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멧돼지 만나면 우산을 펴라
ESC
비 오는 계절 재밌는 우산 이야기
그림, 영화, 대중가요 속 우산의 메시지
영조의 ‘우산 속 우산’·영화에 등장한 ‘사랑 우산’ 등
파란 비닐우산 추억·우산으로 멧돼지 퇴치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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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에 대해서라면 오래오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검은빛이고 나는 펼쳐진 시간을 사랑한다.’ 유희경 시인의 ‘우산의 과정’ 첫 구절이다. 우리나라 월평균 강수량이 가장 많은 7월과 8월은 우산과 가장 가깝게 지내는 시기다. 지루한 장마 속, 흔해 빠진 우산을 다시 보는 이야기를 준비했다.
결혼식이나 돌잔치 답례품, 단체행사 기념품으로 흔하게 주고받는 게 수건이나 우산이다. 신발장을 뒤지면 누군가의 기념일이 찍힌 우산 하나쯤 쉽게 찾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260여 년 전, 1759년 음력 6월 조선 왕실에도 혼례가 있었다. 영조가 정순왕후를 맞으러 가는 친영례를 마치고 왕후와 함께 창경궁으로 돌아오는 행렬을 기록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반차도’(이하 가례반차도)는 현대로 치면 결혼식 과정을 담은 비디오나 단체 사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뮤지엄 숍에서 판매하는 ‘가례도감의궤 3단 우산’은 이 모습을 담았다. 활짝 편 우산의 그림을 살피면 혼례 행렬 속 자그마한 빨간 우산이 눈에 띈다. 우산 속의 우산. 실은 햇빛을 가리는 일산(왕실에서 행차할 때 받치던 의장 양산)이다. 우산 역사에서 초기의 우산은 동양이나 서양 모두 신분이 높은 이들의 해가림 용도나 의례용이었다. 조선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혼례 행렬에서 주인공인 신랑·신부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신부는 가마에 있을 거라고 짐작되지만, 영조는 어디 있는 것일까? 왕의 가마는 사면의 벽체를 열어 둔 모양새인데, 그 안은 텅 비어있다. 조선시대는 왕실의 어떤 행사 기록에도 왕의 얼굴을 남기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한다. 그림엔 없지만, 당시 현장에 왕은 있다. 여기서 수수께끼가 하나 더 등장한다. 가례반차도 전체를 보면 왕이 거동할 때 세우는 깃발인 교룡기 아래, 똑같이 생긴 빈 가마가 두 대 있다. 왕은 어디에 있을까? 두 가마 중, 앞은 경호용 빈 가마인 부련이다. 왕이 있는 가마는 뒤쪽 가마로 곁에 빨간 일산을 드리웠다. 우산으로 왕이 어디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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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속 우산’이 또 하나 있다. 2017년 서울아트시네마는 개관 15주년 이벤트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2016) 포스터를 그려 넣은 한정판 우산을 선보였다. 우산 속 그림 중, 하녀 숙희(김태리)가 귀족 아가씨 히데코(김민희)에게 지우산(대오리로 만든 살에 기름 먹인 조이를 발라 만든 우산)을 받친 모습은 <아가씨> 확장판에 추가된 장면이다. 애틋한 장면 같지만, 우산 덕을 보지 못하고 비에 젖어버린 히데코의 대사가 은근한 웃음 포인트다. “얘 넌 하녀가 무슨 우산을 저 혼자 다 받니?” 첫 등장에서부터 우산을 쓰고 나왔던 숙희는 평범한 하녀가 아니었고, 히데코 역시 평범한 아가씨가 아니었다. 속고 속이는 와중에 남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하녀의 일이 몸에 익지 않았던 숙희와 알면서도 짜증을 감추지 못한 히데코의 본모습이 설핏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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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으로 표현하는 사랑은 영화에서 수차례 반복된 테마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에서 주차 단속원 다림(심은하)과 초원사진관 사진사 정원(한석규)은 한 우산을 쓰면서 거리를 좁혔고, <번지점프를 하다>(2001)에서 인우(이병헌)는 자신의 우산으로 뛰어든 태희(이은주) 쪽으로 우산을 기울여주다 몸 절반이 푹 젖었다. 영화에서 인우는 태희와 다시 마주치길 기대하며 맑은 날에도 매일같이 장우산을 들고 버스정류장을 기웃거렸다.
인우처럼 비 예보가 없는 날에 장우산을 들고 다니면 남의 이목을 끌기 마련이다. 장우산을 들고 비를 맞는 행동은 더 그렇다. 영화 <클래식>(2002)에서 지혜(손예진)는 비에 흠뻑 젖은 얼굴로 말한다. “”“우산이 있는데 비를 맞는 사람이 어디 저 하나뿐이에요?”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고서야 손에 우산을 든 채로 비를 맞을 리 없겠지만, 사랑이 이유가 되고 우산으로 영화의 반전을 만든 장면이다. 우산이 있는데 비를 맞는 사람의 원조로 돈 록우드(진 켈리)를 빼놓을 수 없다.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1952)에서 그는 연극배우인 연인 캐시(데비 레이놀즈)를 집에 바래다주고 돌아가는 길에 우산을 접고 탭댄스를 춘다. 장우산의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고, 물웅덩이를 첨벙이며 빗속에서 노래하던 록우드는 경찰에게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를 사자 들고 있던 우산도 남에게 줘 버린다. 그가 그토록 들떠있는 데는 까닭이 있다. 자신의 연기와 출연하는 영화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낙담했으나, 오랜 동료인 코즈모(도널드 오코너), 캐시와 함께 밤새도록 이야기하면서 영화를 구할 희망을 찾았기 때문이다. 기쁨에 겨워 비를 즐기는 그의 마음속엔 태양이 빛난다.
<사랑은 비를 타고> . 엠지엠(MGM) 제공. |
한때 시대를 풍미했으나 역사로 남은 무성영화처럼, 대나무 살대의 파란 비닐우산도 추억으로 남았다. “비닐우산을 펴면 나는 푸른 비닐처럼 가볍게 비밀스러워진다.” 낮은 저음으로 읊조리는 목소리는 고 신해철의 것이다. ‘푸른 비닐우산을 펴면’은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가 가사를 쓰고 그룹 넥스트 리더로 활동하던 신해철이 곡을 붙인 노래다. 비닐우산 값을 500원으로 기록했던 유하의 시가 1991년에, 곡은 1993년에 발표되었으니 그 무렵까지는 파란 비닐우산을 썼던 경험과 감상적인 상념이 공유되던 시기였을 테다.
바람이 거세게 불면 곧잘 비닐과 대나무 살대가 분리되어 낙하산처럼 부풀던 파란 비닐우산은 어린이들에겐 근사한 놀잇감이었지만, 그만큼 조악한 만듦새로 품질에 대한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하루살이’ 비닐우산보다 튼튼하다고 홍보하던 플라스틱 살대의 ‘간이 비닐우산’이 시중에 첫 선을 보인 때는 1971년께다. 파란 비닐우산은 1980년대 말까지도 유통되다가 해외 공장에서 만든 플라스틱 살대 우산이 엇비슷한 값으로 보급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1994년에는 전국에 유일하게 남은 비닐우산 제작자 김동식씨의 사연이 방송을 타기도 했다.
<클래식> . ㈜에그필름 제공. |
싼값에 쓰고 쉬 망가진다고 여기던 비닐우산도 고급품이 있다. 영국 펄튼의 ‘버드 케이지’ 우산은 새장 같은 둥근 돔형으로 어깨까지 완전히 가릴 수 있는 형태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비롯한 영국 왕실 인사들이 사용하며 유명해진 이 우산은 강한 비바람을 피하면서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중에게 얼굴을 보여야 하는 정치인을 위한 투명 비닐우산으로는 일본 화이트 로즈의 ‘카테루’가 있다. 1982년부터 생산했다. 일본어로 ‘이긴다·승리한다’는 뜻의 카테루 우산은 거리 선거유세용으로 입소문을 탔다. 1958년 처음 비닐우산을 개발한 화이트 로즈는 일본에 하나 남은 수제작 비닐우산 공방이라고 한다.
카테루 우산. whiterose.jp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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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이 불편한 이들이 평소 지팡이로, 비가 오면 우산으로 사용 가능했던 제품도 있다. 승려의 고급 법의가 비에 젖지 않도록 특대형으로 제작한 우산도 있다. 일본 스님에겐 투명 비닐우산이, 우리나라 스님에겐 자동우산이 유용한가 보다. “웬만큼 사나운 짐승도 눈앞에서 우산을 탁 펼치면 자기보다 덩치 큰 적으로 착각해 달아난다. 특히 멧돼지 상대로 효과적이라서 자동우산은 산길 다니는 스님들의 필수품.” ESC 과거 연재 칼럼 ‘박지훈의 서바이벌 대작전’ 중 우산에 관한 내용이다. 멧돼지는 시력이 나빠 우산을 장애물로 인식한단다. 멧돼지와 우산이 만나는 또 다른 상황은 화투패 속에 있다. 4장씩 열두 달을 상징하는 화투에서 7월의 홍싸리 속에 멧돼지 그림이, 12월 비광에는 일본의 서예가 오노도후로 알려진 인물이 우산을 쓰고 있다.
우산이 돼지를 구한 적도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2017)에서 주인공 미자(안서현)가 강원도 산골에서 함께 자란 슈퍼돼지 옥자와 서울 회현역 지하상가를 질주하는 장면. 돼지를 회수하려는 기업 미란도 측이 옥자를 향해 마취 총을 쏘자, 동물해방전선(ALF) 멤버들은 우산을 활짝 펼쳐서 이를 막아낸다. 무지개색의 화려한 우산이었다.
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 참고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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