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국 “말글로 존재 드러내야 성장… 여러분, 관종이 되세요”
190쇄 ‘대통령의 글쓰기’ 작가 강원국
‘남의 눈치 안보는’ 내 삶의 주인된 지 이제 4년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을 빼고 강원국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이제 누군가를 위해 대신 읽고 쓰는 이가 아닌 ‘작가 강원국’으로서, 자신의 말과 글로 승부하는 중이다. 류효진 기자 |
‘작가 강원국’
그의 명함은 단출하다. 가볍지 않은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그 다섯 글자를 새겨 넣었다. 4년 만에 무려 24만 부가 팔린 책(‘대통령의 글쓰기’)의 저자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정체성을 찾기까지 그도 숱한 인생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골목과 터널을 넘고 돌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지낸 재벌 총수(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와 민주화와 남북평화 시대를 연 두 대통령들(김대중ㆍ노무현)의 ‘말글’을 썼으니 꽃길 끝에 얻은 열매 아니냐고 생각할는지 모르겠다. 인생은 그래서 의뭉스러운 거다. 그 모두, 자신이 원해서 간 길은 아니었으니.
작가를 소망한 적도 없었다. 그의 장래희망은 진작에 거세 당했다. 질풍노도를 가로 지르는 나이였던 40년 전 열 여섯의 나이에, 고교 진학이라는 인생의 첫 관문 앞에서. 고교 입학 시험이 살아있던 시절 고향의 명문 전주고 진학에 실패한 것이다. 200점 만점에 193점을 맞고도 낙방할 만큼 치열한 입시였다. “윈스턴 처칠도 육사를 세 번 떨어졌단다.” 그의 부친이 위로했다.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아버지 표정은 마치 하늘이 무너진 듯했죠.” 텔레비전에서는 마침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가 흘러 나왔다.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 지면 서러움이 더해요~” 기가 막힌 배경음악이었다. ‘농업에서 3개씩이나 틀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직도 실수를 정확하게 기억한다. 이 일로 그의 머릿속에는 ‘다시는 2류는 되지 말자’는 오기만이 남았다.
그렇게 진학한 학교는 ‘3ㆍ13 만세운동’의 결기를 지닌 전주 신흥고다. 그는 학교의 역사에 한 줄을 더 보탰다. 광주민주항쟁의 피로 물든 80년 5월, 학내 시위의 선봉에 서서 “전두환은 물러가라”를 외쳤다. 광주ㆍ전남 지역을 제외하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고교생들이 일어선 ‘5ㆍ27 항거’다. 이 덕분에 1년을 서울의 외삼촌댁에 몸을 피해 살았다. 부친을 한번 더 실망시킨 것일까. 아니었다. 시위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학교 건너 전주천에서 아들을 기다렸다. 그리곤 계엄군 틈을 빠져 나온 아들에게 돈가스를 먹인 뒤 서울행 고속버스에 태웠다. “잘했다, 어떻다 말씀은 없으셨지만 알 수 있었어요. 눈빛으로. 엄청 대견스러워 하셨죠.” 그의 부친은 깨어있는 정치ㆍ경제 교사였다.
그래도 무사히 복학했고, 결국 ‘일류’ 대학에 들어갔다. 이후 25년 간을 ‘주어진 대로’, ‘시키는 대로’ 살았다. “눈치 보는 삶이었죠. 내가 주인이 아닌 삶. 누군가의 말귀를 알아 듣고, 그 사람의 생각을 읽으면서 산 거죠.”
2014년 첫 책을 내면서 그는 비로소 ‘강원국’으로 살고 있다. 그가 요즘 자신의 나이를 ‘네 살’이라고 하는 이유다. “내가 주인으로 살려면, 이 한마디를 할 수 있어야 해요. ‘나 그거 하기 싫어요.’”
지금이 살면서 가장 재미있고, 떨린다는 ‘작가 강원국’. 그럼에도 그는 “아직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고 자신한다. 생의 행복을 득도한 비결이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전주고 낙방, 5ㆍ18 시위 참여로 정학…
19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작가 강원국씨. 4년 전 낸 책 ‘대통령의 글쓰기’가 출간 2년이 넘어 역주행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류효진 기자 |
일요일 밖에 인터뷰 할 시간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바쁘시군요. 요즘 일과가 어떤가요?
“하루 평균 특강이 2.5회예요. 9월부터 신설되는 TV 토크 프로그램도 출연해요. 첫 녹화를 마쳤죠. 기고가 들어오면 틈틈이 쓰기도 하고요. 요즘은 팟캐스트도 많아서 거기에서 부르면 또 가고요.”
올해 6월에 새 책 ‘강원국의 글쓰기’도 내셨죠? 그런데 읽거나 쓸 시간이 나나요?
“강연 사이사이에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갖고 다니는 노트북에 쓰죠. 오늘 오전에도 글 하나 쓰고 왔어요. 강의를 하려면, 쓰지 않으면 못 하겠더라고요. 강의 할 때마다 새로운 말할 거리를 만들어야 하니까. 요즘은 공부하고, 쓰고, 강의하고, 그것만 하고 살아요.”
‘대통령의 글쓰기’ 인기도 여전하던데요.
“지금까지 190쇄를 찍었어요. 두 분 대통령을 향한 향수뿐만 아니라 글쓰기 책으로 많은 분들이 주위에 추천을 하는 것 같아요.”
‘대통령의 글쓰기’는 차트를 ‘역주행’한 책이다. 초판을 2014년 2월 25일에 찍었는데, 2년도 훨씬 지난 2016년 말부터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덕분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고 급기야 유머가 되기도 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연설문을, 아무 직함도 받지 못한 ‘비선’ 최순실씨가 손 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국정농단의 실체가 낱낱이 드러날수록 이 책의 존재도 부각됐다. 국민의정부 청와대에서는 연설비서관실 행정관으로, 참여정부의 청와대에서는 연설비서관으로 일하며 쌓은 ‘말글’의 노하우와 에피소드가 책에 담겼다. 이것은 곧 김대중ㆍ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두 정치인이 견지했던 국정철학과 말글의 원칙이 깨알같이 담겨 있어, 박 전 대통령과 극단적으로 대비됐다. 정치ㆍ인문ㆍ사회 분야를 통틀어 4년 만에 190쇄를 찍은 가히 독보적인 기록이 국민들의 분노와 향수를 증명한다. 이 책을 출판한 메디치에 따르면, 심지어 1쇄에 1만부를 찍기도 했다. 팔리는 속도를 따라 잡으려고 말이다. 통상 책은 1쇄에 1,000~3,000부를 찍는다.
어릴 때 꿈은 뭐였나요?
“(그 시절에는) 다들 판ㆍ검사가 꿈 아니었나요? (웃음) 막연하게들 그렇게 생각을 했죠. 그런데 저는 전주고 떨어지고 나서는 그런 걸 모두 접었어요. 꿈이 없어졌죠. ‘뭐가 되고 싶다’라는 게, 없어졌어요.”
왜 그렇게까지요?
“주눅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그런 걸, 꿈 같은 걸 말하기가 쑥스러워졌던 것 같아요. 꿈을 입밖에 내기가. 뭐, 꿈이 있지도 않았고요. 그 이후로는 어디를 향해서 가는 삶이 아니었어요. 오라는 데에 가고, 그런 식으로 흘러갔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그 시절에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기업에 들어갔죠. 요즘 학생들이 들으면 화 나는 일일 텐데, 그 때는 사람이 모자라던 시절이라 취업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대우증권에서 7년 간 있다가 회장 비서실에서 오라고 해서 갔고, 거기 있다가 또 (국민의정부) 청와대에서 오라고 해서 갔고, 그렇게 김대중 대통령을 모시다가 또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남으라고 해서 남았죠. (2008년) 1개월 만에 효성그룹을 그만 둔 게 처음 제 인생 행로에서 제 의지로 한 결정이에요. 이후 출판사(메디치)로 가면서 인생이 이전과 전혀 다른 양상이 됐죠.”
고교입시에서 낙방했을 때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 경험이 인생에 준 게 무엇인가요?
“자격지심 같은 거였겠죠. (쉽게 말하면) 당시 전주여고 학생들이 이성으로 생각을 안 했죠. (웃음) 그때는 전주라는 지역사회에서 전주고 학생 만이 대접을 받는 시대였어요. 다시는 그런 생활에 내몰리지 말자고 결심했죠. 그러니 고교 내내 (서울대 외에) 다른 대학은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또다시 그 기분을 똑같이 느낄까 봐.”
낙방 후에 부친께서 해주신 말씀이 있나요?
“아버지가 (전주고) 떨어진 걸 알고 오신 날, 저한테 ‘처칠도 육사를 세 번 떨어졌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때 텔레비전에서는 최백호의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가락이 흘러나왔죠.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해요. 아버지가 저를 위로하느라 하신 말씀인데, 표정은 마치 하늘이 무너진 듯 했어요. 저야 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죠. 아무 말도 못했어요. 그 때 전북은 물론이고 광주ㆍ전남에서까지 난다 긴다 하는 애들이 다 왔는데, 그래도 잘 하는 사람은 붙었죠. 저는 일곱 문제를 틀렸는데, 농업에서만 3개를 틀렸어요.”
그걸 아직도 기억하시네요.
“당연히 기억을 하죠. 아무리 난이도 조절에 실패했어도, 만점을 맞았어야죠. 다 맞았다면 불합격 할 리도 없는 것이니, 할 말이 없는 일이죠.”
그는 이 대목에서 당시 시험 문제가 쉬워 변별력이 떨어졌었고, 같은 193점이라도 (과목마다 가중치가 달랐던지) 일부는 합격한 부류도 있었다는 얘기까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얼마나 오랜 기간 당시 기억이 그를 괴롭혔는지 짐작이 됐다.
‘농업에서 3개나 틀리지만 않았더라도!’, ‘문제가 쉬웠으니 만점을 맞았어야지’ 하는 생각을 언제까지 했나요?
“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했죠. 아니, 지금도 기억하고 있잖아요. 그건 평생 따라다니는 거예요. (대학 입학 뒤에) 서울에 와서도 누가 ‘고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어서 ‘전주’라고 하면 그 다음 반응이 ‘전주고 나오셨어요?’예요. 그러니 그 말을 매번 해야 하는 거죠.”
그래도 그 어려운 시기를 극복한 건 결국 자신 아닌가요?
“그때는 ‘다시는 2류는 되지 말자’는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를 엄청 크게 실망 시켰으니까요. 우리 사회는 관용이 없죠. 노무현 대통령도 지적했듯 젊은 시절 시험 한번으로 평생이 좌지우지 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죠. 패자부활의 기회가 없는 거예요. 재기의 기회가. 젊을 때 반짝 공부한 것으로 남은 인생이 결정 되고 역전이 안 되는 사회예요. 저는 어찌 보면 수혜를 입은 거죠. 고등학교를 떨어져서 쓴 맛을 일찌감치 맛 봤고 우리 사회가 승자독식이란 걸 어린 나이에 경험해서 그게 (인생의) 밑거름이 됐어요.”
고교 시절은 어땠나요?
“4년을 다녔죠.”
아니, 왜요?
“고3 때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는데, 당시 우리 학교가 시위를 했어요. 광주ㆍ전남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 중 고교생이 시위를 한 건 유일할 거예요. 그 일로 한달 간 학교가 문을 닫았죠. 시위에 참여해서 두 달 간 서울로 몸을 피했는데, 그 때 1년 정학 징계를 받았어요.”
시위는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신흥고가 미션스쿨이에요. ‘기독청년회’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5월 26일 저녁에 저를 부르더라고요. 다음날 시위를 할 거라면서 제게 미션을 줬죠. 1반이 선봉에 서 달라고. 저는 1반 반장이었거든요. 시위 때 들고 나갈 유인물은 우리 반 교단 밑에 숨겼고, 마이크를 잡아야 하니 방송실도 점거했죠. 엄밀히 말하면 저는 행동대원이었달까요? (웃음)”
다른 시기도 아닌 대입을 앞둔 고3 때인데, 고민되지 않았나요?
“안 했어요. 젊은 혈기에 그랬죠. (나중에) 그렇게 될 줄 몰랐고. (시위 뒤에) 서울 외삼촌 집에 피신해서 지냈는데, 외삼촌네가 세 들었던 (주인) 집이 노영심네 집이었어요. (웃음) 당시 초등학생이던 노영심씨가 맨날 피아노를 쳤던 기억이 나요.”
아버지는 그때는 또 뭐라고 하셨나요?
“그때, 아버지가 자랑스러워 하셨어요. 우리가 시위를 시작하고 나서 학부모들이 소식을 듣고 학교 앞 전주천 너머로 모두 와서 기다렸거든요. 당시 장갑차 두 대가 교문 앞에 와있었고, 계엄군은 거총(据銃)을 하고 있었죠. 위에서는 헬기가 채증 하느라 떠다니고.”
고등학생들한테 총을 겨눴다고요? 전주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네, 계엄 상황이었으니까요. 아마 당시 우리가 교문을 뚫고 나갔으면 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시위대를 돌렸죠.”
어떻게요?
“제가 맨 앞에 서서 구호를 선창했는데, (상황을) 보니까 나가면 죽겠더라고요. 그래서 순간의 판단으로 대열을 돌려서 강당으로 갔어요. 뒤에서 애들은 스크럼을 짜서 따라오고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제가 가는 쪽으로 왔죠. 강당에 가서 구호를 더 외치고, 노래도 부르다 오후 네, 다섯 시쯤 해산했어요. 교문 앞에 계엄군이 도열해서 좁은 통로를 만든 뒤 그리로 나가라고 하더군요. 우리가 명찰도, 학년 표시도 다 뗀 뒤에 학교를 빠져나갔죠.”
그런 뒤에 아버지를 만나신 건가요?
“전주천 너머에 계셨죠. 당시 경양식집 보다는 조금 싼 ‘시식코너’라고 불리는 음식점이 있었어요. 거기로 데려가서 돈가스를 사주시고는 고속터미널로 데려가더니 표를 끊어주시면서 서울로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말씀은 안 하셨지만, 눈빛으로 알 수 있었어요. 대견해 하셨어요. 아버지가 좌파셨거든요. 하하. 오늘 아침에도 통화했죠. 정치ㆍ경제를 가르치셨는데, 평교사로 정년퇴직 하셨어요.”
김우중 회장 울린 글솜씨로 청와대까지
글에서도 느껴지듯, 그는 유머가 많은 사람이다. 그 위트와 해학의 일부는, 김대중ㆍ노무현 전 대통령에게서 온 것들일 테다. 류효진 기자 |
그 시위 참여로 달라진 게 있나요?
“1년 정학 뒤에 복학했는데, 힘들었죠. 후배들하고 고등학교를 다니느라. (웃음)”
그래도, 원하는 대학에 갔잖아요.
“운이 좋았죠. 하지만 대학에 가서는 학과(외교학과)에 전혀 적응을 하지 못했어요. 83학번이니, 군대 30개월 다녀오고 나서 87년에도 방관자처럼 살았죠. 학생운동도 학회 같은 무슨 적(籍ㆍ소속)이 있어야 나가는데, 무적자니까. (웃음) ‘가투’(가두투쟁)에 나가도 혼자 가서 구경하는 식이었죠. 경계인처럼.”
87년 대선 때 대중연설을 직접 볼 기회도 있었을 텐데요.
“그럼요. 보라매공원으로, 여의도광장으로 쫓아다녔죠. 특히 김대중 대통령(당시 후보) 연설은 꼭 갔어요. 그렇게 백만 인파 속에 끼어서 보던 분을 청와대에 가서 직접 보고 그 분의 연설문도 썼으니 이건 감개무량을 넘어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죠.”
김우중 회장 연설문은 어떻게 쓰게 됐나요?
“신입사원 공채로 대우증권에 들어갔는데, 홍보실에 가겠다고 손들었어요. 신문 보다가 기자 하려고. (웃음)”
꿈이 없었다더니, 당시엔 기자가 꿈이었나요?
“꿈이라기보다 그 때 (대학 졸업하고) 할 수 있는 일은 고시 아니면 기자나 회사원이었어요. 그런데 고시는 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회사 다니면서 틈을 보다가 기자를 하려고 했는데, 당시 회사에서 ‘대우증권 20년사’를 발간하라는 대임무가 맡겨지면서 지원하지 못했죠.”
그 미션을 훌륭하게 수행하면서 그는 사내에서 ‘글쟁이’로 소문이 났다. 그 뒤의 일을 그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그 후 사보와 사내방송 일을 했다. 일은 하다 보면 늘게 되는 법. 글 쓰는 게 두렵지 않게 될 무렵, 김우중 회장이 전경련 회장이 됐다. 회장 비서실로 자리를 옮겨 김 회장의 연설문 작성을 보좌하는 일을 맡았다.”
학교 다닐 때 글을 써본 경험이 있나요?
“전혀요. 그런데 제가 (글로) 울리는 데는 좀 자신이 있어요. 김우중 회장도 한 번 울렸죠. (부인) 정희자 여사가 (1999년) 신사임당상을 받게 됐어요. 그러니 부군이자 전경련 회장이었던 김 회장이 가서 축사를 해야 했거든요. 그런데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당시 김 회장이 방배동(자택)을 나와서 호텔에서 지냈어요. 관계가 당시에 안 좋았던 거죠. 그래서 상부에서 저에게 한 지령이 ‘여사를 울려야 한다’였어요. 스트레스를 받으며 축사를 썼죠. 그런데 김우중 회장이 그걸 읽다가 우신 거예요! 그게 더 감동적이었죠. 내용이 기억 나진 않는데 아내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고마움을 절절하게 썼죠. (웃음) 그날 저녁에 축하연도 했거든요. 시상식에 오지 않은 분들까지 초대해서. 그런데 김 회장이 그 축사를 다시 갖고 오라고 했어요. 마음에 들었던 거죠. 그리고는 축하연에서 읽으면서 또 우셨어요.”
정희자 여사는 울지 않았나요?
“그건 확인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그 날로 (김 회장이) 집에 들어가셨다니까, (미션은) 성공한 걸로 봐야죠. (웃음)”
그보다 먼저 사람을 울린 글을 쓴 적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어머니날(지금의 어버이날) 글짓기 대회’에서다. 어머니가 그의 곁을 영영 떠난 몇 달 뒤였다. 그 때 글은 이렇게 시작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 정치인은 공감능력이 필수”
하루하루 설레는 삶, 그 행복은 ‘그간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었다’는 자각이 준 선물이다. 류효진 기자 |
국민의정부 청와대에서 전경련 회장의 연설문을 쓰던 사람을 부른 게 특이해요.
“전문가 케이스랄까요? (웃음) 그때만 해도 전경련이 그렇게 악명이 높지는 않았어요. 산업역군의 이미지가 컸던 때죠. 김 회장도 당시에는 시대의 영웅이라는 평가를 받았고요. 거듭 말하지만 운이 좋았어요. 목표나 의지를 갖고 뭘 하지 않았는데 기회가 주어졌어요. 누군가가 늘 불러줬거든요. 1999년 대우가 문을 닫았는데 2000년에 청와대에 들어갔어요. 당시 고도원 연설비서관에게 다른 분이 저를 추천한 거죠. 스피치 라이터를 두기가 흔치 않았는데 김 회장이 전경련 회장이 되면서 제가 그런 경력을 갖게 됐고, 당시 청와대에서는 경제 분야 연설 행정관 자리에 결원이 생겨 충원을 해야 하는 사정이 생겼죠.”
두 대통령의 연설을 보좌하면서, 정치인의 말에 대해 생각할 기회도 많았을 것 같아요.
“사실 정치는 말로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학교 다닐 때 말하는 걸 배우지도 않고 훈련할 기회도 없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 잘 하는 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죠. 말 잘하면 ‘사기꾼 같다’, ‘말만 번지르르하다’고 하잖아요. 심지어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말도 있었죠. 노무현 대통령도 말 때문에 얼마나 핍박을 받았나요? ‘입 닥치고 경제에나 올인하라’면서요. 탄핵도 사실 ‘말한 죄’지요.”
국회의원 중에서도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드물죠.
“정치인은 특히나 말을 잘 해야 해요. 말 못하는 사람이 정치를 해선 안돼요. 말을 못하면 토론도 못하죠. 국회의원 중에 자기 연설을 자기가 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바빠서 보좌진이 쓰는 것 말고, 자기가 쓸 실력이 안돼서 보좌진에게 의지하는 건 문제예요. 박근혜 대통령 탓할 게 아니에요. 여야가 늘 대립하는 데에 그 요인도 크다고 봐요. 그 저변에는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걸 학교 교육을 통해서 배웠어야 하거든요. 말하고 토론하면서요. 그렇지 않으면 ‘동물의 뇌’로 으르렁거리면서 살게 되는 거죠.”
먹히는 말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가장 필요한 건 공감능력이에요. 먹히는 말이란 건, 사람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하게 만드는 말이잖아요. 그건 ‘내 말을 듣고 읽는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역지사지 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어요. 특히 정치인들은 사회적인 공감능력이 있어야 해요. 불의에 공분하고, 불합리한 것을 보면 개선하려고 하고, 내 이익과 관계 없는 일이지만 관심을 갖고 헌신하는 거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공감능력이 있으면 경쟁에서 불리해지는 구조지요. 남을 돕는 데 시간도 뺏기고 좌고우면해야 하니까 뒤처져요. 그리고 경주마처럼 달려서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사회의 주요한 위치에 포진하게 되는 거죠.”
두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공감능력의 중요성을 느꼈나요?
“두 분은 사회적 공감능력이 아주 뛰어나신 분들이었어요. 사실 정치인의 균형감도 거기서 나오는 법이죠. 노무현 대통령 임기 중에 집회에 참여했던 농민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경찰이 물론 잘못했죠. 사회 분위기가 들끓었어요. 일방적으로 경찰을 욕하고 매도했죠. (사과문) 초안을 그렇게 써서 갔더니 대통령께서 그러시더군요. ‘이러면 안됩니다. 경찰도 사기가 중요해요.’ 그러면서 경찰을 고려한 대목을 넣으셨어요. 욕 먹을 각오를 하고 그런 거지요. 사회 분위기에 휘둘려 따라가지 않고.”
2005년 12월 농민 전용철ㆍ홍덕표씨의 사망과 관련해 국가인권위원회가 경찰의 과잉행위에 의한 결과라는 조사 발표를 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했던 대국민사과를 일컫는 것이다. 당시 노 대통령은 책임자에 응분의 책임을 지우고 피해자 국가 배상을 약속하면서 사과했다. 그리고 이런 설명도 했다. ‘저의 사과에 대해서는 시위대가 일상적으로 휘두르는 폭력 앞에서 위험을 감수하면서 힘들게 직무를 수행하는 경찰의 사기와 안전을 걱정하는 분들의 불만과 우려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식을 전경으로 보낸 부모 중에 그런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권력은 특수한 권력입니다. 정도를 넘어 행사되거나 남용될 경우 국민에게 미치는 피해가 매우 치명적이고 심각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청와대 8년은 ‘쓸 수 있을까’ 두려움의 연속
그는 이제 자신의 말과 글로 세상의 관심을 받고자 한다. 올해 6월 낸 책 ‘강원국의 글쓰기’가 그 시작이다. 류효진 기자 |
그런 훌륭한 대통령들과 일했지만, 청와대에 근무하는 스트레스는 엄청났을 텐데, 어떻게 이겨냈나요?
“거의 매일 소주 반 병씩은 마셨어요. 스트레스라기 보다 무서웠죠.”
뭐가요?
“못 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잘 못쓸지도 모른다는?
“아니요. 아예 못 쓸지도 모른다는 거요. 매번 그랬어요. ‘이번에는 쓸 수 있을까?’ 어떻게 버텼나 싶어요. 제가 역량이 있었다면 괜찮았겠죠. 청와대를 떠난 뒤로는 누구의 연설도 듣지 않았어요. 이명박ㆍ박근혜 대통령 때도 연설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도 (청와대를 나온) 첫 해에는 3월, 8월, 10월이 다가오면 기분이 싸해지더라고요. 뇌가, 몸이, 자동적으로 걱정을 조건반사하는 거죠. 3ㆍ1절 기념사, 8ㆍ15 경축사, 10월 1일 국군의날 연설이 있으니까요. 8년 간 주기적으로 겪으니 그 시기가 오면 긴장이 되는 거예요.”
역량이 없었다면 대통령이 제일 먼저 알았을 텐데, 그렇지 않으니 맡긴 거겠지요.
“다행히도 두 분 대통령은 다른 사람의 역량에 의존하는 분들이 아니었어요. 본인들이 (부족한 걸 모두)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대통령의 글쓰기’를 쓸 수 있었던 비결은 청와대 재직 시절 기록한 덕분인가요?
“아니요. 대통령의 일을 하다 보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새겨져요. 참여정부에서 나오고 나서 5년 동안 내내 사람들을 만나면 늘 얘기를 했거든요. 누구든 늘 저를 만나면 물었으니까요. ‘노무현ㆍ김대중, 두 대통령은 어떤 분들이야?’, ‘무슨 에피소드 없어?’, ‘청와대 생활은 어땠어?’라고. 그러니 늘 말을 하면서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죠. 그 때 책을 쓰라는 사람도 많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안 쓴 게 다행이에요. 왜냐하면, 그때 안 쓰고 말을 계속하면서 생각을 숙성시킬 수 있었거든요. 발효도 되고 조미료도 쳐지고 재미없는 건 도태되기도 하면서. (웃음)”
책을 쓰자고 마음 먹은 계기가 있었나요?
“(책에도 썼듯이)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 중에, 저더러 나중에 책으로 써서 남기라는 말씀을 하긴 하셨지만, 청와대 나와서 몇년 간은 속으로 ‘무슨 책이야’ 했어요. 그런데 출판사에서 (편집주간으로) 일하면서 책을 어떻게 쓰는 지를 알게 된 거죠. 또 그 무렵 페이스북을 하면서 내가 내 이름을 달고 처음 글을 써보면서 내 글이 먹힌다는 걸 알게 됐고요. 자신감이 생겼죠. 어렴풋이 ‘그럼 책을 한번 써볼까’ 하다가 결정적으로 어떤 저자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는 순간 ‘나도 써야겠다’ 마음 먹었어요. 그 다음날로 바로 출판사 대표한테 말했죠. ‘휴직계 내고 책 쓰겠다’고.”
노 전 대통령의 당부에도 그간 책을 쓰지 않은 이유는 뭔가요?
“안 쓴 게 아니라 못 쓴 거죠. 결정적으로 출판사에 들어가면서 책을 쓸 수 있게 된 거예요. 출판사에 가기로 한 건 청와대를 나온 이후에 효성에 들어갔다가 한 달 만에 사표 쓴 이후 제 인생에서 제 의지로 결정한 두 번째 일이었죠. 2012년 추석을 앞두고 받은 위암 판정이 계기가 됐어요. 결과적으로 오진이었는데, 정말 진한 경험이었어요. 의사인 처남까지 위암일 확률이 98%라고 했으니까. 수술날 잡아 놓고 정밀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한달 반 동안 확실한 암환자로 살았죠. 그때 검사 때문에 서울대 국제백신연구소에 갈 일이 있었어요. 바로 일주일 전 연구소 앞에 있는 동창회관에서 엄청 떨면서 생에 첫 주례를 섰던 게 생각나더라고요. 그때로 돌아가면 너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진으로 판명 난 뒤에 ‘그렇게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다 접었어요. 그리고는 월급 100만원 정도만 받을 수 있다면 ‘강원국’으로 살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마음 먹었죠.”
삶의 태도에 큰 영향을 줬군요.
“그간 나는 내가 주인인 삶을 산 게 아니었어요.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생각을 읽으며 살았죠.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 사회에서는 보스, 청와대에서는 대통령. 그렇게 영혼 없이 산 것에 대한 각성이 생긴 거죠. 이제는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자. 한마디로 말하면, ‘하기 싫어요’, ‘나 못해요’ 할 수 있어야 하죠. 나는 그런데 지금까지 평생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포장하며 살았거든요. 그러니 청와대에 있을 때도 대통령에게 역량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고, 그걸 메우려고 밤새 일했죠. 그 (위암 해프닝) 이후에는 못하는 건 못한다, 하기 싫은 건 하기 싫다는 그 두 마디는 하고 살자고 결심했어요. 그러려면 돈을 제대로 받으면서 누릴 수는 없었죠. 저는 그걸 포기한 대신 책 쓰기를 얻었어요.”
문재인 대통령에게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혹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전혀 생각이 없어요. 제가 하지 못할 거예요. 젊을 때는 실력을 몸으로라도 때울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지도 못하는 나이니까요.”
그래도 그간의 힘든 경험들이 지금의 강원국을 만든 거겠지요.
“사람은 맵고 짜고 쓴 경험을 달가워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련과 역경, 고난이 오면 좌절하기도 하는 그 순간이 나중에 자기 인생의 행운으로 크게 돌아와요. 고등학교 입시에서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대학을 그렇게 가지 못했을 수 있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 제가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이 됐거든요. 이모, 고모, 외삼촌… 이런 남의 집에 많이 살면서요. 그런데 눈치가 빠르니 대통령 연설을 쓰게 되더라고요. 둔하면 대통령의 연설문을 절대 못써요.”
‘쓰느라 힘들었다. 이제 당신이 읽느라 고생할 차례다’는 노무현 오마주
그는 ‘작가 강원국’으로서 자신의 얼굴을 다시 만들어 나가고 있다. “5년쯤 뒤엔 유시민 선배를 넘어설 것”이라는, 그래서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얼굴에서 희망이 넘실거렸다. 사진은 강 작가의 얼굴과 그의 연관 검색어들을 워드클라우드로 만들어 합성한 것이다. 류효진 기자 |
결국, 좋은 글이 나려면 그 밭은 마음이다. 그의 책이 유쾌한 데에는 긍정적인 삶의 태도가 있었던 거다. 인터뷰 하는 동안 그의 말을 들으며 박장대소가 빵빵 터졌다. 특히 올해 낸 ‘강원국의 글쓰기’의 서문 중 마지막 대목이 발군이었다. ‘쓰느라 힘들었다. 이제 당신이 읽느라 고생할 차례다.’ 자신의 수고를 드러내면서도, 겸양과 유머가 담긴 문장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그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오마주(존경의 표시로 그의 작품 일부를 인용하는 일)예요. 노 대통령이 퇴임 한 뒤에 온라인에 글 쓰고 토론하는 공간 ‘민주주의 2.0’을 만드셨잖아요. 그 사이트에 우리(대통령과 일부 참모)끼리 소통하는 게시판이 있었어요. 어느 날 대통령이 장문의 글을 올리시면서 ‘이거 쓰느라고 죽는 줄 알았다, 이제 당신들이 죽을 차례다’라고 덧붙이셨죠. 일종의 발제였는데, 그 말이 어찌나 재미있던지요. 그 분의 장난기였죠. 그런데 그리고 나서 얼마 안돼 돌아가셨어요.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는 말을 남기시고서. 글 쓰는 걸 그렇게 좋아하시고, 재미있어 하시고, 굉장히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로 생각하시던 분이 말이지요…”
말과 글로 먹고 살아온 강원국의 삶의 도는 뭔가요?
“음, 나 그런 거 없는 거 같은데요. 말할 수준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런 깨달음을 얻는 경지에 못 갔어요. 이제 ‘나’로 산 지가 4년 밖에 안됐어요. 그래서 요즘 저는 ‘네 살 먹었다’고 말하고 다니거든요.”
그럼 앞으로 만들어갈 일들이 더 많겠네요.
“그럼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는 제대로 해온 게 없어요. 그게 오히려 희망이죠. 지금부터 하면 잘 할 거 같거든요. 제대로 해왔는데 이 지경이면 어쩌겠어요? (웃음) 두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나니,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책 쓰고 강의도 하면서 살지만, 아직 수준이 낮지요. 지금이 바닥인 거예요. 그러니 저는 5년 후가 정말 기대가 돼요! 아마도 유시민 선배를 넘어설 수 있겠다 싶어요. 저는 성장 속도가 아주 가파르거든요. 하하. 아직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이제 대부분 120살쯤 살게 될 텐데, 생각해보세요. 아직 절반도 못살았는데!”
재미있게 살고 계시는군요.
“지금 제일 재미있어요! 이 재미가 언제까지 계속될 지는 모르죠. 아직도 강의를 가면 떨림이 있어요. 지금까지 1,200회 정도 했는데도 여전히. 떨리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다른 일을 해야겠죠. 강의를 할 때마다 새로운 얘기를 한 문장이라도 추가하려고 해요. 그걸 찾는 과정이 재미있고 그러니 말할 때 신이 나요. 그 한마디만큼 내가 성장하니까. 매일 강의가 있으니 매일 내가 자라고 있는 거죠. 그런 게 행복해요. 지금 사는 게 재미없는 분은 스스로 점검해봐야 해요. 내가 혹시 죽어있는 건 아닌지, 성장이 멈춘 건 아닌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똑같고,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내가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면 사는 게 재미없어요. 내 글을 쓰고 말하면서 살아야 성장해요. 읽고 듣는다고 성장하지 않아요. 한마디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내일은 좀더 높은 수준으로 드러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삶, 그게 성장하는 삶이죠.”
이건 드러내지 않고 살아본 사람 만이 깨달을 수 있는 ‘삶도’다. 그가 말했다. “우리 사회는 묵묵히, 존재감 없이, 시키는 일만 잘 하면서 살수록 성공하게 만든다”고. “회장들 말고는 사장들 조차 존재를 드러내면 찍힌다”고. “없는 사람처럼 회장을 돋보이게 하고 조용히 돈 벌게 해줄수록 윗사람에게 인기가 있다”고. 그래서 그는 당부했다. ‘관종’(관심종자)이 되라고. “모든 사람이 관종이 돼야 해요. 투명인간으로 살려고 태어났나요?”
하긴, 그렇게 ‘투명인간’ 되기를 강요 받아 성폭력을 당하고도 ‘싫어요’를 못했다. ‘싫어요’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를 고민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다가 또 당했다. 더 당할 수 없어 나섰더니, ‘을’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 ‘조직의 생리’를 재판부만 몰라 ‘피해자 같지 않다’고 되레 나무랐다. 피해자는 그림자 중의 그림자, ‘왕의 비서’였다.
긍정적인 의미의 ‘관종’으로 살아 행복을 얻은 산 증인이 앞에 있으니, 관종되기를 시도해보지 않을 이유 뭔가.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