨는 잘해야 하는 게 너무 많거든요.”


-어머니가 선수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셨겠죠.


“엄마는 제 선수 생활 동안 분신처럼 저와 함께 다녔기 때문에 저보다 저를 더 잘 아는 분이죠. 피겨는 특히 엄마의 손이 많이 가는 종목이에요. 어릴 때부터 새벽에 링크장에 태워가고, 병원에 데리고 가고 하니까요. 연습할 때도 코치보다 엄마가 더 선수들을 잘 알아요. 코치는 한 명만 가르치는 게 아니니 시선이 분산되는데 엄마는 나만 보잖아요. 어디가 아픈지부터 기술도 엄마가 잘 알게 되죠. 어릴 때는 늘 엄마와 함께 있는 게 숨막히기도 했는데 그랬으니 관리가 됐다고 생각해요.”


-어머니는 원래 어떤 일을 하셨나요?


“주부셨어요. 그런데 제가 피겨를 시작하면서 완전히 저와 함께 다니신 거죠. 그러니 아빠와 동생이 많이 힘들었죠. 저와 두 살 차이인 동생은 한참 엄마 손길을 한참 받아야 할 나이에도 그러지 못했으니, 대신 아빠가 역할을 많이 하셨어요. 제대로 신경 써주지 못했는데도 동생은 서울대에 갔으니 진짜 (재능을) 타고난 건 동생이에요. 하하. 피겨는 선수 한 명을 키우려면 가정의 희생이 정말 많이 필요한 종목이죠.”


-엄마가 엄한 편이었나요?


“저한테는요. 하하. 예를 들어 훈련을 대충한 날에는 엄마랑 나머지 공부를 하는 거죠. 다 가고 불이 꺼져도 새벽 2, 3시까지 엄마와 훈련을 하곤 했어요.”


-중1 때 국가대표가 됐죠?


“맞아요. 그래서 중학교 3년 간을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 만큼 운동을 했어요. 휴식이라고는 차로 이동하는 시간뿐이었는데 그때도 (김)연아 언니 경기 영상보고 그랬으니까요.”


-그건 잘 하고 싶어서 열심히 한 건데, 이유가 뭐였나요?


“혹독하게 열심히 훈련하는 게 너무 당연한 시절이었어요. 요즘하고도 좀 다르죠. 오늘도, 내일도 그저 이겨내야 했어요. 1등을 해야만 했죠. 왜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 저조차도 모를 정도로.”


-중학교 때 주니어 그랑프리 대회 같은 국제 대회도 나갔는데 어땠나요?


“너~무 다르죠! 세계의 벽을 느꼈죠. 그 대회가 세계 모든 선수가 나온 대회도 아닌데 말이에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어요.”

‘연습용 선수’ 놀림에 반박도 못했다

한국일보

선수 시절의 곽민정 코치. 2010년 7월 김연아 선수(왼쪽)와 함께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해 인사하고 있다(왼쪽 사진). 같은 해 1월 전북 전주에서 열린 4대륙 선수권에 출전해 프리 스케이팅을 하는 곽 코치. 연합뉴스

다른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피겨야말로 자신이 가장 무서운 종목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특히 이틀 간격으로 치러지는 쇼트와 프리 경기 사이의 정신 무장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질 것 같지가 않다. 쇼트에서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프리의 부담은 매번 크니까 말이다.


-쇼트와 프리 사이의 마인드 컨트롤은 어떻게 했나요?


“심리전이죠. 멘탈 싸움이에요. 쇼트를 클린해도 프리를 다 말아먹는(망치는) 경우도 있고, 쇼트를 못해서 시합을 다 포기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비우고 프리에 출전했더니 클린해서 역전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런데 저는 마인드 컨트롤을 잘 못했어요. 연습 때 기술이 뛰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이번에 민정이가 1등이네’ 해도 시합 때는 다 넘어지고요. 연습 때만 잘한다고 연습용 선수라는 별명도 있었어요.”


-연습용 선수라는 얘기를 듣고 어땠나요.


“인정했어요. 제가 봐도 제가 답답했으니까. 그래서 연습을 시합 같은 환경에서 했죠. 결정적인 때 그렇게 연습한 실력이 발휘됐어요. 고1 때 밴쿠버 올림픽 선발전에서요. 시니어가 되고 첫 대회였어요. 주니어보다 시니어 무대가 더 중요한데 그 때 극복해서 나간 거죠.”


-극복했다고 느꼈나요?


“올림픽에 나가겠다는 생각으로 임한 게 아니라 ‘연습용 선수’라는 한계를 극복하는 게 목표였거든요. 피겨랭킹대회를 겸해서 열린 대회라 1등하면 올림픽에 나간다는 걸 처음엔 몰랐어요. 올림픽은 관심사가 아니었고 그저 클린을 해보자고 마음 먹은 거죠. 그런데 그때 처음으로 다리가 후들거리지도 않았고 자신 있게 탔어요.”


-쇼트와 프리 모두 클린했나요?


“네, 그 전까지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죠. 어려운 기술을 가지고 나갔는데 처음으로 클린을 한 거예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훈련을 한 결과죠.”


-밴쿠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훈련 강도는 더 높아졌겠죠.


“그렇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체계적으로 준비했어요.”


-올림픽 무대에서 긴장되지 않았나요?


“시합의 규모와 긴장감이 연관 있는 게 아니라 얼마나 준비되어 있느냐가 중요하더라고요. 올림픽도, 그 전에 나간 4대륙 선수권대회도 철저하게 준비가 돼있었기 때문에 긴장을 하지 않았어요. 올림픽에서도 등수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죠. 올림픽에 나간 것만으로도 모든 걸 이뤘다고 생각했거든요. 쇼트에서 24위 안에 들지 못해서 프리를 뛰지 못하게 되더라도 상관 없었죠.”


그런데 그는 쇼트에서 16위를 했고, 프리에서는 등수를 더 올려 최종 13위의 성적을 거뒀다. 당시 김연아 선수가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우리에겐 또 하나의 장한 선수가 있었다.


“‘언제 내가 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할 수 있을까. 그간 내가 노력한 걸 하늘이 알아줘서 여기까지 왔으니 연습한 건 다 보여주자. 이건 내 무대다.’ 그런 생각을 했죠. 올림픽 프리 경기에서 처음으로 시합을 즐겼어요. 신나게 탔죠.”


그는 프리 경기에서 초반 3연속 컴비네이션으로 계획했던 점프를 트리플 러츠로 처리한 것을 제외하면 클린 연기를 했다.


-프리 경기를 끝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어요?


“그때가 고1이었거든요. 저는 중3까지 시합에 나갈 때마다 ‘나는 왜 이럴까’ 싶었어요. 나는 뭐가 모자라나 보다 하는 자책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고1이 돼서 나간 시니어 시즌에 모든 시합을 다 잘하면서 처음으로 ‘나 잘했다’ 하는 걸 느껴봤어요.”


-밴쿠버 올림픽 때 경기 영상을 다시 보면 어떤가요.


“당시에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그때보다 눈도 성장했고, 피겨 선수들의 전반적인 수준도 많이 올랐기 때문에 한참 부족한 게 많이 보이죠. (웃음) 하지만 제가 그만큼 탄 게 다행이다 싶어요. 요즘 학생들은 코치가 예전에 얼마나 잘 탔는지도 찾아보더라고요. 하하.”


◇체형 변화에 부상까지, 그런데도 복귀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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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11년 동계 아시안게임 피겨 역사상 최초의 메달을 땄다는 타이틀을 제일 소중하게 여긴다. 그는 그 기록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재훈 기자

-밴쿠버 올림픽(2010) 이후에는 어땠어요?


“2012년까지 제가 생각하기에 전성기였어요. 특히 저한테는 2011년 아시안게임 시즌이 그래요. 더 노련해지고, 더 많이 다듬어졌죠. 그런 모습으로 아시안게임에 나가서 메달을 따서 소중해요. 당시 아시안게임 최초로 피겨에서 메달을 딴 거였죠. 제게는 가장 큰 타이틀이에요. 그런데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힘들어지기 시작했죠.”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아시안게임 때 그의 경기를 보면 1년 전 밴쿠버 올림픽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점프에 더욱 힘이 생겼고, 동작에도 안정감이 더해졌다. 그러나 2013년부터 그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여자 피겨 선수가 피해갈 수 없는 2차 성징에 따른 몸매 변화 때문이다. 그에게는 대학에 들어가서야 찾아왔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체형 변화 때문에 누구나 다 힘든 시기를 겪는다고 들었어요.


“너무 힘들어요. 사실 그것 때문에 다 망하는 거예요. 답이 없죠. 선수들마다 타고난 것도, 체질도 다르니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정답도 없고요.”


-몸이 바뀌는 게 느껴지나요?


“저는 밴쿠버 올림픽 때 고1이었지만 몸을 보면 완전히 초등생 같았죠. 몸무게가 38㎏였어요. 아시안게임 때는 올림픽보다 좀더 여성스러워서 같은 동작도 더 아름다워보였죠. 그런데 저는 대학교 들어가서 몸이 확 바뀌었어요. 남들보다 늦게까지 어린 몸을 가졌다가 급격하게 변하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요. 키가 10㎝ 크고 몸무게도 10㎏ 늘었죠. 운동을 안 한 것도 아닌데 살이 찌고 몸이 변하니까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요.”


-대학 재학 중 경기를 보면 확실히 느껴져요.


“정말 힘들었어요. 운동을 포기한 것도, 많이 먹은 것도 아닌데, 답도 없이 몸이 변했죠. 점프를 뛰어도 전과 똑같이 하는데 덜 올라가요.”


-은퇴는 왜 한 건가요?


“자잘한 부상이 겹치면서 더 이상 기술이 회복되지 않는 걸 느꼈어요. 그 시기에 지상훈련을 하다가 발목 인대도 다쳐서 운동을 쉬어야 하는 일도 있었죠. 선수 생활 하는 동안 그 시기가 가장 힘들었어요. 지옥이었죠. 그렇다고 그만 둘 수도 없었어요. 올림픽에도 나갔고, 아시안게임에서 메달도 땄는데, 다들 다음 올림픽 준비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만둔다고? 그것도 부상 당해서 쉬다가? 그러면 너무 허무하잖아요. 제가 대충 탔던 선수도 아니었는데.”


-그 시기를 극복했나요?


“제 딴에는 극복했어요. (부상 이후에) 다시 전성기를 누리지 못해서 극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아니에요. 끝까지 스케이트를 놓지 않았고 노력했고 복귀했거든요.”


-다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군요.


“네, 부상으로 1년을 쉬고 다시 대회에 나갔어요. 정말 성에 차지 않는 기술을 갖고 나갔지만, 그때는 점수나 등수에 상관 없이 ‘제 은퇴 무대니까 봐주세요’하는 심정이었죠.”


2014년 12월 국내 피겨랭킹대회였다. 피겨 팬뿐 아니라 자신에게 보이는 무대였을 테다.


“저한테는 부상으로 잠정 은퇴하는 건 용납되지가 않았어요. 넘어지고 구르더라도 얼음판에서 시합을 마무리 하고 은퇴를 해야지, 발목 부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만 두는 건 그간 쌓아온 명예와 선수 생활을 다 물거품으로 만드는 거잖아요.”


-그렇게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나요?


“그만큼을 더 했기 때문에 다시는 못하겠다고 할 수 있었죠. 부상으로 은퇴했다면 미련이 남았을 거예요. 후회는 남지만 미련은 없어요.”


-어떤 게 후회되나요?


“예를 들면, 그때 발목 부상을 지상훈련하다 계단에서 넘어져서 당한 건데 ‘좀 정신 차릴걸’ 후회하는 거죠. 하지만 제 노력에 미련은 없어요.”


-피겨에서 가장 어려운 기술은 역시 점프겠죠?


“그렇죠. 점프가 어려운 이유는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이에요. 기술을 하나 완성했다고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매일 타도 매일 달라요. 한번 만들어놓은 기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하루 이틀만 쉬어도 돌아가던 게 안 돌아가거든요.”


◇어린 민정의 각오 ‘연아 언니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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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게임 선수단이 인천국제공항으로 귀국하며 환영 인파와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곽민정 코치(왼쪽 세번째)는 당시 한국 피겨 역사상 아시안게임 최초 메달을 땄다. 맨 앞에 섰던 그는 “다른 선수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연합뉴스

-김연아 선수는 언제 처음 알았어요?


“제가 처음 과천빙상장에서 반 바퀴 점프 연습하고 있을 때 연아 언니는 트리플 점프를 뛰었죠. 하하. 연아 언니가 유명해지기 전이었어요. 아이들이 ‘저 언니가 진짜 잘 탄대’ 해서 ‘피겨 잘 타는 언니’로 알고 있었죠. 연아 언니는 그때 이미 쳐다볼 수도 없던 위치였어요. 제가 진짜 재미있는 영상 보여드릴까요?”


그는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영상("연아 언니처럼" 동영상 보기)을 하나 찾아서 내밀었다. 당시 코치가 꼬맹이였던 그를 인터뷰한 거였다. “오늘 얼만큼 잘 탈 거야?”라고 물으니 어린 그는 해맑은 표정으로 “연아 언니만큼~”이라고 답한다. 그러니 코치가 웃으면서 “꿈 깨, 꿈 깨!” 한다.


“정말 웃기죠? 그런데 여기 보세요. 제 뒤로 지나가는 선수가 연아 언니예요! 진짜 신기하죠? 저 때부터 (밴쿠버 올림픽에 함께 나갈) 운명이었나.”


-김연아 선수는 어떤 존재인가요?


“언니가 없었다면 이만큼 못했을 거예요. 언니가 하는 걸 보고 ‘저게 가능하구나’, ‘나도 트리플 점프를 뛸 수 있겠구나’, ‘언니 덕분에 올림픽도 (출전권을 따서) 나갈 수 있구나’ 했으니까요. 언니가 해주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그럼 나도 이만큼은 해보자 마음 먹었죠.”


-피겨는 돈도 많이 들죠.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알고는 못해요. 모르고 시작했으니 되는 대로 한 거죠. 엄마, 아빠가 정말 힘들었어요.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아빠 월급이 얼마인 지 알았을 때, 나를 전지 훈련 보내려고 집을 파는 걸 봤을 때 정말 놀랐죠. 엄마, 아빠는 돈도 모으지 못하고 저한테 다 쏟아 부은 거예요.”


-경제적인 의미를 떠나서 그런 부모의 노력에 보답이 됐을까요?


“보답 전혀 못했죠. 그건 죽을 때까지도 못해요. 다만, 제가 올림픽에 나가서 잘 한 것,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딴 게 엄마한테는 조금이라도 위안이 됐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도자의 길은 은퇴 전에 계획해 둔 건가요?


“제 마지막 코치가 지현정 선생님이었는데 선수 때도 선생님이 ‘한번 볼래’해서 후배들을 봐주곤 했어요. 그런데 은퇴하고 바로 다음날부터 자연스럽게 서브 코치로 데뷔한 거죠. 하하. 그래서 단 하루도 쉬지 못했어요.”


-선수 때와 코치일 때 차이는 뭔가요?


“저는 (선수 시절에) 잘 탔으면 잘 가르치는 거고 못 탔으면 못 가르치는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별개더라고요. 오히려 재능이 많고 엄청 잘 탔던 선수들이 코칭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연구를 해서 가르쳐야 하는데 왜 그 기술이 안 되는지 이해를 못하는 거죠.”


-선수 시절에는 재미와 거리가 멀었다고 했는데, 가르치는 건 어떤가요?


“내가 타는 것 보다 더 힘들어요. 인내심과 끈기가 선수 때보다 더 많이 필요해요. 하지만 가르친 선수가 성공했을 때는 성취감이 엄청나죠. 대화도 많이 해요. 경험이 많으니 해줄 얘기가 많더라고요. 다 제가 겪어온 길이잖아요.”


-어떤 조언을 주로 해주나요?


“제가 신조처럼 여기는 말이 있어요. 안될 수 없게 만들라는 거예요. 선수들이 시합 전에 잘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면 저는 이렇게 말해요. ‘불안해 할 필요 없어. 어떻게 준비했는지 네가 잘 알잖아.’ 준비가 안돼 있다면 ‘그러니 잘 못할 수 도 있다, 그러니 다음 시합을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고 해주죠. 준비가 잘 돼있다면 몸이 알아서 할 것이니 그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고요. 준비가 잘 안돼있는데도 잘했다면? 그건 하늘이 한번 기회를 준 것이니 다음 번에도 그런 행운을 바라지 말라고 해주죠.”


생각해보니 위안이 되는 말이다.

‘나는 지금 가장 빛난다’

한국일보

때로는 근성이 상대에게 날카롭게 표현되기도 하는 법.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코치가 “나중에 너 같은 제자를 꼭 만나보라”고 농반진반 말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지금 딱 그렇게 됐다”며 웃었다. 서재훈 기자

-인생의 전성기가 언제라고 생각하나요?


“선수 생활 중에선 2011년이죠.”


-인생을 통틀어서는요?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피겨 해설할 때도 저는 그런 기분이었어요. 피겨 선수들은 대개 은퇴할 때가 이십 대 초ㆍ중반이라서 막막하거든요. 일반인으로 치면, 사회에 발을 내디딜 준비를 할 때인데 말이죠. 그런데 저는 운이 좋게 제2의 인생을 피겨 해설위원과 코치로 시작하게 됐잖아요. 피겨로 인생의 두 번째 경험을 하고 있는 거죠.”


-앞으로 계획은 뭔가요?


“이제 메인 코치를 한 지 1년, 피겨 해설을 한 지는 2년 반쯤 됐어요. 스물다섯 살에 인생의 2막을 시작했다고 하니 좀 웃기기도 하네요. 앞으로 국제 심판도 하고 싶어서 준비를 어떻게 하는지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에요. 선수 때는 잘 타는 것, 그거 하나면 됐는데 지금은 잘 하고 싶은 게 많죠.”


-국제심판은 왜 하고 싶은가요?


“피겨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고 싶어요. 그걸 올림픽으로 이루는 게 목표예요. 선수와 해설위원으로 올림픽을 경험해봤잖아요. 그러니 앞으로 제가 가르친 선수를 출전 시키고, 국제 심판으로도 올림픽에 서고 싶어요.”


-은퇴 이후 피겨 말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잖아요. 연예계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을 법도 하고요.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제가 피겨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하고요. 피겨 말고는 해본 게 없으니까요. 피겨를 뺀 뭔가를 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해온 삶의 원칙이 있다면 뭔가요?


“제가 평범하게 살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대부분 경험한 걸 해보지 못한 것도 많고요. 사회에 나와보니 솔깃한 자극이나 제안도 더러 있더라고요. 그러니 선택을 해야 할 때도 많죠. 그런데 저는 선택에서 실패하지 않는 방법을 알았어요.”


-그게 뭔가요?


“내가 내 엄마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거예요. 이 시점에 엄마였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눈을 감고 스스로 물어봐요.”


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뜨끈해졌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존재,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존재, 그건 엄마니까.


“엄마한테 표현도 제대로 못하고 되레 못되게 하는데 제 모든 것에 엄마가 녹아 있죠. 그러니 내가 내 엄마라고 생각하고 선택하면 그게 재미는 없는 결정일지 몰라도 실패하지는 않더라고요.”


-어머니와 늘 함께 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 같아요.


“경기할 때도 빙판에 서면 (관중석에서) 언젠가부터 엄마는 꼭 보였어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어떻게 찾겠어요? 그런데 엄마만 꼭 눈에 띄어요. 기분이 묘하죠. 그러면 연습할 때처럼 경기를 할 수 있어요. 훈련할 때 엄마가 안보는 순간이 없었으니까. 은퇴 하고 나서 엄마가 가볍게 아픈 적이 있었는데 제가 정말 당황했어요. 엄마는 원더우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동안 엄마가 나 때문에 아프지도 못했구나 싶었죠.”


시종 밝은 표정으로 또랑또랑 말하는 그에게서는 밝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서 행복하냐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는 바로 답했다.


“네! 26년 살면서 저는 지금이 제일 행복해요. 사소한 행복들을 찾으면서. 어른들이 ‘지금이 제일 좋을 때인데 그걸 모르지’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지금이 제 인생에서 제일 빛이 나는 시간이라는 걸 너무 잘 알거든요.”


행복한 때 행복한 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그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걸 안다. 그러니 그의 인생은 매순간이 전성기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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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전히 빙판 위에 새로운 꿈을 그린다. 서재훈 기자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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